난 조선까에 가까운 사람이지만, 임진왜란 초기의 패전을 가지고 당시의 조선 장수들을 바보 취급하는 것에는 반대한다. 특히 임진왜란에 투입된 장수들이 1.5~2진급 장수들이었는데도 일방적으로 밀렸다고 지껄이는 사람들을 보면 한심하다. 임진왜란 당시 상황을 보면 국력, 병력에서 일본의 우위가 확실한 상황이었고, 일본은 그 힘을 총동원해서 조선을 쳐들어 왔으며, 그래도 결국은 조선이 막아낸 전쟁이었다.
실상
1. 임진왜란 당시 이미 일본의 국력은 조선을 앞서 있었다. 전쟁 직전 조선의 인구 추정치는 학자에 따라 다르지만 1,000~1,400만 정도로 본다. 일본 인구는 1,200~1,800만 정도로 추정된다. 이미 인구에서 일본이 조선을 앞선 상황이었다.
2.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사한 일본 전국의 농업생산량은 1,850만 석이다. 히데요시는 전쟁 준비를 하면서 당시 조선의 농업 생산량도 조사, 추정토록 했는데, 대략 1,200만 석 정도였다고 한다. 저 시대에는 농업 생산량이 곧 국력과 다름없다. 일본은 국력에서 자신들이 월등히 앞선다고 생각하고 전쟁을 일으켰다.
3. 중세시대 동원 가능한 병사는 농업 생산량에 비례한다. 일본 전국시대의 경우 대략 쌀 1만석당 250~300명 정도로 병력을 계산하면 대충 맞다. 따라서 당시 일본 전체의 병력은 50만명을 넘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 중 임진왜란을 위해 동원한 병력이 33만명이다. 20만이 조선에 직접 원정을 왔으며, 13만은 나고야에서 대기 중이었다. 그야말로 총력전이었던 셈이다.
4. 반면 선조실록에 기록된 조선의 군역 대상은 17만 명 정도다. 하지만 당시는 이미 군역이 상당히 문란해져 있는 상황이었으며, 실제 군역 대상은 5만 명 정도에 불과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그 중 훈련이 어느 정도된 정예 병사는 1만 명도 채 되지 않았다고 한다.
5. 일본의 선봉장이 전국시대 장수 중에서 급이 떨어지는 고니시 유키나가라는 점을 가지고 히데요시가 가신들만 가지고 전쟁을 치렀다는 이상한 소리를 하는 사람이 있다. 하지만 알고보면 일본의 전국 다이묘들과 최정예 장수들이 총동원된 것이 임진왜란이다. 고니시 유키나가가 선봉에 선 이유는 고니시 유키나가가 큐슈와 대마도의 최전선에 있는 가문들을 통솔하기에 적합했기 때문이다.
6. 5대로 중 한명이자 히데요시의 양자와 다름없었던 우키다 히데이에가 총사령관을 맡았고,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모리 데루모토, 우에스기 가게카쓰 등 3명의 5대로들이 가신들을 이끌고 참전했다. 히데요시의 친우였던 마에다 도시이에와 임진왜란에 참전하지 않기 위해서 갖은 수를 다 쓴 도쿠가와 이에야스 정도만이 동원에서 제외되었을 뿐이다. 이 두 가문도 나고야의 13만 대기병이 출전했다면 동원될 수 밖에 없는 처지였다.
7. 히데요시의 장자방으로 불렸던 구로다 칸베에, 일본 최고의 용사로 일컬어진 시마즈 요시히로, 도사를 평정했던 조소카베 모토치카, 일본 극동지역을 평정했던 다테 마사무네, 나중 동서군을 막론하고 최고의 무장으로 칭송받았던 다치마나 무네시게, 만능 장수 나베시마 나오시게 등 최고 장수들이 대부분 출전했다. 히데요시의 가신단 중 최고 무장으로 일컬어지는 후쿠시마 마사노리, 가토 기요마사, 시마 사콘 등도 모두 출전했다.
8. 당시 일본은 100년 가까이를 전쟁과 함께 한 국가였다. 조총이라는 신무기도 있었다. 20만 대군 중 10%만 조총병이라고 하더라도 무려 2만의 조총을 보유한 셈이다. 5미터가 넘는 장창병들을 활용하여 대보병전과 기병전 모두에 대응할 수 있는 집단 전술을 체득하고 있었다. 전쟁 경험, 전술, 무기 등 모든 면에서 당대 최고 수준의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이를 모조리 조선에 쏟아 부었다.
9. 이런 전쟁에서 초기에 적들의 진격을 막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전시에 한 지점으로 군사를 모으고 중앙에서 지휘관을 보내는 제승방략 체제하에서는 더욱 그랬다. 전체 병력에서도 열위인데 그나마도 다 각개격파 당하는 상황이었다. 자신이 원하는 지역에서 제대로 갖추고 싸운 싸움이 없었다. 신립의 탄금대 전투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10. 정말 조선을 까고 싶다면, 인물이 아니라 시스템을 까야 한다. 임진왜란 당시의 무능함을 깔게 아니라 그 전쟁 이후에도 반성이 없었던 우둔함을 까야한다. 에도 시대 일본도 심각하게 봉건적인 사회였지만, 그래도 조선보다는 훨씬 성장속도가 빨랐다. 메이지 직전 1870년 당시 일본의 인구는 3,600만 명까지 증가했다. 반면 조선은 1,600만 명 수준이었다. 산업화 이전에 이미 조선과 일본의 국력차는 상당히 벌어져 있었던 것이다.
원문 : 마왕의 서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