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을 하지 않는 사람들도 블리자드사의 액션 RPG 게임인 ‘디아블로’의 이름은 한 번쯤 들어보았을 것이다. 엄청난 인기를 거둔 전작(디아블로 2)과 ‘국민 게임’이라고 불렸던 스타크래프트의 명성에 힘입은 블리자드의 차기작은 제작발표 때부터 엄청난 기대감을 몰고 왔다. 게임 발매 당시 디아블로3은 각종 포털사이트 검색어 순위 1위를 석권했고, 발매 첫날 약 350만 장을 팔아치워 신기록을 달성했다.
그러나 명성에 힘입은 인기는 오래가지 못했다. 게임 컨텐츠와 관련된 각종의 문제들이 불거지기 시작했다.
MMORPG을 관통하는 신분, 아이템
디아블로 게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아이템”이다. 좋은 아이템이 있어야지만 더 강한 몬스터들과 싸울 수 있고, 더 강한 몬스터들과 싸우는 것으로 좋은 아이템을 얻을 수 있다. 게임 내 캐릭터는 이런 방식으로 성장한다. 아이템은 더 높은 난도의 게임을 즐길 수 있는 ‘신분’이자 동시에 더 좋은 아이템을 얻을 수 있는 자산인 셈이다.
디아블로 게임 내 스토리는 하루에서 이틀 정도 투자하면 다 즐길 수 있다. 즉 이 게임은 반드시 ‘마지막 보스’를 잡는데 그 목표가 있는 것이 아니다. 디아블로의 목표는 ‘더 강한 캐릭터’를 만드는 것이고 ‘더 좋은 아이템’을 얻는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정상적인 플레이’로는 게임 목표를 달성하는 것이 불가능해졌다.
새로운 수익모델에 몰두한 블리자드
디아블로는 패키지 게임이다. 게임을 한번 구입하면 추가로 돈을 지급할 필요는 없다. 매달 일정금액을 내고 플레이를 할 수 있는 온라인게임에 비해 수익의 지속성이 떨어진다. 그래서 블리자드사는 디아블로3을 개발하면서 새로운 수익모델을 연구했다. 게임 내에서 아이템의 현금 거래를 가능하게 만들고 여기서 발생하는 수수료를 챙기는 방식이다. 따라서 경매장의 활성화는 이 수익모델에 가장 중요한 요소였다. 초창기 디아블로 디렉터인 ‘제이 윌슨’은 이 수익모델에 몰두했다.
디아블로3에서 플레이로 얻을 수 있는 아이템은 다양하다. 그리고 자신이 획득한 아이템이 자신에게 반드시 필요한 아이템일 확률은 낮다. 따라서 다른 플레이어와의 거래는 필수 불가결이고 이 거래는 게임 내 ‘경매장’에서 이루어진다. 플레이어들은 열심히 몬스터를 사냥하고 아이템을 획득한다. 그리고 아이템을 경매장에 내다 팔아서 게임 내 화폐인 골드를 모은다. 그리고 모은 골드로 자신에게 적합한 아이템을 구매한다. 만약 이 지루한 과정이 싫다면 게임 내 화폐인 ‘골드’ 대신에 현금으로 ‘배틀 코인’을 구입하면 된다. 이 현금거래에서 발생하는 수수료는 블리자드의 몫이다.
게임 ‘디아블로’의 불평등의 결과
실험적인 블리자드의 시도는 몇 가지의 변수에 부딪혔다. 우선 기본적으로 사람들은 현질(=현금으로 게임머니를 구입하는 행위)에 심리적인 저항이 있었다. 이미 돈을 주고 게임 패키지를 구입했는데 여기에 추가로 돈을 지불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심리적인 저항이 없었다고 하더라도 배틀코인이라는 새로운 유료모델은 게이머들의 관성을 이겨내지 못했다.
여전히 ‘아이템베이’ 등 게임아이템 중개사이트는 인기를 끌었고 적극적으로 현금거래를 하는 유저들은 이 중개사이트를 이용했다. 거기에 경매장에서 발생하는 ‘버그’를 악용하는 유저들의 존재도 한몫 했다. 다만 한국은 국내법의 제한으로 인해 현금경매장 자체가 도입되지 않았고 애초에 중개 사이트를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블리자드는 올해 2월쯤 게임에 대대적인 변화를 줬고 개인 간 거래를 할 수 없게 만들었다. 그리고 얼마 후 경매장을 폐쇄했다. ‘왜 블리자드가 경매장을 포기했는지’ 에 대한 명확한 해답은 없다. 다만 추측이 가능한 것은 블리자드가 현금 경매장으로 얻을 수 있는 수익보다 추가 컨텐츠인 ‘확장팩’을 판매해서 얻을 수 있는 수익이 더 크다고 판단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화가 난 유저의 마음을 돌릴 필요가 있었다는 것이다.
‘폐지 줍기’에 내몰린 유저들
경매장을 이용해 아이템을 획득하는 디아블로에서 ‘얼마나 많은 골드를 확보해 적절한 아이템을 구입할 수 있는가’의 여부는 게임 대부분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였다. 그러나 게임 내 골드의 흐름은 개발자의 의도처럼 흘러가지 않았다. 게임을 현실의 직업으로 삼는 소위 ‘작업장’이 등장했다. 수십 대의 컴퓨터와 자동화 프로그램을 이용해 골드를 쓸어담는 작업장은 게임 내 화폐의 가치를 떨어트리고 경매장의 인플레이션을 견인했다.
거기에 게임 플레이를 전혀 하지 않고 온종일 경매장만 클릭하며 ‘값싸게 나온 아이템’을 비싸게 되파는 투기꾼들이 등장했다. 일반 유저들이 간혹 좋은 아이템을 얻었다고 해도 정확한 시세를 모르고 투기꾼들에게 넘기고, 투기꾼들은 이 시세차익을 통해 골드를 확보하고 이를 다시 아이템 중개 사이트에 되팔아 현금화한 것이다.
어느 순간부터 경매장을 이용해 아이템을 구입할 수 있는 유저는 초창기부터 플레이해서 막대한 골드를 확보한 유저나, 현금으로 골드를 구입하는 유저 뿐이었다. 정상적인 플레이로 획득한 골드로는 게임 아이템을 구입할 수 없었다. 질 낮은 아이템으로 사냥할 수 있는 던전에서는 좋은 아이템이 나오지 않았다. 게임 내 신분상승이 불가능해진 것이다.
게임 내 골드가 작업장과 소수 유저에 독점된 사이, 일반 유저들은 폐지 줍기에 내몰렸다. 폐지 줍기란 사냥을 하지 않고 항아리 등을 깨서 골드만 수집하러 다니는 행위를 자조적으로 일컫는 말이었다. 그들은 점차 게임을 할 흥미와 이유를 잃고 있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블리자드는 결정적인 실수를 하고 만다.
게임 내 인플레이션이 심하다는 이유로 게임 이용에 필수적인 수리비 등을 대폭으로 인상한 것이다. 유저들은 이제 신분 상승은커녕 게임 내 생계까지 위협을 받게 되었다. 유저들은 하나둘씩 ‘접속 종료’ 버튼을 눌렀다. 정상적인 플레이가 힘든 게임을 계속 하고 있을 이유는 없었다.
유저들을 복귀시킨 ‘기초생활 보장제도’
경매장을 고안했던 제이 윌슨은 결국 물러났다. 그리고 후임자로 조시 모스키에라가 등장했다. 모스키에라는 ‘대격변’이라고 불릴 만큼 대대적인 패치를 강행한다. 이 패치로 게임 내 시장경제의 요소는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이제는 경매장을 통한 게임 아이템의 거래는 불가능했으며 플레이어들 간의 골드 거래도 불가능하게 되었다.
대신 게임 아이템을 쉽게 구할 수 있었다. 그리고 아이템은 각 캐릭터의 용도에 맞게 제공됐다. ‘지능이 필요한 마법사’에게 ‘힘을 늘려주는 칼’이 떨어지는 일은 사라졌다. 이를 두고 웹툰 작가 ‘무적핑크’는 ‘기초생활보장제도’라고 칭하기도 했다.
게임 플레이의 주목적이었던 ‘더 좋은 아이템’은 이제 경매장을 통하지 않고 사냥으로 구할 수 있었다. 시간을 투자한 만큼 캐릭터는 강해질 수 있었다. ‘경매장 게임’이라는 오명을 벗고 진짜 액션 RPG 게임으로 돌아온 순간이었다. 물론 이 패치로 인해 작업장은 사라졌다. ‘시세 차익’을 노리던 투기꾼도 사라졌다. 그러나 전체 유저는 증가하기 시작했다. 피시방 게임 점유율에서 갑자기 10계단이나 뛰어올랐다. 패치 직후 판매된 확장팩의 성과도 이 변화의 성공을 뒷받침한다.
또다른 현실로서의 게임이 주는 교훈
유저들이 게임을 포기하고 떠난 이유는 크게 두 가지였다. ‘현질’을 하지 않고서는 더 강한 캐릭터를 만들 수 없었고 ‘정상적인 플레이’로는 수리비조차 대기 힘들었다. 만연한 불평등으로 사실상 계층 이동이 단절되었으며 실질소득의 감소로 인해 보통의 임금으로는 생계에 늘 허덕여야 하는 오늘날의 현실과 크게 다르지 않다. 결국 MMORPG의 가상공간 역시 또다른 사회인 것이다.
쉽게 그만두고 뛰쳐나올 수 있는 게임 사회와 달리 현실은 녹록지 않다. 모든 것을 감내하고 힘들게 살아가든지 아니면 극단적으로 되돌아올 수 없는 ‘종료’ 버튼을 눌러야 한다. OECD 자살률 10년째 부동의 1위를 고수하고 있는 한국사회는 대대적인 패치가 필요하다. 우리가 힌트를 얻어야 할 것은 ‘수렵 채집’ 시절까지 회귀했던 디아블로의 새로운 모델이 아니다. 모두가 즐겁게 플레이할 수 있는 환경을 구축한 블리자드의 시도 그 자체다.
※ 이 기사는 사민저널에 공동으로 기재되었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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