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그럴 때가 있지 않은가. 과거에 읽었던 책들을 다시 읽고 싶은 때 말이다. 정치가 엉망일 땐 정치를 비판하는 책을 다시 읽고 싶고, 현실이 답답하고 전망이 안 보일 땐 역사책 한 구절을 되뇌며 상실감을 달래고 싶은, 그런 때가 있게 마련이다. 오늘이 그런 날이다.
예전에 읽었던 책, 정확하게는 예전에 손수 써두었던 서평을 다시 읽어보고 싶어지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최근 내가 살고 있는 지역의 자치와 혁신을 논의하는 모임에 참여하면서 다시금 도시와 도시문화에 관심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
이 글은 경기문화재단에서 발행하는 ‘월간 문화나루’에 기고했던 것이며, 시간의 편차를 감안해 약간의 수정과 가필이 이루어졌음을 밝혀둔다.
한 외국인이 보는 수도권
프랑스 지리학자 발레리 줄레조의 논문이 『아파트공화국』(후마니타스)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됐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잠시 혼란스런 감정에 휩싸일 수밖에 없었다. 읽고 난 뒤에도 마음이 가볍지 않았다. 왜 하필 우리나라의 아파트(문화)를 서울의 지리에도 어두운 외국의 지리학자가 연구하게 되었을까?
아파트가 전체 주거 형태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현실인데도 왜 우리나라 학계에서는 그에 관한 변변한 논의조차 진행하지 않는 걸까? 이래저래 씁쓸해진 마음은 공연히 강준만 교수의 『강남, 낯선 대한민국의 자화상』(인물과사상사, 2006, 이하 『강남』)에 대한 트집으로 이어졌다. 강준만의 『강남』은 다분히 발레리 줄레조의 학문적 선취를 답습한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아파트공화국』과 『강남』에서 다루고 있는 ‘아파트’ 혹은 ‘강남’이라는 주제는 한국사회의 ‘도시화 과정’을 비롯해 ‘공간과 욕망’ ‘문화와 자본, 권력’ 등 도시문화 속에 내재된 다양한 담론을 끌어내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열쇳말들이다. 따라서 이 글은 『아파트공화국』과 『강남』을 중심에 놓고 도시문화에 대한 다양한 이슈와 과제들을 점검하는 형식을 취하고자 한다. 또한 신도시의 도시문화를 형성하기 위한 색다른 의견을 청취하는 의미로 다양한 텍스트를 아울렀다.
경기침체, 특히 건설경기의 부진이 장기간 이어지고 있음은 기지의 사실이다. 관련 업계에 종사하는 사람이 아니라 해도 피부로 느낄만한 다양한 징후들을 접하며 살고 있다. 어느덧 부동산과 경기, 건설업계의 동향 등은 우리의 실생활과 밀접한 관심품목으로 여겨지고 있는 것이다. 한편, 경기침체와 상관없이 경기도와 인천시 등 수도권지역은 여전히 택지개발과 대규모 주거단지 건설이 진행 중이다.
한마디로 ‘수도권은 언제나 공사중!’이다. 좀 과장되게 말해서 “자고일어나면 신도시가 하나씩 탄생해 있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문제는 그렇게 속속 들어서는 신도시 혹은 대규모 주거지역에 여타의 부대시설은 신속하게 들어서는데 비해 도시의 문화를 형성할 만한 것들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문화는 어려운 것이다? 아니다. 문화는 다만 눈에 잘 띄지 않을 뿐이다. 문화는 쌓아올린 벽돌의 개수나 깔린 콘크리트의 연장 길이로 설명되는 것이 아니다. 공연장이나 박물관, 조형물 몇 개 설치해서 될 것이라면 신도시치고 문화도시 아닌 곳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문화는 그런 것들로만 설명되지 않는다. 문화는 그 자체로 사람들의 삶의 모습이며, 삶의 색감이자 질감이다. 한 도시의 문화를 알기 위해서는 우선 그 도시의 형성과정과 함께 겉모습 안에 들어 있는 내부의 풍경들에 주목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의 아파트 문화를 연구한 발레리 줄레조의 수고는 소중하다.
발레리 줄레조는 우선, 20세기 중반 프랑스에서 실패했던 도심 주변부 대단위 아파트 단지 조성이 유독 한국에서 대성공을 거두고 있는 점에 주목했다. 또한 그 확산 속도에 경이로움을 금치 못했다. 아파트 단지가 만들어낸 새로운 도시문화의 고갱이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적잖은 관심을 가졌던 듯하다. 관심은 곧바로 그의 학문적 열정으로 이어졌다. 한국의 아파트를 박사학위 논문의 제재로 삼은 그는 곧 현장취재에 열을 올렸고, 그 노력의 결과물이 지난 2003년 프랑스 현지에서 책으로 나와 학계의 주목을 받는 한편, 가르니에 상(Francis Garnier Prize)을 수상하기에 이른다.
발레리 줄레조의 연구방향은 크게 세 가지다.
(1)프랑스와 한국의 대단위 아파트는 어떻게 다른가?
(2)서울이 순식간에 ‘아파트공화국’으로 탈바꿈하게 된 동인과 동력은 무엇인가?
(3)‘아파트공화국’의 미래는 장밋빛인가, 잿빛인가?
먼저 저자는 서울의 아파트숲을 바라보며 한숨 섞인, 그러나 경이로운 표정으로 “확실히 서울은 지리학에 저항하는 도시다”라는 탄식을 내뱉는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일찍이 프랑스의 ‘그렁떵성블grand ensemble’이나 ‘씨떼(cite, ‘단지’를 뜻하는 프랑스어)가 모두 실패로 돌아갔음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한국의 대단위 아파트 단지 조성은 대성공을 거뒀다. 그 이유를 저자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프랑스의 아파트 단지는 1950년에서 1980년까지의 기간에 걸쳐 만들어졌는데, 오늘날에는 매우 부정적인 이미지로 받아들여진다. (중략) 그렁떵썽블이나 씨떼는 2차 세계대전 이후 심각한 주택난을 해결하기 위해 ZUP(우선시가화지구)의 절차에 따라 지정된 토지 위에 급조됐다. (중략) 그러나 이들 지역의 빠른 쇠락으로 점차 무기력하게 고립된 빈민층의 피난처가 되었다.”
서울, 지리학에 저항하는 도시
1960년대에서 1990년대 사이 농경사회에서 도시산업사회로의 빠른 전환, 군대식 선전구호, 독재정권에 의한 외향적 경제성장 등은 한국적 모델을 특징짓는다. (한국에서 아파트는)재분배의 측면보다는 양적 성장 그 자체에 과도하게 집착함으로써 ‘개인의 행복’보다는 ‘사회적 행복’이라는 특별한 비전에 접목된 한국적 태도이며, (중략) 강력한 권위주의 정부와 재벌들이 손을 잡고 급격한 성장을 추구하면서 만들어낸 한국형 발전모델의 ‘압축적 표상’인 셈이다.”
한국의 아파트가 권위주의 독재정권이 지향한 성장지상주의의 산물이라는 것은 새삼 거론할 필요가 없다. 문제는 그것들이 필연적으로 야기한 문제들, 즉 도시빈민의 주거권 박탈로 인한 극빈층으로의 전락, 대단위 아파트 단지를 중심으로 형성된 중산층 문화가 소비·사치의 양태로 나타나는 것을 방지하거나 대비할 대책을 마련해 놓지 못했던 부분이다. 더구나 대단위 아파트촌들이 한강을 양쪽에서 껴안은 채 길고도 두텁게 형성됨으로써 필연적으로 교통문제와 환경문제를 야기했다는 것이 중요하게 지적되는 부분이다.
무엇보다 심각한 것은 조만간 나타날 노후 아파트의 처리 문제일 것이다. 그것이 바로 ‘아파트공화국’의 미래를 어둡게 하는 결정적인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아파트공화국』의 결론 역시 그 점에 주목한다. 사실 그가 아니었더라도 이미 우리는 아파트공화국의 말로를 염려하고 있었다. 염려가 곧바로 대안이 되지는 않겠지만 말이다.
“한국의 아파트 단지는 머지않아 하나의 중요한 도시문제가 될 것이다. 건물 수명을 20~30년으로 볼 때, 1970년대 아파트 단지의 개축과 재건축 문제가 이미 서울에서 시작되었다. 15년이나 20년 후엔 1980년대 중반 이후 대건설 계획으로 탄생한 모든 아파트에 같은 문제가 제기될 것이다. (중략) 이 건물들의 관리와 보수, 재건축 등을 어떻게 해나갈 것인가? 도시의 관리자들은 이러한 도전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중략) 아파트 단지는 이미 도시의 유산에 속하는 문제이자 당장 오늘의 도시문제가 되었다. 결론적으로 말해 대단지 아파트는 서울을 오래 지속될 수 없는 하루살이 도시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발레리 줄레조가 아파트 단지의 형성 과정과 외형적 구조를 연구했다면, 강준만은 그 내부로 들어가 거기에 담긴 물질적·정서적 욕망에 천착했다. “만족은 욕망의 불행이며 욕망은 만족을 욕망하는 것이 아니라 욕망을 욕망한다”는 지그문트 바우만의 말은 강준만의 열쇳말 ‘강남’에 그대로 들어맞는다. 외형적·개량적 성장에 눈이 멀어 건설족과 담합하고, 더 큰 부자가 되고자 했던 일부 유한계층과 죽이 맞아 놀아난 결과가 바로 오늘날 한국사회의 ‘강남’이 갖는 상징성이라고 볼 수 있다. 그 강남을 바라보는 대중의 시선은 곱지 않다.
강남, 한국사회 욕망의 탈출구 혹은 하수구
강준만 역시 서울이라는 거대도시가 탄생하기까지의 과정을 샅샅이 훑어 나간다. 발레리 줄레조와 다른 점은 탐색의 종착지가 이미 정해져 있다는 것이다. 우선은 ‘강남’의 실체가 무엇인지부터 알아볼 필요가 있다. 책은 강남의 실체를 소름끼치도록 적나라하게 묘사한다.
(1)한국 고급아파트의 65.9%가 강남에 몰려 있고, (2)한국의 파워엘리트Power Elite 중 절반 이상이 강남지역에 집중 거주하고 있고, (3)강남의 개원의 수는 서울시내 총 개원의의 28%를 차지하며, 전국 성형외과 개원의의 절반가량이 강남에 밀집해 있고, (4)서울신용보증재단의 지원이 70% 이상 강남지역 기업에 집중되어 있고, (5)2002년 2월 서울교육청에서는 서울지역 고교 신입생 자녀들을 전학시키려는 1천여 명의 학부모들이 정문에서 줄을 서 사흘씩이나 밤을 새우는 사건이 벌어졌는데, 이 중 70%가 강남지역 전입을 희망했다는 것 등이다.
‘아파트’를 한국을 설명하는 코드의 핵심으로 본다는 점에서는 강준만 역시 발레리 줄레조와 입장을 같이한다. 또한 제시하는 근거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한국인들은 군사주의를 싫어하지만 한국을 세계적인 정보통신 강국으로 떠오르게 만든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가 아파트 대단지가 제공해주는 군사주의적 효율성임을 어찌 부인할 수 있으랴. ‘아파트공화국’이야말로 네트워크를 깔기에 가장 적합한 체제가 아닌가.”
그것이 또한 효율이면서 동시에 문제의 근원임을 잊지 않는다. 아파트 보급 확대에 따른 문제점은 크게 세 가지다. 첫째, 아파트의 대량 건설은 엄청난 개발 이익을 창출해 극도로 편향된 부의 배분을 가져왔으며, 그 와중에 아파트는 사용가치의 주거공간이라기보다는 자산 이득을 얻기 위한 투자로 간주되었고, 그에 따른 빈번한 주거이동은 공동체 의식을 크게 약화시켰다. 둘째, 단조로운 주거환경과 황폐화된 주변 경관은 아파트 주민들의 자연적 심미감을 박탈하고 일상생활을 매우 무미건조하게 만들었다. 셋째, 아파트는 획일적이고 상호고립 된 생활양식을 촉진시켜 배타성과 폐쇄성을 증대시켰으며, 이런 생활양식은 주변에 대한 무관심과 개인주의 그리고 이로 인한 소외감을 증폭시켰다.
강준만은 강남이 욕망의 탈출구였든 하수구였든 간에 그것은 이미 우리 사회의 갖가지 욕망을 아우르는 공간으로서의 상징성을 획득해냈다고 말한다. 덧붙여 욕망에 대한 다양한 담론들, 즉 프로이트와 라캉 등의 논의를 끌어내 자신의 주장을 정당화한다. 그렇게 해서 얻은 결론은 단순하다. 우리의 자화상을 부정하기보다 차라리 인정하면서 새로운 도시문화 창출의 가능성을 타진하자는 것이다.
한국형 자본주의의 욕망의 위계질서에 있어서 강남은 상층부를 점하고 있다. 한국형 자본주의는 강력한 서열화, 강한 경쟁심과 모방심(평등주의)에 의해 움직인다. 그것들은 부정적인 것을 널리 전파시키는 동시에 긍정적인 혁신의 전파 속도도 빠르게 한다. 이게 바로 ‘강남정신’이다.
『아파트공화국』과 『강남』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점은 오늘날 수도권을 뒤덮고 있는 대단위 아파트 단지의 형성 과정이 결코 합리적이거나 과학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결과 또한 성공적이지 못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신도시 개발, 즉 대단위 아파트 단지 건설에 매진하고 있다. 이러한 모순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아직도 대부분의 시민들이 일부 권력집단과 건설족들의 결탁을 맹목적으로 옹호하고, 거기에 빌붙어 약간의 경제적 이익만 실현하면 그만이라는 안이한 사고 속에 갇혀 있는 것은 아닌가.
개발의 그늘과 가난한 사람들
일찍이 문학은 개발독재의 폭력을 고발해왔고, 그에 대한 경고음을 내왔다. 1970년대 무분별한 개발논리의 뒤안길에서 도시빈민들이 어떤 고통과 좌절을 맛보아야 했는지를 실감나게 묘사하고 있는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하 『난쏘공』)은 개발의 그늘을 형상화한 대표적인 문학작품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강준만 역시 조세희의 『난쏘공』은 “70년대의 거대한 사회적 변동 가운데 가난한 사람들이 얼마나 고난에 찬 삶을 지속해야 했던가를 말하고, 그들의 이상과 존엄성이 어떻게 부당하게 훼손되어갔는가를 탁월하게 증언”했다고 말한다.
이어 1980년대, 서울올림픽이라는 대형 이벤트를 명분으로 무차별적으로 진행된 개발 열풍의 희생양이 되어야만 했던, 도시 외곽에 거주하는 서민들의 힘겨운 일상을 묘사한 박영한의 연작소설집 『왕룽일가』는 개발이익에 눈이 먼 젊은 세대와 ‘땅이 곧 진리’라는 순박한 애향심과 땅에 대한 집착을 가진 장년세대 간의 갈등을 그리는 한편, 개발 바람을 타고 도시 변두리 사람들의 정서가 어떻게 변모해가는 지를 유머러스하면서도 잔잔하게 그려내고 있다.
한편 1990년대 욕망의 탈출구로 묘사되며 새로운 도시문화의 메카로 떠오른 강남 압구정동이 이순원의 절망적 시선에 의해 그려진 『압구정동엔 비상구가 없다』는 시대의 문화를 바라보는 창으로서의 문학의 구실을 제대로 해냈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소설 속에는 좌절과 분노, 비판과 부정만이 들어 있는 게 아니다. 그 속에는 우리의 전통적인 정서와 새롭게 형성되고 있는 도시문화의 유형들이 담겨 있기도 하다.
문학은 사회에 대한 발언이기 이전에 인간 본성의 울림이기에 그러한 정서와 문화의 포착은 자연스런 현상일 수 있겠다. 문학과 문화비평을 통해 새로운 도시문화의 대안을 마련하고자 하는 것은 그래서 타당한 방향설정일 테다. 특히 일상의 정치성에 주목하는 문화비평을 접하는 것은 의미가 새롭다.
거버넌스, 새로운 도시문화 형성의 바로미터
“주민이 참여하는 도시 만들기를 위해 전문가와 시민이 함께 의식적 노력과 감시를 일상화할 때 성장 위주의 개발 행위에 대한 제어와 통제가 가능해진다. 자본의 투여와 그에 따른 이윤의 확보라는 개발의 논리는 명료하다. 그 동인과 수혜 역시 뚜렷하여 개발자와 그에 부응하는 행정 권력의 추진력은 반대 성명서 몇 장으로는 결코 막을 수 없다.
우리가 사는 환경을 살 만한 곳이 되게 하는 일은 우리 모두의 일이다. ‘동계洞契’가 없다면 시민들의 자발적 모임이라도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시민의 광범위한 참여가 우리의 자연과 도시환경을 지키는 힘이다. 참여가 일상화될 때 이 땅은 살고 싶은 곳이 된다.”(양상현, 『거꾸로 읽는 도시, 뒤집어 보는 건축』중에서.)
서양어에서 ‘정치’가 장소를 가리키는 말인 ‘폴리스polis’에서 나온 데서 알 수 있듯이 정치는 공간의 문제로 인식되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지역 문제에 대한 주민 참여는 정치이면서 동시에 지역문화를 창출하기 위한 중요한 문화 활동이기도 하다. 윗글은 건축가 양상현의 문화비평서 『거꾸로 읽는 도시, 뒤집어 보는 건축』(동녘, 2005)의 결론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그러나 주민 참여는 어느 순간 저절로 이루어지는 게 아니다. 참여의 공간을 확보하기 위한 노력들이 선행되어야 한다. 김찬호의 『도시는 미디어다』(책세상, 2002)는 새로운 도시문화 창출의 가능성과 전망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시사 하는 바가 크다. 그의 ‘커뮤니티 디자인’의 개념은 공동체 문화의 새로운 구현을 위해서 반드시 이해하고 수용해야 할 중요한 개념이자 실천과제인 셈이다.
“개인들이 추구하는 합리성, 이익, 질서, 편리함, 아름다움 등이 사회적·생태적 차원에서 집적되면서 비합리성, 불이익, 무질서, 불편함, 추함으로 나타나는 것은 이미 임계치를 넘었다. 거꾸로 산업화 과정에서 성취한 풍요로움과 윤택함을 위협하고 있는 상황에서, 그것들을 종합적인 관점에서 파악하고 전체를 아우르면서 조정하는 원리를 다시금 세우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바로 여기서 토털 디자인의 과제가 제기되는데, (중략) 토털 디자인은 ‘컨셉concept’에 초점을 맞추던 단계를 넘어 이제는 그것이 놓여 있는 ‘컨텍스트context’를 설정하고 이해하는 데서 출발한다.
(중략) 커뮤니티 디자인은 디자인의 패러다임 전환 과정에서 떠오른 중대한 과제다. 커뮤니티는 삶을 빚어내면서 그것을 담아내는 그릇이다. 거기에는 사람의 몸과 자연환경 사이의 순환적 공생관계가 깃들어 있고, 도구 및 시설, 경제 및 사회제도 그리고 지역문화가 그 관계를 매개한다.” (김찬호, 『도시는 미디어다』에서.)
커뮤니티 디자인은 근대화와 도시화 과정에서 시간과 공간과 자아 사이의 유기적인 연결고리가 끊어져버린 지역 공간 속에 다시금 ‘역사성’과 ‘장소성’을 심는 작업이다. 지역사회를 조화로운 생명의 질서와 문화의 향기가 담긴 건실한 공공영역으로 만들어가는 것이 커뮤니티 디자인이다. 그것은 곧 지역의 구심력과 문화적 이미지를 어떻게 형성할 것인가의 과제로 이어진다.
문화가 경제의 성패를 좌우하는 지식 정보사회에서 지역은 그 인프라를 구축해야 하는 구체적인 장으로 여겨진다. 지역사회 구성원들의 참여와 상호작용 속에서 생성되는 특유의 지역문화는 기존의 표준화된 국민문화를 대체함과 동시에 다양한 지구촌 문화를 더욱 풍부하게 구성하는 활력소가 될 것이다. 이렇듯 지역적 특수성과 세계적 보편성을 함께 담보하면서 경제와 생활을 윤택하게 가꾸는 지역문화의 건설, 커뮤니티 디자인의 소임은 바로 그것이다.
한편 심광현은 『흥한민국』(현실문화연구, 2005)을 통해 다른 방식으로 도시문화의 가능성을 얘기한다. 우리 전통문화 속에 숨겨져 있는 문화의 기운들을 새롭게 발견해야 한다는 것이다. 심광현이 말하는 우리 문화의 저력은 프랙탈 미학으로 설명된다.
심광현은 “우리 문화의 저력이 2000년대 들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다”고 전제한 뒤, 그 증거로 월드컵 4강 진출과 붉은 악마, 광장문화, 네티즌들의 촛불시위, 한류 열풍, 휴대전화, 인터넷 강국 등을 든다. 그런 것들은 모두 새로운 것이 아니라 전통문화의 저력이며, 그 전통 속에 내재되어 있던 ‘프랙탈’한 힘이 발현되었다는 것이 바로 그의 주장이다.
‘마당’ 속에 담긴 소통의 의미
지금까지 ‘신도시와 신도시 문화’의 전망을 타진하기 위해 다양한 텍스트들을 소략해봤다. 이쯤에서 정리하자면, 아파트를 중심으로 한 신도시는 도시문화를 피폐하게 만든 주범이며, 앞으로도 걸림돌로 작용할 것이라는 점이 드러난다. 그러나 이대로 손을 놓을 수 있을까. 그럴 수 없는 이유는 현실 속의 신도시들이 곧 우리들의 삶터이기 때문이다. 우리들의 삶터를 우리 손으로 가꾸고 다듬을 수 없다면 그 삶은 이미 의미를 상실한 것이 아닌가.
텍스트들의 결론은 대동소이하며, 크게 두 가지 방향으로 흐름을 잡고 있다. 우리의 전통 속에 담긴 문화의 힘을 현실로 끌어내야 한다는 것과 도시문화 창출을 위한 새로운 기획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가령 김찬호가 제기한 ‘커뮤니티 디자인’의 개념이 도입될 필요가 있다는 점은 그 적절한 예가 될 터이다. 둘 다 가치 있는 의견이며 함께 수용해야 할 것이다. 요는 방법이다. 도시문화를 새롭게 창출하기 위한 방법은 무엇인가. 그 시작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원활한 ‘소통’에 있는 것이 아닐까.
소통의 공간은 ‘마당’이다. 신도시 주민 모두가 마음을 열고 마당으로 나와 함께 논의하고 함께 도시문화를 만드는 일에 참여해야 한다. 건축가 김진애는 옛 가옥과 아파트의 차이를 마당에서 찾는다. 마당은 소통의 공간이며 삶의 이야기가 생성되는 공간이라는 것이다. 현실에선 사라졌지만, TV 드라마에서 유독 마당이 있는 한옥이 자주 등장하는 이유가 바로 마당이야말로 다양한 이야깃거리를 생산하는 소통의 장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너른 마당이란 대문이 열려 있는 마당입니다.
대문이 열려 있으면 마당과 골목이 연결됩니다.
그만큼 넓어집니다. 그러나 열린 마당은
공간의 의미를 넘어서 소통과 만남의 장場이 됩니다.
사람의 경우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신영복, 『처음처럼』에 게재된 ‘너른 마당’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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