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3년 6월 30일 특별생방송 <이산가족을 찾습니다>
1983년 오늘(6월 30일), 한국방송공사(KBS)는 1TV를 통해 특별생방송 <이산가족을 찾습니다>를 방송하기 시작했다. 이 특별생방송은 한국전쟁 33주년과 휴전협정(1953.7.27.) 30주년을 즈음하여 일제 식민지 지배와 한국전쟁(1950)으로 인한 남북분단이 낳은, 약 1천만 명에 이르는 이산가족을 찾기 위해 기획한 특별 프로그램이었다.
KBS는 본래 라디오에서 10여 년 동안 이산가족 찾기 방송을 해왔던 터였다. 그래서 하루 동안 10가족 정도가 만나게 될 것으로 예상했었다. 그러나 예상을 뒤엎고 시민들이 끊임없이 밀어닥쳤다. 뜻밖의 열기에 KBS는 닷새간 정규방송을 취소하고 이산가족 찾기 릴레이 생방송을 이어갔다.
상봉률 19%의 이산가족 찾기 생방송
이산가족 찾기 신청은 모두 100,952건이었다. 그중 53,536건이 방송에 소개되어 10,189건의 이산가족이 상봉했다. 성공률이 19.03%였다. 이는 이전의 신문과 라디오를 통한 이산가족 찾기 운동의 미미한 실적에 비하면 대단한 성과였다.
이산가족들의 폭발적인 반응에 고무된 KBS는 전담 방송 인원 1,641명을 투입했고 9개 지역 방송국을 동시에 연결하는 다원 생방송을 중계하는 등 모든 방송 역량을 투입했다. 자원봉사에 참여한 전국의 시민·학생들과 정부의 종합적인 지원(만남의 광장, 간이우체국, 이동 파출소, 법률상담소, 미아보호소 설치 등)도 큰 도움이 되었다.
1983년 6월 30일 밤 10시 15분에 전파를 타기 시작한 이 생방송은 1983년 11월 14일 새벽 4시까지 138일에 걸쳐 방영되어, 총 453시간 45분으로 마감되었다. 단일 주제 생방송으로 기록을 달성한 이 프로그램이 성공할 수 있었던 이면에는 어느덧 40년으로 치닫고 있었던 분단 상황과 그에 따른 1천만 이산가족의 존재가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민족사로 다루어져야 할 이산의 비극을 개인사로 방치했던 정부의 직무유기가 있었다. 일제 식민 지배에서 해방은 38도선 남북에 각각 다른 외국군이 진주하면서 이루어졌고, 이는 곧 남북이 이념으로 대립 갈등하면서 한국전쟁으로 이어졌다.
동족상잔의 한국전쟁은 수백, 수천만의 인명 피해와 함께 1천만이 넘는 이산가족을 낳았다. 분단으로 인한 이산가족은 남북에서 생사를 모른 채 살아가야 했다. 그러나 이산가족은 막힌 휴전선 남북에만 있지 않았다.
이산가족 찾기는 ‘개인 문제’로 방치되었다
전쟁의 소용돌이와 피난길에서, 전후의 혼란과 절대 빈곤 속에서 각자도생해야 했던 무지렁이 백성들에게도 말 못 할 이산의 아픔이 있었다. 부모와 자식이, 형제와 자매가 헤어져 서로의 생사도 모르고 살아야 했던 이들 남한 내 이산가족들에게 이산가족 찾기는 개인에게 맡겨져 있었다.
남북 당국이 이산가족 문제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1953년 12월 11일부터 1954년 3월 1일까지 ‘휴전협정’ 제3조 제59항에 근거하여 설치된 ‘실향 민간 귀향 협조 위원회’가 남북이 이산가족 문제를 인도적 차원에서 해결키로 한 이후 첫 만남이었다.
남북 이산가족 상봉은 1971년 8월 20일 남북적십자 간 판문점 중립국 감독위 회의실에서 사상 첫 회담을 개최한 이래 20여 차례의 예비회담과 8차례의 본 회담을 통해 이산가족 고향 방문 등을 조율해 가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 정부는 남한의 이산가족 상봉을 위한 어떤 정책도 펴고 있지 않았다.
고작 라디오를 통해서 지엽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던 이산가족 찾기를 통해서 소수의 가족이 가끔 상봉에 성공하는 정도였다. 정부도 남한 내 이산가족 문제를 전 국민적 문제로 바라보지 않았고, 이산가족들 역시 그것을 자신의 개인적 문제로 끌어안고 있었다.
무능한 정부는 직무 태만을 저지르고 있었고, 착한 국민은 분단으로 헤어진 혈육을 찾는 일이 국가의 책임이란 걸 생각지도 못했다. 북에 두고 온 가족들이야 휴전선으로 막혀 있으니 어쩔 수 없다 쳐도 이남에서 헤어졌던 가족을 찾는 일을 왜 국가가 관심조차 기울이지 않았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방송이 시작되자, 온 나라의 국민이 공황에 빠졌다. 영상으로 전달되는 이산가족들의 곡절 많은 사연에 사람들은 함께 눈물을 흘렸고, 상봉에 성공한 이산가족들이 ‘맞다, 맞아!’를 외칠 때 손뼉을 치면서 함께 기뻐했다.
혈육들이 눈물로 재회하고 얼싸안고 울부짖는 장면을 지켜보면서 사람들은 분단이 우리의 삶에 드리운 깊고 어두운 그림자를 새삼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수십 년 동안 헤어져 살던 이산가족들의 상봉을 통해 분단의 아픔이 치유되는 듯한 황홀한 감정의 고양을 체험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혈육의 정, 민족적 동질성이 분단을 극복할 수 있는 출발점이라는 것도 깨달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함께 눈물 흘리며 분단 아픔을 나누다
넉 달 보름여에 걸친 최장 시간의 생방송이 이루어졌지만, 상봉에 성공한 사람은 열에 둘뿐이었다. 여전히 다수 이산가족이 이산의 고통을 치유하지 못했고, 분단은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이 생방송은 이산가족 상봉의 절실한 필요성을 환기하면서 이태 후 남북 이산가족 최초 상봉(1985.9.)의 촉매 역할을 했다. 냉전 체제의 긴장 완화에도 이바지했다.
이 생방송 소식은 온 세계에 타전되었다. 더는 지구상에 이와 같은 비극이 생겨나서는 안 된다는 평화의 메시지가 되어 보편적 인류애를 고취했다. KBS의 이 프로그램이 제6차 세계 언론인 대회에서 ‘1983년의 가장 인도적인 프로그램’으로 선정되고 세계평화 기여자에게 주는 골드머큐리 국제상(1984)을 받은 것은 이 같은 공로를 인정받은 결과였다.
‘KBS 특별생방송 이산가족을 찾습니다 기록물’은 2015년 10월 ‘한국의 유교책판’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Memory of the World)에 등재됐다. 이 기록물은 KBS가 1983년 453시간 45분 동안 생방송 한 남북한 이산가족 찾기 등을 담은 비디오테이프 463개, 담당 프로듀서의 업무수첩, 이산가족이 작성한 신청서, 일일 방송 진행표, 큐시트, 기념 음반, 사진 등 자료 2만 522건 등이다.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 그러나 1세대에겐 시간이 별로 없다
<KBS 특별생방송 이산가족을 찾습니다>의 타이틀곡은 설운도의 <잃어버린 30년>이었고, 이산가족 상봉 시 배경 음악은 패티 김의 <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였다. 눈물을 훔치면서 그 애잔한 가락을 듣던 기억이 어제 같은데 어느덧 세월은 30년이 훌쩍 흘렀다.
1985년 9월, 서울과 평양에서 최초로 이산가족 고향방문단과 예술 공연 교환 행사 개최된 이래, 남북의 이산가족 상봉은 2015년 10월까지 20차례, 이산가족 화상 상봉은 2005년 8월 15일 처음 이루어진 뒤 2007년 11월까지 7차례에 걸쳐 이어졌다.
남북 정상의 합의를 기반으로 한 6·15선언(2000)과 10·4선언(2007)으로 남북 간 화해와 평화 통일의 실마리가 열리면서 이산가족 문제에 대한 기대를 높였다. 그러나 2008년부터 이어진 보수 정부 9년은 그런 성과를 깡그리 무너뜨려 버렸다.
‘KBS 특별생방송 이산가족을 찾습니다’ 아카이브에는 이산가족 상봉 관련 기록물이 소개되고 있다. 특별생방송이 진행되던 시기의 자료, 특히 그때의 분위기를 고스란히 살려 주는 사진 자료들이 주는 감동은 30년 세월을 넘어서 절절하게 다가온다.
현재까지 생존해 있는 이산가족 1세대는 80%가 70세 이상 노인으로, 80세 이상 고령자가 절반에 이른다고 한다. 앞으로 20년 후면 이들은 대부분 사망할 것으로 보이니 이들에게 남은 시간은 많지 않다. 이들이 죽기 전에 혈육을 다시 만날 수 있는 확률은 얼마나 될까를 생각하면서 이산가족 찾기 관련 사진을 곰곰 들여다본다.
원문: 이 풍진 세상에
참고
- <위키백과>
- <KBS 특별생방송 이산가족을 찾습니다> 아카이브
- 국가기록원 ‘이산가족 상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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