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2년 10월 17일, 대통령 박정희는 위헌적 계엄과 국회해산 및 헌법 정지 등을 골자로 하는 대통령 특별선언을 발표했다. 삼선개헌에 이어 국회 해산과 헌법 일부 조항의 정지, 헌법개정안과 국민투표 계획 등을 내용으로 하는 4가지 비상조치를 통해 그는 민주 헌정을 파괴하고 영구집권을 위한 수순에 돌입한 것이었다.
10월 유신, 박정희의 영구집권 쿠데타
박정희의 특별선언은 10월 17일 발표 당시에는 특별선언, 특별조치, 비상선언, 비상조치, 유신적 조치 등으로 불리다가 10월 27일에 ‘10월 유신’이라는 명칭으로 통일되었다. 이는 일본의 메이지 유신을 원용한 것이었다.
특별선언 발표 뒤, 박정희는 국회를 해산하고 정당 및 정치활동의 중지 등 헌법의 일부 기능을 정지시키고, 전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였다. 계엄사령부가 설치되었고, 계엄사령부는 포고를 통하여 정치활동 목적의 옥내외 집회 및 시위를 일절 금지하고 언론, 출판, 보도 및 방송은 사전 검열을 받도록 하며, 대학에 휴교령을 내렸다.
열흘 후에 공고된 ‘조국의 평화 통일을 지향하는 헌법개정안’은 행정·입법·사법의 삼권을 장악한 대통령이 종신 집권할 수 있도록 설계된 1인 영도적(절대적) 대통령제였다. 대통령은 국회의원의 3분의 1과 모든 법관을 임명하고, 긴급조치권과 국회 해산권을 가지며, 임기 6년에 횟수의 제한 없이 연임할 수 있었다. 이러한 절대적 권력을 선출하는 방식도 국민의 직접 선거에서 관제기구나 다름없는 통일주체국민회의의 간선제로 바뀌었다.
한태연, 갈봉근 등의 학자들과 김기춘과 같은 젊은 검사들이 만든 헌법개정안(이른바 유신헌법안)은 국회의 권한을 대행하게 한 비상 국무회의에서 의결·공고되었고, 국민투표(11월 21일)에 부쳐져 투표율 91.9%, 찬성 91.5%로 확정되어 공포(12월 27일)되었다. 국민 기본권은 물론, 민주주의의 근간인 삼권분립조차 무력화하는 전무후무한 악법 유신헌법은 그렇게 태어났다.
유신 헌법안이 국민투표로 통과된 뒤, 박정희 정권은 대학에 대한 휴교 조치와 비상계엄을 해제했다. 이후 정해진 수순에 따라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선거(12월 15일)로 2,359명의 대의원이 선출되었다. 이어진 대통령 선거(12월 23일)에서 단독 입후보한 박정희는 찬성 2,357표, 무효 2표로 임기 6년의 제8대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이후 1979년 10월 26일 절대권력 박정희가 궁정동 안가에서 피살될 때까지 대한민국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와 온 국민들의 삶을 규정하고 강제했던 ‘유신체제’는 7년여 동안 지속되었다. 독재권력은 유신체제를 ‘한국적 민주주의’라 선전하였지만, 그것을 지지하는 국민은 극소수에 지나지 않았다.
유신 시기 내내 체제에 반대하는 국민의 반발과 저항은 끊이지 않고 지속되었다. 학생들은 말할 것도 없고, 언론과 시민사회단체, 정치인, 종교인 등이 조직과 연대를 무기로 이 전대미문의 독재에 저항하였던 것이다.
학생들은 전국민주청년학생연합(약칭 ‘민청학련’)으로, 언론인들은 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로, 야당 정치인과 종교인들은 ‘민주회복국민회의’를 결성하여 유신 독재에 항거하였고 연대투쟁을 벌였다. 체제에 대한 저항이 끊이지 않으면서 체제를 관리하기 위한 폭압도 강도를 더해갔음을 말할 것도 없다.
박정희의 최대 정적이었던 김대중 납치사건이 일어나 국내외에 파문이 일었고, 개헌청원운동을 벌이던 장준하가 의문을 죽임을 당하기도 했다. 1974년부터 발동한 긴급조치로 숱한 교수, 학생, 문인 등이 투옥되거나 해직되었다. 유신체제의 출범 후 북한이 남북대화의 중단을 선언함으로써 남북관계도 막혔다.
1975년 4월, 베트남이 공산화되자 박정희는 이를 빌미로 각 대학에 ‘학도 호국단’을 조직하고 ‘민방위대’를 창설하는 등 군사 통치를 한층 강화하였다. 유신반대 운동이 고조되던 1974년 8월 15일, 광복절 행사에서 박정희 저격 사건이 일어나 박정희는 아내 육영수를 잃어야 했다.
1978년 12월, 박정희는 통일주체국민회의를 통해 연임에 성공하였으나, 이에 앞서 실시된 제10대 총선에서 여당은 득표율에서 야당에 뒤지는 정치적 위기를 맞았다. 또한 공화당 안에서도 장기 독재에 대한 부담과 염증으로 이탈하는 인사들이 이어졌다.
국제 정세도 박정희에게 이롭지 않았다. 미국에서는 ‘인권’과 ‘민주주의’를 강조하는 카터의 민주당 정권이 들어서면서 박정희 정권의 인권 탄압을 강도 높게 비판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또 이 무렵에 불어 닥친 제2차 오일쇼크로 인해 중공업 중심의 국내 경제가 극심한 타격을 입으면서 유신정권의 권력은 심각한 위협에 직면하게 되었다.
절대권력, 7년을 넘기지 못하다
박정희 정권의 몰락에 결정적 타격을 가한 것은 박정희의 정치적 기반이던 영남지방, 부산과 마산에서 봉기한 시민들이었다. 야당인 신민당 당수로 선출된 김영삼이 YH사건에 개입하는 등 적극적인 민주화 투쟁을 전개하자, 정권은 공화당과 유정회 의원을 동원하여 1979년 10월에 국회에서 날치기로 김영삼을 제명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것은 박정희 최악의 한 수였다.
이 사건으로 국내외 여론이 악화되면서 마침내 대규모 저항운동이 부산·마산을 중심으로 전국적으로 확산되었기 때문이다. 부마 민주항쟁으로 불리는 이 저항에 대한 처리를 두고 박정희의 최측근이던 중앙정보부부장 김재규와 경호실장 차지철이 맞서다 이른바 ‘10·26 박정희 시해 사건’으로 비화한 것이다.
김재규와 그를 따르는 부하들의 총에 맞아 박정희는 현장에서 숨졌다. 한 개인의 불행한 죽음에도 불구하고 ‘유신의 심장’을 쏜 김재규의 총탄이 유신체제를 종말을 앞당긴 것이었다. 그러나 서울의 봄을 기대한 국민들은 박정희 총애를 받아온 정치군인들이 준비한 쿠데타를 무력하게 지켜보아야만 했다.
부마 민주항쟁, 부산지역에 계엄령 선포(1979.10.18.)
박정희의 유신정권은 1979년 10월 18일 0시를 기해 부산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계엄군을 투입해 1,058명을 연행하고 66명을 군사재판에 회부했다. 이틀 전 부산과 마산(현 창원시)에서 일어난 시민들의 대규모 저항에 놀란 박 정권은 군대를 투입하는 강수를 쓴 것이다.
부산대학교 학생들이 ‘유신철폐’를 외치며 민주화 시위를 시작한 것은 10월 16일이었다. 부산대 학생 5천여 명은 ‘유신정권 물러가라’, ‘정치탄압 중단하라’는 등의 구호를 외치며 교내에서 시위를 벌였고 저녁에는 시내로 진출하였다. 부마 민주항쟁이 불을 지핀 것이었다.
항쟁, 유신체제 붕괴의 서막을 열다
다음날인 10월 17일 저녁에는 시민들이 합세하면서 시위는 계속 확산되었다. 시위대는 충무파출소와 한국방송공사(KBS), 서구청과 부산세무서 등을 파괴하고 경찰 차량을 불태우거나 부수었다. 시위는 이웃 마산지역으로 확산되었다.
19일에는 마산대와 경남대의 학생들의 시위가 벌어졌고, 민주공화당사와 파출소, 방송국 등이 타격을 입었다. 20일에는 노동자와 고등학생까지 시위에 합류했다. 정권은 마산에 위수령(군 병력의 주둔이 필요하다고 인정되는 지역에 군부대가 주둔하면서 치안과 수비, 공공질서를 유지하는 것)을 선포하였다.
항쟁의 양상은 결렬했고 시위는 시민들의 엄호와 지원을 받았다. 연행된 이들은 학생보다 일반 시민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시민들의 저항은 체제에 대한 반대와 조세 저항, 정부에 대한 불신 등에서 비롯한 것이었다. 경찰서 10여 개가 공격을 받았고, 10여 대의 경찰차가 불에 탔다.
부마 민주항쟁은 1년 전에 실시된 불법적 금권, 관권선거, 민주화 운동 탄압에 대한 불만과 YH 투쟁과 이에 개입한 신민당 대표 김영삼에 대한 국회의원 제명 조치 등을 배경으로 하고 있었다. 여당의 날치기로 지역 출신의 야당 지도자 김영삼이 제명되자 야당 의원 전원이 의원직을 사퇴한 것도 일정한 영향을 끼쳤다.
부마 민주항쟁은 비록 닷새 동안의 투쟁으로 막을 내렸지만 정권 내 갈등을 유발하면서 유신체제의 종말을 앞당기는 계기가 되었다. 항쟁이 발발한 지 불과 열흘 만에 유신의 수괴 박정희는 심복이었던 중앙정보부장의 총에 스러져 버린 것이었다. 그것은 부패할 수밖에 없는 절대 권력과 그 힘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가를 웅변으로 증명한 역사이기도 했다.
원문 : 이 풍진 세상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