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들야학은 지난 1993년에 설립되어, 장애인에게 공동체와 연대의 가치를 일깨워주고 주체적으로 자립할 수 있도록 돕고 있는 교육공간이다.
필자는 8월 23일부터 31일까지 한국장애인재활협회와 함께 미얀마에 ‘장애인의 빈곤과 국제협력’에 관하여 조사하고 올 예정이다. 미얀마 현지 장애인 교육의 환경을 조사하기에 앞서, 한국 사회에서의 장애인 교육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참고하고자, 노들야학에 방문하여 노들야학 허신행 교사님과의 인터뷰를 진행했다.
기존 교육과정이 아닌, 삶에 필요한 교육을 제공
안녕하세요. 자기소개 좀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노들야학에 상근하며 한소리반반 선생님을 맡고 있는 허신행 입니다. 반갑습니다.
노들야학의 규모에 대해 간단히 소개해 주실 수 있을까요?
-두 가지로 나누어 설명드리면 될 것 같은데요. 물리적인 공간 규모와 교육 환경에 대한 규모에 대해 말씀드릴께요.
100평 남짓의 면적에 4개의 노들야학 교실이 있습니다. 4개 반은 문해(청솔 1), 초등(청솔2), 중등(불수레), 고등(한소리)로 각각 되어있습니다. 현재 노들야학에 등록된 교사와 학생의 수는 각각 40명, 60명입니다.
아, 그럼 입학서부터 졸업하는 데까지 보통 재학기간이 얼마나 되죠?
노들야학은 졸업연한이 없습니다. 20년째 노들야학을 다니시는 분도 계십니다. 현재 노들야학에 계신 대다수의 장애인분들이 중증장애인이신데, 어느 학우 분은 구구단을 다 외우는데 7년이 걸리기도 합니다.
그렇기에 단순히 학년제로 진행되는 수업 방식이 아닙니다. 노들야학에서의 수업은 기존 교육과정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장애인 학우분들이 함께 연대하고 살아가는 법을 배우고, 우리 삶의 이야기를 나누며 학습하는 공간입니다.
기존의 교육과정이 없다면, 교사님들은 보통 무엇을 어떻게 가르치시는거죠?
영어수업을 예로 들어볼께요. ‘How are you doing’와 ‘What do you like’같은 기초회화 구사나 기초문법수업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중증 장애인분들에게 먼저 필요한 것은 작문이나 스피치가 아니라, 영어로 된 간판을 어떻게 소리내어 읽을 수 있는지, 카페에 가서 온통 영어 이름으로 되어있는 음식들을 어떻게 주문하는지 등을 알고 싶어하십니다.
그렇기에 노들야학의 교사는 이러한 점에서 기존의 교육과정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삶의 이야기에 집중하고 이를 함께 풀어내는데 돕고자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인식하고 있는 ‘학습을 위한 학교’로서의 기능, 그 이상의 ‘공동체의 공간’으로서 자리 잡고 있습니다.
시·구청의 열악하고 불안정한 재정 지원
그럼 교육비는 어떻게 되는지, 노들야학이 어떻게 운영되는지에 대해서 여쭈어봐도 될까요?
먼저 학우분들께서 따로 납부하셔야할 교육비는 없습니다. 학생회비가 만 원 있기는 한데, 같은 반 동료 친구들의 생일파티 등을 하는데 함께 하는 데 사용됩니다. 그러니 일단 교육비를 통해 얻는 운영수입은 없다고 말씀드리면 될 것 같구요. 개인 후원금, 서울시 교육청, 서울 시·구청의 매칭펀드 등 지원을 받아 유지되고 있습니다.
교육청, 시·구청에서도 함께 지원해 준다면 재정상황이 안정적인 편이겠네요?
교육청을 비롯한 시·구청 지원에 대해서 말씀드리자면, 먼저 관 측에서 도와주신다고 지원을 제안한 것은 아니구요. 정말 오랜 설득을 통해 비로소 최근에야 지원받게 되었습니다. 특히 구청에서의 지원은 올해부터 시작됐구요.
지원받고 있는다고 해서 마냥 안정적이지만은 않습니다. 가령 사례를 들자면, 전 시장이신 오세훈 시장의 재임 때는, 전 오세훈 시장님께서는 저희를 일절 만나주지 않았었거든요. 박원순 시장님께서 오시고 나서부터는 면담요청을 하면 만나주시기도 하고, 몇주 전에는 노들야학에 방문하셔서 함께 얘기 나누시다 가셨어요.
그러니 이렇게 지원을 받게 된 것도 비교적 최근의 일입니다. 교육청의 지원도 마찬가지입니다. 결국 교육청도 시,구청도 주요 공직자가 바뀔 때마다 저희에 대한 지원 정책이 달라질 수도, 유지될 수도 있겠죠.
성인 장애인을 위한 교육공간이 없는 한국의 현실
국가에서 운영하는 안정적인 특수학교들이 있을텐데, 왜 다들 노들야학으로 모이는거죠?
지금 설치되어있는 특수학교는 성인 장애인학생을 위한 공간이라거나 교육체계가 마련되어 있지 않습니다. 노들야학에 오시는 분들은 30대도, 40대도 많으신데 이분들이 갈 수 있는 특수학교는 전국에 마땅히 없고, 설령 입학할 수 있다 하더라도 이분들께서 과연 나이차가 크게 나는 어린 학생들과 함께 학교에 다니고 싶어하실까요?
그럼 노들야학에 다니시는 중증장애인 학우들께서는 어떻게 경제활동을 하시는거죠?
경제활동을 하지 못하고 있다고 봐야죠. 노들야학에 오시면서도 느끼셨겠지만, 대다수의 장애인 학우분들께서 전동휠체어를 타고 계시고, 손발을 자유로이 쓰는데 어려움이 많아요. 그렇다보니 대부분 기초수급대상자로서 기초수급비를 받으시며, 지금의 생활을 유지하시는 거죠.
단순히 장애등급에서의 ‘경증’, ‘중증’을 나누는 척도로서의 의미가 아니라, 정말 이분들은 몸을 온전히 다루기 힘든 중증장애인 분들이십니다. 할 수 있는 경제활동은 극히 제한되어 있어요.
그럼 대부분 혼자 사시는건가요? 그러니까 여기서의 혼자라는 말은 결혼이라거나…
아! 의외로 결혼하신 분들이 많아요. 전에 꽃동네에서 탈시설 운동을 하면서 함께 만난 장애인 동료들끼리 눈이 맞으셔서 함께 결혼해 사는 경우도 많습니다. 정말 빠르게 연애하고 정말 빠르게 결혼하더군요.
그럼 결혼하신 분들께서 가정을 꾸리는데 있어 경제활동은…?
아까 말씀드렸던 바와 같습니다. 부부가 함께 기초수급비로 생활을 유지하시죠. 일을 안 하는 것이 아니라 못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장애인, 그러니까 신체의 일부가 불편하지만 직업활동을 할 수 있는 수준의 경증장애인이 아니라 대부분이 손발을 다루는데 있어 어려움이 많은 중증장애인환자 분들이십니다.
직업훈련이 아닌, 노동의 대가를 받을 수 있게 하는 권리 교육 실행
노들야학에서 취업을 위한 직업훈련을 진행하고 있지는 않은지?
계속 말씀드리지만, 단순히 직업훈련이 되었는지 아닌지에 대한 문제가 아니에요. 예컨대, 한국장애인고용공단에서는 장애인을 위한 직업훈련 및 취업지원을 시행하고 있습니다. 이분들이 가서 상담을 받으면 어떻게 될까요? 현실적으로 구직에 성공하기까지 이어지기가 힘들어요. 또 구직을 하더라도 대부분의 일들이 단순노동으로 진행됩니다. 상품을 포장하는 등의 일이요.
어느 학생분께서는 한달 내내 일하고 급여를 5만원 받아오신 분도 있어요. 왜 그런지 아시나요? 장애인은 최저임금법 대상자에서 제외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최저임금을 받을 수 있는 의무가 장애인 노동자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것이죠. 장애인 노동자는 직업현장에서 사용자로부터 매맞아 가면서 일해도 그저 잘못했다고 빌어 가면서 최저임금에 한참 미치지도 못하는 봉급을 받는 것이 현실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았을 때, 노들야학에서 직업훈련을 진행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어요. 아니 한편으로 제 개인적으로는 그러한 직업훈련이 싫기도 해요. 진정 노들야학에서 가르쳐야할 것은 ‘설령 매를 맞더라도, 돈을 적게 주더라도 참고 견디며 일을 하는 법’을 가르칠 것이 아니라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외된 장애인의 의무와 지켜져야 할 가치’를 장애인 당사자분들께 알리고 가르쳐야합니다.
그래서 노들야학에서는 직업훈련보다는 인권교육을 가르칩니다. 아 그리고 생각해보니, 이랬던 적은 있어요. 아까 구구단을 외우는데 7년이 걸리셨다는 그 학우분 있죠. 현재 그 분께서는 열심히 학습하신 끝에 다른 기관, 단체에서 인권교육을 가르치고 계세요. 그리고 약소하게나마 수업료를 받기도 하셨죠. 중증 장애인 스스로가 경제활동을 해냈을 때의 그 희열감은 대단합니다. 본인도 아주 좋아하셨어요.
결과적으로 노들야학에서 직접적인 직업훈련이나 구직활동을 주선한 것은 아니지만, 이 공간에서 배운 것을 통해 본인만이 할 수 있는 일을 찾도록 함께 도운 셈이 되었습니다. 아주 뿌듯합니다.
학생 분들도 배우느라 힘드시겠지만, 교사 분들 또한 정말 해야할 것이 많네요.
이 쯤 되면 이해하셨겠지만, 노들야학은 학교 이상의 공동체 공간이자, 투쟁의 공간입니다. 노들야학에서의 교사는 단순히 가르치는 사람이 아닙니다. 제도적 교육만이 아니라 길에서의 물음을 함께 던지고, 학생들과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이죠.
그러다보니 교사는 자연스럽게 학생 개개인의 일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게 됩니다. 어느 학생이 기초수급대상자 심의를 받는 과정에서 가족 친척이 장애인 명의를 빌려 몰래 자동차를 구입하는 바람에 수급대상자 심사에서 탈락하는 일을 해결하려고. 또 노들야학을 다니다가 그만두고 경기도 외곽에 단순노무로 취업을 한 학생이 일을 잘 못한다는 이유로 골프채로 사장에게 맞았다는 문자메시지를 받고 경기도까지 달려가 그 작업장으로부터 학생을 데려오는 일까지도 합니다.
교사로 일하다보면 마음 아픈 일을 너무 많이 직면하게 됩니다. 쉽지 않습니다. 그래도 조금 나아진 것이 있다면, 2000년대 들어 활동보조인 제도가 시행되고 나서부터예요. 수업도 수업이지만, 급식을 퍼나르는 것도 정말 힘든 일 중 하나였거든요. 지금은 학우분들과 함께 참석하시는 활동보조인분들과 함께 조금이나마 일을 분담할 때도 있어, 전보다 더 즐겁습니다.
동기와 보람에 의존해야 하는 교사들
교사로서 무엇이 제일 힘드세요?
40명의 노들야학 교사들 중, 실제 활동하고 있는 교사는 25명 정도입니다. 상근이 10명이고 비상근이 15명입니다. 상근 교사는 급여가 있고 비상근 교사분들은 자원활동을 통해 교육하고 계십니다.
상근 교사 급여는 최저 임금수준을 받고 있습니다. 이 얘기를 꺼낸 이유는, 먹고 사는게 제일 힘들다는 것을 말하려고 하기 위해서만은 아닙니다. 아 물론, 지금의 봉급으로 가장으로서,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육아하는 데에도 어려움이 많습니다. 둘째를 낳고는 싶은데, 지금의 급여수준으로는 도저히 이 이상 가정을 유지할 수 없겠더라구요.
그게 가끔 속상하기는 하지만, 그것보다 본질적으로 가장 힘든 것은 따로 있습니다. 이렇게 급여조건을 초월하고서 계속 일을 하는 이유는 노들야학이 주는 에너지와 변화에 대한 갈망이 가장 큰 동기로 자리잡고 있는데, 과연 이러한 동기가 언제까지 나를 뜨겁게 할 수 있을지 가끔 겁이 납니다.
그러니까 어느 미래까지 이 보람이 유지될지에 대한 두려움이라고 할 수 있겠죠. 어느날 갑자기 푹 하고 이 동기와 열정이 식어 버리면 어쩌지. 또 노들야학에서 근무하면서, 죽어가는 중증 장애인들의 눈물겨운 투쟁을 보아야 하는 이 환경은 한편으로 너무 무기력하고 괴롭기까지도 합니다.
우리 사회에 많은 투쟁의 역사가 있었고, 그 중에서 장애인 운동이 가장 눈부신 성과와 발전을 이루었다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감사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생각이 들길, 대체 그 이전에 장애인을 위한 생활 환경은 어땠겠어요. 눈부신 성과와 발전이라고 표현할 수 밖에 없는 것이, 요근래까지 장애인의 생활환경은 마치 중세시대의 삶을 사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어요. 그래도 현장의 많은 분들의 노력과 희생 끝에서야 이나마 보장받게 되었죠.
세상은 원만하게 흘러가는 것만 같은데, 왜 장애인들은 이런 생지옥과 같은 느낌에서 이질된 사회에 살고 있는지. 그리고 왜 나는 이들의 죽음을 지켜보고만 있는지.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근본적인 물음에 부딪힐 때마다 마음이 너무 힘듭니다.
그럼에도 햇수로 약 8년이 넘는 시간동안 그만두지 못하고 함께 하는 이유가 있나요?
제가 이런 점에 있어서는 굉장히 단순한데… 이유는 간단해요. 학생들과 헤어질 수가 없어요.
지금 제가 가르치고 있는 학생들이 너무 좋아요. 매일 웃고 떠드는 이 시간이 너무 행복해요. 또, 큰 진전은 없겠지만, 함께 장애인의 권리를 찾기 위해 고민하고 운동하는 이 순간들도 조금은 고달프지만, 그럼에도 제가 같이 학생들과 있어야한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러니까 결국은 제가 학생을 너무 많이 사랑하는 것 같아요. 헤어지고 싶지 않아요.
사실 저희 아내가 집안 살림을 꾸리는데 있어 고생이 많아요. 부부가 맞벌이를 하고는 있지만 상황이 쉽지만은 않거든요. 정말 미안하고 고맙다고 말하고 싶어요. 저 역시 어떤 활동들 이상으로 아내를 사랑하기에, 아내가 정말 너무 힘들어하면 언젠가 다른 길을 찾아봐야 할지도 모르겠죠. 지금도 조금 힘들어 하기는 하는데, 아주 많이 저를 미워하는 것 같지는 않아요. 그러니까… 조금만 더 해 보려구요.
제 얘기를 조금 하자면, 저는 원래 학부시절에 사회복지학을 전공했는데, 석사를 마칠때까지만 해도 박사유학을 가야겠다는 생각이 전부였어요. 실제로 제가 다니던 대학 사회복지학과 내에서 현장에서 사회복지사로 활동하는 선후배는 없었고 대부분 연구나 학업을 계속했죠. 위아래 다섯 학번 통틀어서 어쩌면 저 혼자 현장에서 일하고 있는 것 같아요.
저는 대학원 석사과정을 다니며 노들야학에서 선생님으로 학생들을 만나기 시작했죠. 그때 지금의 아내도 만났구요. 그리고 노들야학에서 함께하며, 이 곳의 학생들과 정이 들기 시작하면서, ‘아 졸업하고도 노들야학에 계속 함께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부모님께서는 제가 석사를 마치고도 노들야학에 계속 있겠다고 하니까, 당시에 크게 화를 내시고는 몇 년동안 저와 냉담하셨어요. 최근에야 제가 손주를 갖고 나서부터 조금씩 다시 연락이 닿고 있어요.
구성원 각자의 꿈과 가치를 만들어나가는 공간으로
그럼 마지막으로, 노들야학이 추구하는 이상이 있을까요?
노들이 추구하는 이상요? 아마 100개 이상의 이상이 있을 것 같은데요. 노들의 이상은 그 구성원만큼의 이상이 함께 공존해요. 그래서 그런가… 회의시간 한번 잡는 것도 힘들어요. 누구는 오전, 누구는 오후, 누구는 밤 늦게 하자고… 회의 중에도 각자 다 다른 소리 하기 일쑤고요. 이것도 다 이상이 달라서 일어나는 문제인가…?
아무튼 우리는 하나의 행복을 갖고 있지는 않아요. 그러니 구성원 모두가 추구하는 꿈과 가치를 앞으로도 끊임없이 얘기해 나가야죠.
끝으로 허신행 교사님께서 인터뷰 중에 제도적 안정은 자연스러운 운동의 소멸을 불러온다고 언급했었다. 사실 어느 맥락에서 말을 했었는지 지금 기억이 잘 안나지만, 이 순간에도 장애등급제와 부양의무제 폐지를 위해 힘겨운 노숙투쟁을 이어나가는 장애인 활동가들이 유독 많이 생각났다.
그들이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 지내며 온전히 ‘밤에는 화장실을 갈 수 있는 삶’을 보장받을 수 있기를 희망한다.
chanel espadrillesFashionable living in the Fashion Distric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