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서비스가 더 필요한 곳에 의사와 의료기관이 더 적게 분포한다.
- 역의료 법칙(inverse care law)
역의료 법칙은 1971년 영국의 의사 줄리안 튜더 하트가 지역 간 의료불평등을 설명하기 위해 만든 이론이다(※ 관련 자료 바로가기). 당시 영국의 북서 해안과 북동부 지역은 많은 의료 필요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지역보다 의사 수가 적었다. 이러한 차이는 지역 간 의료서비스 접근성의 불평등을 만들어 지역 간 건강격차로 이어졌다.
왜 의료서비스가 더 필요한 곳에 의사와 의료기관이 더 많이 분포하지 않고 더 적게 분포하게 되었을까? 어떻게 해야 전국 어디에서나 필요할 때 적절한 치료를 받을 수 있을까? 최근 한국 정부는 이 질문에 대한 답으로 2025년부터 의대 입학 정원을 2,000명 증원하여 2035년까지 최대 10,000명의 의사 인력을 확충하겠다고 발표했다. 의사가 부족하니 의사 수를 늘리면 될 것 같은데, 정말 의사 수를 늘리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의사의 이동’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의료 취약지에 의사를 구하기 어려운 문제는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국가보건서비스(National Health Service, NHS)를 가진 영국에서도 응급실에서의 장시간 대기 문제, 낙후된 지역의 의사 부족 문제가 심각하다. 이러한 현상을 보다 잘 이해하고 해결하기 위해 다양한 연구가 진행되었다.
오늘 소개할 논문은 그 중 의료 취약지 의사 인력 부족문제를 ‘의사의 수’가 아니라 ‘의사의 이동(경로)에 초점을 맞추어 분석한 결과이다(※ 논문 바로가기: 「의사의 이동성에 대한 예상과 그것이 건강 결과에 미치는 영향」). 이 연구를 통해 현재 논란 중인 의사 인력정책에서 빠져있는 것은 무엇이고, 추가로 고려해야 할 문제는 무엇인지 살펴보고자 한다.
의사는 보건의료영역에서 의료서비스 제공 여부와 질을 결정짓는 중요한 행위자이다. 의사는 어디에서나 일할 수 있는 이동성이 높은 직군으로 여겨지지만, 어디에서 일할지에 관한 결정은 개인적 선호를 넘어 구조의 영향을 받는다. 즉, 현재 한국이 직면한 의료 취약지 의사 부족 문제는 기존에 만들어진 의학교육과 수련 과정이 누적되어 의도치 않게 만들어 낸 결과인 셈이다.
의사 인력에서 큰 지역 이동이 일어나는 시점은 주로 의과대학 진학 시, 인턴 수련병원 선택 시, 전공과목 선택 시, 전문의 취득 후로 구분할 수 있다. 이동 시점별로 공간의 변화를 살펴보면, 의과대학 진학 시 많은 학생은 거주지가 아닌 지역으로 이동한다. 의과대학 선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고려 사항으로다음과 같은 요소들이 고려된다.
- 해당 의과대학이 가진 사회적 명성
- 교육의 질
- 수련병원의 지리적 위치와 규모
한국에서도 이와 비슷한 기준으로 의과대학 진학이 이루어지는데, 위 조건들을 두루 갖춘 의과대학은 대부분 수도권에 있다. 의사 인력의 두 번째 중요한 지역 이동은 인턴·전공의 수련병원 선택 시 발생한다.
지역 의과대학의 정원이 해당 지역의 의사 수로 연결되지 못하는 중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수련병원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인으로 ① 선택하고자 하는 전공과목의 수련 가능성과 ② 수련의 질이 있다. 출신 학교만큼이나 어느 병원·기관에서 수련받았는지가 향후 의사로서의 직업적 성취의 많은 부분을 결정한다.
현재 한국에서 중요한 치료는 대부분 ‘빅5’라고 불리는 큰 병원에서 이루어진다. 지역의료기관에서 치료할 수 있더라도 진단만 받고 서울의 큰 병원에서 치료받는다. 이러한 이유로 ‘내외산소(내과, 외과, 산부인과, 소아청소년과)’와 같은 주요 전공과목을 희망하는 학생들은 다양한 임상경험을 쌓기 위해 지역을 떠나 수도권의 큰 병원에서 수련받는 경향이 생겼다.
어디에서 일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중요한 문제
마지막으로 전문의 취득 후에도 지역 이동이 발생한다. 이 단계에서 일어나는 지역 이동은 의사 개개인이 놓인 상황에 따라 다양한 우선순위가 고려된다. 이 논문에서는 지역의 교통과 개인이 이동에 쓸 수 있는 자원과 능력으로 이를 설명했다.
병원은 24시간 매일 운영되어야 하므로 집과 병원을 오가는 교통상황은 상당히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한다. 실질적인 거리는 멀더라도 주거지역과 병원을 오가는 교통수단이 저렴한 비용으로 잘 정비되어 있다면, 매일 같이 장시간 운전해야 갈 수 있는 지역병원보다 선호될 것이다.
또한 의사 개인마다 가지고 있는 사회경제적 배경과 사회적 관계망이 다르므로 일할 병원을 선택하는 데 있어서 ‘해당 지역에 가족이 살고 있는가’, ‘주거지와 병원 사이 이동은 편리한가’, ‘병원이 있는 지역에서 거주하는 비용은 적절한가’, ‘거주지의 인프라 및 편의시설은 잘 갖춰져 있는가’ 등에 따라 영향을 받게 된다.
마치며
한 명의 의사가 제 역할을 하기까지는 의과대학 6년, 인턴 1년, 전공의 3~4년이라는 오랜 수련 과정이 필요하다. 현재 한국의 보건의료체계는 양질의 교육을 받고자하는 젊은 의사들을 지역에서 대도시의 큰 병원으로 불러 모으고 있다. 지금 우리가 경험하는 지역 간 의료불평등은 의과대학 및 수련병원의 지리적 위치와 교육·수련 과정이 장기간에 걸쳐 만들어 낸 결과물이다.
이러한 구조 하에서 지역의대의 정원 증가가 의료취약지 의사 인력 충원으로 이어지길 바라는 것은 지나친 낙관주의일 수 있다. 지역의사제가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겠으나, 전공과목별로 수련병원에 따른 수련 과정의 질적 차이를 어떻게 보완할지에 대한 문제를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는다면 지역 간 의료불평등이라는 본질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다.
의료서비스가 더 필요한 지역에 의사들이 일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의사 수’라는 양적인 증가에 앞서 의사를 육성하고 수련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의사의 이동’이 지역의 의료 필요와 연결될 수 있도록 지역을 고려한 전공과목별 수련 과정 개편 그리고 국가 차원의 실질적인 지원이 필요한 시점이다.
원문: 시민건강연구소
서지정보
- Brewster, L., et al. (2022). Who cares where the doctors are? The expectation of mobility and its effect on health outcomes. Sociology of Health & Illness, 44(7), 1077-10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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