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6월 28일, 새벽 한강대교 폭파
1950년 6월 28일 새벽 2시 28분, 국군은 한강대교(인도교)를 폭파하였다. 사흘 전인 6월 25일 새벽 4시에 시작된 한국전쟁 70시간 30여 분 만이었다. 폭파 장면을 목격한 미 군사고문단은 50여 대의 차량이 파괴되고, 500~800명의 인명이 희생됐을 것으로 추정했다.
수도 서울을 빠져나가는 유일한 통로인 이 다리가 끊어지면서 무고한 인명의 희생에 이어 서울시민 100만 명의 발이 묶였다. 병력과 물자 수송이 막히면서 북한군을 저지하고 있다가 한강 이남으로 후퇴하지 못한 국군 6개 사단이 치명적 타격을 입었고 중화기와 차량 등 다량의 군수품을 적에게 내줘야 했다.
전쟁 발발 뒤 정부의 공식 발표는 6차례에 걸쳐 있었다. 6월 25일 정오에 국방부 담화문이, 6월 26일 새벽 6시에 무초(John Muccio) 미국대사의 입장 발표가, 같은 날 아침 8시에 신성모 국방부 장관의 생방송이 나간 것이다. 이어서 이승만 대통령의 담화가 6월 27일 밤 10시부터 11시까지 라디오로 3번 반복 방송되었다.
서울시민 여러분, 안심하고 서울을 지키시오. 적은 패주하고 있습니다. 정부는 여러분과 함께 서울에 머물 것입니다.
그러나 대통령은 방송 전인 27일 새벽 4시에 이미 서울을 떠나 공식적인 ‘피난민 제1호’였다. 25일 밤 9시에 신성모 국방부 장관과 함께 이승만을 만난 무초 대사는 수도 서울에 최대한 대통령이 머물러야 함을 주장했으나 그는 전선에서 멀어지는 ‘안전’을 선택했다. 그는 이날 새벽에 각료나 국회의장, 대법원장 등에도 알리지 않은 채 경무대를 빠져나와 서울역에서 특별열차를 타고 남쪽으로 달아났다. 대구에 도착했으나 ‘지나치게 멀리 왔다’는 지적에 따라 열차를 돌려 대전에서 내렸다.
공식 ‘피난민 1호’는 대통령, 녹음방송으로 시민 기만
특별담화는 충남지사 관사에 여장을 푼 이승만이 녹음해 이를 방송으로 송출한 것이었다. 이 방송을 듣고 피난길에 나서려던 서울시민들은 짐을 풀고 도로 주저앉았다. 그리고 이들은 서울이 수복되던 9월 28일까지 석 달 동안 꼼짝없이 적 치하를 견뎌야 했고, 부역자라는 의혹을 받으며 검증을 통과해야 했다. (서울에 잔류한 서울시민 105만 명 가운데 56만여 명이 부역자 혐의를 받고 검거되었다) 서울을 버리고 달아난 대통령에게 기만당한 시민들이 짐을 풀고 주저앉고 있던 27일 오후 2시에 국방부 장관 신성모가 한강을 건넜다.
군 지휘라인에 있던 인물들이 끗발 순서대로 한강을 넘은 후 한강 다리가 끊겼다.
- 임기상
국군통수권자인 대통령과 주무 각료인 국방부 장관이 100만이 넘는 서울시민을 버려두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달아난 것이다.
6월 28일 새벽 1시께에 북한군의 공세에 국군의 미아리-홍릉 저지선이 무너지고 북한군 전차가 미아리 고개를 넘기 시작했다. 이 무렵 육군참모총장 채병덕 소장은 “적 전차가 시내에 들어왔다”는 잘못된 보고를 받는다. 그는 공병감 최창식 대령에게 한강대교를 폭파하라는 지시를 내린 후 서둘러 새벽 2시에 한강을 건넜다.
6월 26일에 이미 육군본부 회의에서 한강대교 폭파가 결정되었다. 공병들은 대략 2800~3600파운드의 폭발물을 교량에 설치하고 폭파 명령을 기다리고 있던 참이었다. 육참총장이 한강을 넘은 지 28분 후, 다리에 설치된 폭발물이 터졌다.
그러나 폭약은 2개 다리에서 폭발하지 않았다. 한강 인도교와 경인 철교 하행선, 경부 복선 철교 상행선은 완전히 끊겼지만, 경인 철교 상행선과 그 옆에 있던 경부 복선 철교 하행선은 온전하게 남은 것은 이 때문이었다. 북한군은 사흘 후 이 다리로 한강을 넘었다.
북한군의 남진을 저지하기 위해 한강대교를 폭파하겠다는 계획 자체가 잘못된 판단은 아니었다. 그러나 예고 없이 막대한 인명 피해를 감수하고 폭파할 만큼 상황이 긴박하지는 않았다. 몇 시간이라도 다리 폭파를 늦추었다면 한강 이북의 국군 전력(중화기, 중장비)을 한강 이남으로 체계적으로 후퇴시켜 방어선을 짤 수 있었을 것이었다.
김홍일 장군이 6월 29일에 간신히 한강 이남에 한강 방어선을 형성하여 7월 3일까지 북한군을 한강 일대에서 저지할 수 있었던 것은 서울을 점령한 북한군이 사흘 동안 머문 덕분이었다. 나룻배로 강을 건넌 철수 병력을 모아 편성한 방어선으로 그 정도를 막을 수 있었던 것도 불행 중 다행이었다.
그러나 북한군 탱크가 한강대교에 도착한 것은 그로부터 7시간 30분 뒤였다. 즉 한강대교가 폭파되는 시점에 북한군은 여전히 서울 북쪽 외곽에 있었다. 이 한강교 폭파는 그나마 유지되던 한국군의 한강 이북 지휘 체계를 완전히 무너뜨렸다고 한다.
폭파 직후인 7월 초, 주한 미 군사고문단의 조사 결과, 전쟁 발발 당시 9만 8천 명이었던 국군이 5만 4천 명으로 줄었다고 하는데 이게 믿어지는가. 전쟁이 터지고 1주일 사이에 4만 4천 명에 달하는 병사를 잃었다는 얘기다.
또 미 극동사령부의 전방지휘소 처치 준장은 6월 29일 전선을 시찰하러 수원에 온 맥아더 장군에게 한국군 병력이 2만 5천 명에 불과하다고 보고했다. 전쟁이 시작된 지 나흘 만에 군 병력이 1/4로 줄었다는 것인데 이 역시 믿어지는가.
일부 부정확한 사실이 있다 하더라도 한강 다리 폭파와 지휘 체계 붕괴로 군 병력을 엄청나게 잃었다는 사실 자체는 변하지 않는다. 국군통수권자인 대통령이 서둘러 피난을 떠나면서 ‘수도 서울을 사수하겠다’고 국민을 기만한 정부가 상황에 떠밀려 수행한 전쟁의 전개는 지리멸렬일 수밖에 없었다.
대통령 이승만은 한강교 폭파로 여론이 들끓자 폭파 실무 책임자인 공병감 최창식 대령에게 모든 책임을 뒤집어씌웠다. 당시의 지휘 체계로 보아 폭파 책임은 대통령 이승만-국방부 장관 신성모-국방부 차관 장경근-참모총장 채병덕-참모부장 김백일에게 귀속되어야 했지만, 말단 실무 책임자에게 넘겨진 것이었다.
폭파 명령을 내렸던 육군참모총장 채병덕은 개전 한 달 뒤인 7월 27일 경남 하동에서 전사했고, 최창식은 1950년 9월 부산에서 열린 군법회의에서 총살형을 선고받고 처형당했다. 그를 죽음에 이르게 한 죄명은 ‘적전비행죄’.
군인으로서 명령에 따른 죄밖에 없는 영관급 장교에게 물은 이 무책임한 문책은 14년 후에 바로잡힌다. 1964년 11월, 최창식의 부인이 신청한 재심에서 법원이 고인의 무죄를 확정하면서 최창식은 사후 복권된 것이다.
전쟁 중에도 계속된 이승만의 패착
한강 다리를 끊고 도주한 대통령 이승만은 7월 14일 UN군 사령관 맥아더에게 편지를 써 ‘대신 군을 지휘해’ 달라고 요청하는 서한을 보냈다. 외교적 수사로 점철되어 있지만, 이 편지의 내용은 매우 굴욕적이었다.
그것은 전 주한 미군 사령관(1973~1976) 리처드 스틸웰(Richard Stilwell)의 말처럼 “지구상에서 가장 놀라운 형태로 주권을 양보한 사례(the most remarkable concession of sovereignty in the entire world)”였다.
수도와 시민을 버리고 떠났던 무능하고 비겁한 지도자 이승만의 패착은 전쟁 중에도 계속되었다. 고위 장교들의 부정과 착복으로 9만~12만에 이르는 국민방위군이 희생된 ‘국민방위군 사건’(1951)에 이어 거창과 산청·함양 등 각지에서 민간인 학살(1951)이 자행된 것이다.
- 관련 글 「거창 양민 학살 / 산청 함양 양민 학살」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일은 소홀히 하면서도 이승만은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는 데에 집착하고 있었다. 재선을 확실히 하고 독재정권의 기반을 굳히기 위해 전쟁 중 임시 수도인 부산에서 폭력을 동원하여 국회의원을 연행·구속한 ‘부산 정치파동’(1952)도 그중 하나였다.
그런 초대 대통령 이승만에 대한 오늘날 수구·보수 세력들의 구애는 눈물겹게 이어지고 있다. 4·19로 파괴된 동상이 새로 세워지는 등 이른바 ‘국부’로 ‘건국의 아버지’로 그는 다시 태어나고 있다. 장기 독재로 민주주의를 파괴한 역사적 과오를 지우고 미화하려는 이들의 역사 왜곡은 이른바 ‘건국절’ 파동 등으로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 관련 글 「“이승만 정부는 ‘독립운동가’가 중심이었다”고?」
원문: 이 풍진 세상에
참고
- 임기상, ‘한강 다리 폭파’…1950년 6월 28일의 비극, <경향신문>(2014.6.23.)
- 김종성, 6·25 때 한강 다리 폭파한 대령, 왜 무죄 선고받았나, <오마이뉴스>(2017.9.21.)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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