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LG트윈스 우승 전에 쓰여진 글입니다만, 우승주에 대한 다양한 정보가 기재되어 있어 발행합니다.
야구란 저주에 걸리고
그것을 깨는 흑마법사의 대결이다
지난 몇 년 야구를 보면서 느낀 점이 있다. 겉으로 보기에 이 게임은 공을 던지는 투수와 공을 때리는 타자의 대결처럼 보인다. 하지만 사실 각종 저주와 우승요정이 싸우는 ‘해리포터 마법대전’이다. 야구의 본가 미국의 한 팀은 ‘염소의 저주(경기장에서 염소를 쫓아내서 주인이 저주를 검)’ 때문에 70년이 넘게 우승을 못했고, 일본의 어떤 팀은 강물에 KFC 할아버지 동상을 버렸다가 저주에 걸려 38년간 우승을 못했다.
물론 한국의 야구에도 그런 저주가 있다. 바로 ‘LG 트윈스 우승주의 저주’다. 분명 우승을 하고 이 술을 마시기로 했는데 29년째 술 항아리는 열리지 않았다. 그런데 바로 그 저주를 풀 시간이 온 것이다.
서울의 자존심, 신바람 야구의 대표자 LG 트윈스가 드디어 ‘한국 시리즈’에 진출한 것이다. 10개 구단 중 9개 구단이 이 술독만 바라보고 있는 시간. 농축된 술의 맛은 어떨지 상상을 하다가 잠이 들었다.
LG 트윈스 선발투수 캘리가 던진 공이 미트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뭐 해, 어서 술… 우승주를 가져와!
한국에서 가장 마시기 어려웠던 술
야구를 보고 있지만 사실 우리는 ‘한국 프로야구 역사상 가장 귀한 액체’의 결말을 지켜보는 것이다.
LG 트윈스 우승주의 시작은 사실 ‘축복의 아이템’이었다. 이 팀의 초대 구단주이자 야구계의 골드로저 故 구본무 회장이 남긴 세상의 기쁨을 담은 술이라고 할까. 1994년 프로야구 시즌이 시작되기 전에 훈련장 근처에 있는 지역의 술을 사서 ‘우승하면 이 술로 건배를 하자’라고 말한 것이 시작이었다. 실제로 그 해 LG 트윈스는 우승을 했고 우승주를 마셨다.
당연히 다음 해에도 축복과도 같은 이 술을 샀다. 하지만 그 이후 LG 트윈스 우승주의 뚜껑이 열리는 일은 없었다(그래서 팬들의 뚜껑이 많이 열렸다). 무려 29년이나. 심지어 이 술은 살 때부터 10년 숙성이었다. 그러니 나이로 따지자면 40살에 가까운, 전문용어로 은퇴가 마려운 시기가 된 것이다.
그것을 해결할 마지막 순간이 왔다. 그런데 만약 이러면 어쩌지? LG 트윈스의 마무리 투수 고우석은 마지막 공을 던지며 이런 생각에 빠질 수 있다.
그런데… 29년이면 술이 상해서 식초가 되진 않았을까?
마르지 않는 우승주의 정체
다행인 점이 하나 있다. 아마도 술은 상하지 않았을 것이다. LG 트윈스 우승주의 정체는 일본 오키나와의 특산품 ‘아와모리 소주’다. 일반적으로 알콜도수 18도만 넘으면 유통기한이라는 개념이 없어진다. 그런데 아와모리 소주는 알콜도수가 40도는 훌쩍 뛰어넘는다. 어지간한 환경에서도 맛이 변할 일은 없다.
문제는 이런 술은 보관하면 자연적으로 증발한다는 것이다. 식초면 마시기라도 하지, 그것마저 없는 공기가 더욱 무서운 것이 아닐까.
위스키의 고장 스코틀랜드도 매년 2% 내외의 위스키가 증발하여 공기 중으로 사라진다. 그곳보다 훨씬 기후가 다이내믹한 한국은 매년 5~10%의 술이 공기 중으로 사라진다고 알려졌다. 그렇다면 이 술의 운명은…
온도와 습도를 맞춘 보관함, 아니 적어도 김치냉장고 같은 곳에 보관했으면 모를까. 마시지도 않은 우승주를 옛날에는 잠실야구장, 현재는 이천 야구장의 실온에 방치했다. 우승주라는 것은 언제나 ‘윈 나우’이기 때문이다. 새해가 시작될 때마다 ‘올해는 마신다’를 전제하니까 장기적 관리를 생각하지 않는 법이지. 마치 우리의 조그맣게 변한 주식처럼 말이다. 어쩐지 동질감이 들더라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 아니 우승주는 남아있다. 또한 몇몇 야구기사를 통해서 그래도 구단측에서 우승주를 관리하고 있을 것이라는 추측을 할 수 있었다.
- 원래 우승주는 3통이었는데 하나로 합체했다(물론 2통을 이미 마셨을 수도)
- 다른 아와모리 소주를 사서 술독을 채워 넣었다(물론 참이슬을 급하게 채울 수도)
몇몇 사람은 그 술이 뭐가 그렇게 중요하다고 채워 넣느냐 말할 수 있다. 앞서 말했지만 야구는 ‘그깟 공놀이’가 아니다. 저주가 걸렸다가 그것을 푸는 동화 같은 이야기다. 이 술은 언제부터인가 우승의 문제를 넘어서 마셔서 없애버리지 않으면 풀 수 없는 ‘세기의 저주’가 되었거든.
우승주를 마시는 자 저주에서 풀려난다
한국 프로야구팀들 중에서 유독 저주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팀이 LG 트윈스다. 내가 기억하는 LG 트윈스는 언제나 잘했던 것 같은데 우승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 시작에는 봄부터 시작되는 수많은 설레발(이라고 쓰고 저주라고 읽는다)이 있었다.
아직도 LG팬들의 가슴속에 고혈압으로 남아있는 ‘DTD(내려갈 팀은 내려간다)’부터 시작해서, ‘피우향(피어오르는 우승 향기)’, ‘이진우(이러다 진짜 우승하겠네)’ 등의 순위를 끌어내리는 수많은 흑마법 주문이 있었다. 하지만 그 흑막에 바로 이 우승주가 있다.
만약에 내가 LG 트윈스 담당 기자였다면 잘하는 우리 팀의 성적에 얼마나 신이 났겠는가. 그 기분에 벌써 우승을 한 것 같고, 오랫동안 열지 못한 우승주를 열 것 같고, 그런 역사에 남을 특종을 쓸 생각에 과한 김칫국 드립이 나오는 것이다. 그걸 본 상대팀의 전투력은 당연히 올라가는 것이다.
하지만 올해는 어떻게 달랐을까? 일단 선수들이 좋지만(언제나 나쁘진 않았다) 개인적으로 큰 차이가 있다.
롯데 자이언츠가 11년 만에 단독 1위를 했다. 그리고 모든 기사와 뉴스가 대서특필을 했다. 롯데 자이언츠 “올해는 다르다”… 아… 결국 저주를 깨는 방법은 회복주문을 외우는 것도, 승리요정을 데려오는 것도 아니었다. 또 다른 저주를 덮어 씌우는 것이다(아니다).
저주를 깨고 술을 마시러 갈 시간
어쨌거나 그 저주를 풀어낼 적기가 왔다. 올해 세계 야구계, 아니 우주의 흐름이 LG 트윈스의 우승을 바라고 있다. 일단 미국에서 텍사스 레인저스가 창단 62년 만에 월드시리즈 우승을, 일본의 한신 타이거스가 38년 만에 일본 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는 것이 그 증거다. Texas rangers, Hansin Tigers 둘 다 T잖아. LG Twin도 T의 의지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 꿈에서 깨고, 글에서 나와 야구경기를 기다릴 차례다. LG 트윈스와 kt 위즈의 마지막 대결. 아니 한 잔의 술을 마시기 위해 29년간 혼신의 야구를 하고, 응원을 하던 트윈스의 역사가 끝을 보는 날이다. 우승도 술도 기다린 시간이 쌓일수록 더 맛있는 법이니까.
과연 우승주의 뚜껑은 열릴 것인가(독하니까 물을 타거나 하이볼을 마셔라)! 그리고 마시고 난 다음에 LG 트윈스는 다시 똑같은 우승주를 살 것인가! 대단원의 막이 지금 펼쳐진다. 무적엘지! 오스틴틴!
원문: 마시즘
참고문헌
- 29년 묵힌 LG트윈스 우승주…’마실 수 있냐’ 아닌 ‘남았냐’ 관건[궁즉답], 남궁민관, 이데일리, 2023.10.30
- ‘2병이 사라졌다. LG 우승주 미스터리’ 사건의 전말은? 그런데 29년된 이 술, 마셔도 되나요?, 권인하, 스포츠조선, 2023.10.25
- ‘29년 만의 정규리그 우승’ LG, 올해는 술 항아리 딸까, 김양희, 한겨레, 2023.10.03
- [심현희 기자의 술 이야기] 따뜻한 남쪽나라의 ‘아와모리’, 심현희, 서울신문, 2021.2.4
- 한화 18연패 가장 슬퍼할 1인···27년째 ‘의리’ 지켜온 회장님, 강기헌, 중앙일보, 2020.6.15
- 구본무 회장님의 우승선물, 마시즘, 언유주얼7호, 2020.04
- [스포츠 카페]우승하면 먹기로 한 ‘아와모리 소주’, 서정희, 동아일보, 2009.1.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