핀테크 플랫폼을 론칭하자마자 5천 명이 줄을 서게 한 월가아재
이승환: 소개 부탁드립니다.
최한철: 뉴로퓨전의 대표를 맡고 있는 최한철입니다. 유튜버 ‘월가 아재’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이승환: 유튜브는 어쩌다가 여시게 된 거예요?
최한철: 미국과 홍콩에서 옵션 트레이더, 데이터 과학자로 일했습니다. 그러다 플랫폼 기반 핀테크 스타트업을 창업하고자 했죠. 이를 위해서 저희와 함께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성장할 분들이 필요했습니다. 이런 분들을 모집하기 위해 2020년 9월에 유튜브를 시작했습니다.
이승환: 사람을 모으기 위해 유튜브를요? 잘 모였나요?
최한철: 네. 제가 사실 그렇게 유명한 유튜버는 아니잖아요. 그런데 뉴로퓨전의 첫 프로젝트였던 ‘프로젝트 밸리’ 참가자 모집을 하고 나서, 제가 유튜브에서 나름 잘 산 것 같아 뿌듯했습니다. 1천 명을 모집하는 게 목표였는데, 무려 5천 명 이상이 지원을 하셨거든요.
이승환: 헐… 5천 명… 엄청난데요?
최한철: 네, 저도 예상 못한 일이었죠. 그런데 많은 인원을 받는 건, 그분들을 만족시킬 수 있을지 모르는 상태에서 과욕이라 생각했어요. 그래서 원래 계획대로 1천 명만 받기 위해서 플랫폼 입장 인원을 천 몇백 명 정도로 제한했습니다. 참가비용이 있기 때문에, 플랫폼이 오픈되고 나면 절반 정도는 참가를 안 하시리라 생각했거든요.
이승환: 실제로 절반 정도는 관두던가요?
최한철: 아니오. 환불률이 절반은 되리라는 예상과는 달리, 3% 정도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팀원들 모두 보람을 느꼈지만 저희가 잘해서라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저를 유튜브에서 오래 봐오셨기 때문에, 앞으로도 열심히 할 거라는 걸 믿어주시는 거라 생각해요. 그래서 더 잘하려 팀원들 모두 매일 같이 노력 중입니다.
‘생각의 계량화’라는 대안 데이터를 제시하다
이승환: 그렇게 시작한 스타트업 ‘뉴로퓨전’은 ‘생각의 계량화’를 내세우는데… 좀 더 설명 가능할까요?
최한철: ‘생각’은 굉장히 노이즈가 많은 데이터입니다. 예로 “빅테크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렇게 1천 명에게 질문하면 답이 다 다를 거예요. 노이즈가 많아서 데이터로서 효용이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 질문을 좁혀서 “갤럭시S13 디자인은 0에 10중 몇 점인가요?” 이런 질문은 매우 유의미합니다. 질문의 구조를 강제함으로써 데이터 노이즈를 줄이는 거죠. 그 반대급부로 질문자의 편향이 들어가긴 하지만요.
이승환: 이런 걸로 주가를 읽어낸다?
최한철: 주가를 읽어낸다고까지 말하기는 힘들고, 시그널 하나를 얻는 거죠. 흔히들 7만전자, 8만전자처럼 주가 레벨에서 이야기를 하잖아요? 그런데 주식 가격이라는 예측 자체는 노이즈가 너무 많은 데이터입니다. 그 예측에 이르는 과정에 대해 ‘구조를 강제’해야 유의미한 데이터로 거듭날 수 있어요. 여러 사람들을 통해 단순히 적정 주가가 아니라, 그 적정 주가를 도출하는데 필요한 매출 전망은 어떤지, 이익률은 어떨 것인지, 또 회사에 내재한 리스크는 어떻게 보는지…
이승환: 애널들이 하는 게 그런 일 아닌가요? 예로 매출액, 영업이익 등을 통해 목표주가를 산출하는…
최한철: 네, 하지만 그들은 파편화된 개인, 커봐야 팀입니다. 또한 주가 산출의 근거에 이르는 과정이 제각각이라 일관된 데이터로 수집하기 힘들죠. 반면 뉴로퓨전은 훨씬 많은 사람들의 다양한 생각을 구조화된 플랫폼에서 수집하는 거죠. 저는 이게 굉장히 유의미한 데이터라 생각합니다. 이미 월가에서는 전통적 퀀트 알고리즘에서 오는 ‘알파’(초과이익기회)가 평준화되고 있어요. 그러면서 헤지펀드에서는 이런 ‘대안 데이터’의 활용이 중요해지고 있지요.
이승환: 그 대안 데이터가 ‘사람의 생각’이고, 이를 계량화하겠다는 건데… 대체 어떻게 하는 거죠?
최한철: 저희 ‘밸리 AI’에서 플랫폼 참가자들의 생각을 모으는 겁니다. 제대로 된 가치 투자의 지식에 대해 훈련을 진행한 후, 종목을 탐색하고, 적정 가치를 구해보고, 정성적 리서치를 한 후 매수할 경우 포트폴리오 관리까지 하는 4단계 가치투자 과정을 손쉽게 반자동화한 플랫폼이에요. 일반적으로 다들 가치투자자라 하지만 정작 컴퓨터 앞에 앉으면 어디서부터 시작할지 모르죠. 그에 대해 참가자들을 훈련한 후, 실전에 바로 쓸 수 있는 도구까지 제공합니다.
이승환: 거기에 ‘생각의 계량화’는 어떻게 들어가는 거죠?
최한철: 위 4단계 프로세스에서 컴퓨터가 더 잘하는 부분은 알고리즘으로 자동화하고, 사람의 직관과 사고력이 중요한 부분은 유저가 본인의 생각 혹은 분석 결과를 입력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다른 사람들의 생각이나 다수 유저들의 방향성도 열람할 수 있고요. 그런 식으로 입력되는 각자의 생각이 크라우드 소싱되어 데이터화되고, 그 데이터에 AI를 적용해 점점 더 정교해지는 거죠.
투자를 제대로 공부하려는 사람들을 위한 집단지성 ‘밸리 AI’
이승환: 어쩌다 이런 엄청난 일을 벌이게 된 거죠;;;
최한철: 제가 대안 데이터 과학자로 5년 정도 일했습니다. 이 세계도 ‘대안 데이터’라는 이름 하나로 퉁치기 힘들 정도로 다양해요. 잘 알려진 예로는, 월마트 주차장을 인공위성 사진으로 찍어 실적 발표 전 매출을 예측한 사례가 있죠. 그 외에도 오일 탱크가 바다에 얼마나 잠기느냐에 따라 그림자가 달라지는 점을 이용해 오일 수급을 예측하기도 합니다.
이승환: 말이 대안투자지, 어지간한 지표보다 훨씬 더 직관적이네요?
최한철: 네. 그러니까 헤지펀드들의 수익으로 연결되는 거죠. 그런데 대부분 헤지펀드들은 본인들의 전략과 성과를 공개하지 않아요. 그래서 대안 데이터라는 개념이 개인 투자자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을 뿐입니다.
이승환: 그러면 뉴로퓨전은 전략을 도출하고, 수익률 높은 솔루션을 제공해 주는 건가요?
최한철: 아니오. 어떤 업체들이 그런 광고를 하곤 하지만, 누구에게나 수익률 높은 솔루션을 제공해 주는 건 본질적으로 불가능해요. 누군가가 시장을 이기기 위해서 누군가는 시장을 밑도는 수익을 내야 되거든요. 시장 평균 수익률이 10%인데 내가 12%를 내려면 누군가는 8%를 내야 하죠. 결국 투자는 시장 평균을 기준으로 제로섬 게임이에요. 증권사 수수료를 빼면 마이너스섬이죠.
이승환: 그러면 누구나 돈 더 벌 수 있다… 가 아니면 무엇을 할 생각입니까?
최한철: 저희는 초과수익을 내는 비법을 알려주거나, 종목을 집어주거나, 알아서 자산 관리해 주는 솔루션이 아닙니다. 투자를 제대로 공부해보려는 사람, 노력할 의지가 있는 사람에게 제대로 된 지식을 알려주고, 그 지식을 손쉽게 응용할 수 있게 AI 알고리즘과 결합된 플랫폼을 제공합니다. 그 과정에서 저희는 저희가 원하는 계량화된 생각 데이터를 얻고요. 그 생각 데이터로 창출되는 가치를 장학금 형태로 유저들에게 돌려줍니다.
이승환: 뛰어난 사람 1천 명이면, 뉴로퓨전 커뮤니티에서 함께 공부하는 것만으로도 도움이 될 것 같네요.
최한철: 네. 어떤 공부든 커뮤니티는 도움이 되겠지만, 금융은 더더욱 커뮤니티의 이점이 큽니다. 다각적인 시각이 매우 가치가 크기 때문이죠. 고시공부는 공부해야 할 것이 정확하게 정해져 있습니다. 하지만 금융 공부는 다양한 다른 사람들의 관점과 논리를 들어보는 게 중요합니다. 결국 세상에 대한 사고력과 직관을 키워야 하니까요.
큰물에서 놀고 싶었던 촌놈, 뉴욕으로 가기까지
이승환: 어릴 때는 어떤 학생이었습니까?
최한철: 되게 산만했어요. 근데 다행히 저희 부모님이 주로 많이 방임을 했어요. 학원도 거의 안 다니고,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야구 축구하고 항상 집에 한 8시~9시 밤에 들어가서 야단맞고… 중학교 때부터는 스타에 미쳤고… 그러다 중3 때 신문사에서 주최한 시험을 쳤는데, 미국 홈스테이 교환학생 프로그램을 지원받게 되었어요. 어차피 공부 안 할 거 영어나 배우라 해서 10개월 다녀왔죠.
이승환: 그때부터 시야가 탁 트인 건가요?
최한철: 아뇨… 그 프로그램을 마치고 고1 여름 방학 때 들어왔는데, 당시 제가 따르던 엄친아가 있었어요. 말 그대로 엄마친구아들이자 쩌는 분이었어요. 서울대 수석하고 홍콩 맥킨지 가고, 저의 우상이자 멘토였는데 그분한테 미국 큰물에서 일하고 싶다 했어요. 그런데 그 형이 한국대학 나와서 미국 월가 취직은 불가능하다고 하더라고요.
이승환: 그렇죠? 거의 아이비리그, 영미권 위주로 뽑으니까?
최한철: 그게 어린 마음에 되게 충격이었던 게, 그 형보다 뛰어난 사람을 본 적이 없었거든요. 그러면 해외를 나가야겠다. 근데 제가 유학 준비를 전혀 안 해서 이미 늦은 상태였어요. 근데 대구외고에서 일본의 한 국제대학 같은 곳? 설명회가 열렸어요. 영어랑 일본어, 두 언어로 수업을 진행한다… 여기서 경험을 쌓고 미국으로 편입이나 석사를 하면 되지 않을까… 그런 막연한 생각으로 일본 유학 준비를 시작했어요. 다행히 전액 장학금을 받아서 학비 걱정 없이 집안 허락도 받을 수 있었죠.
이승환: 왜 그런 큰물에서 놀고 싶었습니까?
최한철: 그냥 그 당시에는 철도 없고 꿈이 컸죠. 고1 때부터 돈을 엄청 벌어서 장학재단을 설립해서 교육 쪽을 바꾸자는 꿈이 있었어요. 제가 여러 계기로 기회의 평등에 되게 꽂혀 있었거든요. 나름의 이런저런 계산을 해보니 5조 5천억을 벌어야 한다는 계산… 그런 허영심 섞인 고등학생의 철없는 생각이 있었죠.
이승환: 본인은 방임이라서 혜택 받은 게 별로 없었나요?
최한철: 아니요. 저는 금수저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흙수저도 아니었습니다. 재산 기준으로는 인터넷을 찾아보면 동수저와 은수저 사이를 왔다 갔다 하더라구요. 그런데 지적 자극 면에서는 다이아몬드 수저였습니다. 아버지가 연구자셔서 매일 새벽 4시까지 공부하시는 모습을 보고 자랐고, 어머니가 어릴 때 애들은 하고 싶은 걸 해야 한다는 철학이어서, 어릴 때부터 많은 걸 접할 수 있었어요. 그리고 나중에 제가 뉴욕대로 편입했을 때, 집 대출까지 해서 서포트해 주셨어요. 저는 엄청나게 혜택받은 사람이고, 그걸 인지하고 감사하고 있습니다.
이승환: 그런 환경에서 기회의 평등에 관심을 갖게 된 건가요?
최한철: 표면적으로는 기회의 평등이라는 개념에 심취해 있긴 했지만, 현시점에 20년 전 제 속을 들여다보면 그저 돈을 많이 벌고 싶었을지도 몰라요. 부모님이 교육열이 매우 높아 다양한 경험은 많이 했는데 경제적으로는 항상 뭔가 아껴야 해서 아쉬웠고, 지적 자극은 많이 받고 자라 미국대학을 바라는 볼 수는 있지만 덜컥 유학 갈 돈은 부담되는 형편이었으니까요. 돈을 많이 벌어야겠다 생각하니, 직업군 중에 헤지펀드 매니저가 제일 연봉이 높았고, 일본 대학에서 뉴욕대로 편입하게 됐습니다.
친구 돈 날려 먹고 트레이더가 되기까지
이승환: 뉴욕대로 가니까 이제 뭔가 세상이 좀 바뀌어 보이던가요?
최한철: 처음에는 제가 촌놈이라서 되게 주눅 드는 게 많았어요. 사투리도 그때 처음으로 부끄러웠구요. 뉴욕의 분위기에도 압도되었고, 하룻밤에 술값으로 200만 원을 쓰는 금수저 유학생들도 심심찮게 보였죠. 저는 일본에 있을 때, 휴대폰도 없이 한 달에 기숙사비 포함해서 딱 35만 원으로 생활했거든요. 그러다가 뉴욕 가니까 도저히 생활이 안 돼서, 부모님도 그때부터는 좀 지원을 해주더라고요. 다행히 편입이라 몇 학기만 하면 되어서 졸업은 할 수 있었습니다.
이승환: 취업은 어땠나요?
최한철: 미국은 여름 학기 인턴이 굉장히 중요해요. 거기서 정직원 전환이 많이 이뤄지거든요. 그런데 제가 군대 다녀오며 시기와 비자 문제가 좀 꼬여서 유급 인턴을 못 하게 됐어요. 뭐하지 뭐하지 하고 있는데, 제가 일본 대학 다닐 적 룸메이트가 저한테 트레이딩이나 해봐라고 2천만 원을 줬어요. 그냥 제가 월가에서 일하고 싶어 하는데 경력을 못 쌓으니, 직접 해보기라도 하란 거죠. 그래서 외환 FX 트레이딩을 시작했죠.
이승환: 결과는 어땠습니까?
최한철: 다 날려 먹었어요. 처음에는 잘 됐는데 레버리지 높이다 보니 0이 남더라고요. 그 친구한테 미안하다, 나중에 꼭 갚을게… 사과하니까 괜찮다며 4천을 부쳐줬어요. 그리고 그 4천을 또 다 날렸죠.
이승환: ……
최한철: 그래서 또 미안하다 하니까 괜찮다며 또 준다는 거예요. 이번엔 제가 안 받았죠. 6천은 내가 일해서 갚을 수 있는데, 그 이상은 감당할 수 없다… 그렇게 인턴 경험 없이 면접을 보는데, 제가 트레이딩하다 두 번이나 다 날려 먹은 경험을 되게 좋게 본 거예요. 그렇게 시카고의 프랍트레이딩 회사에서 일하게 됐죠. 다 그 친구 덕이죠.
이승환: 프랍 트레이딩이면은 사주가 직접 댄 돈을 굴리는 건가요?
최한철: 네. 사주와 파트너들이죠. 저도 정확히는 모르는 게 프랍트레이딩은 헤지 펀드보다도 더 비밀스러워요. 뮤추얼 펀드는 아무나 투자할 수 있는 거고, 헤지 펀드는 소수 부자들이 투자하는 곳이고, 프랍은 그냥 내부 자금으로 하는 거라서 점점 공개할 유인이 없는 거죠. 자금줄이나 전략이나 전혀 공개하지 않아요. 제가 있던 회사는 시카고 법조계 유대인들의 자금이라는 사실만 알려져 있었는데, 동기들끼리는 조 단위 운용액이라 추측만 했어요.
꿈에 그리던 트레이더 생활기
이승환: 그렇게 트레이더 생활을 시작한 건가요?
최한철: 그렇죠. 근데 정작 제 일은 점심 배달이었어요. 제가 상상한 트레이더는 모니터 여러 대 놓고 하는 거였는데… 거래소로 출근해서 온갖 수신호와 쌍욕 난무하는 곳에, 저 같은 견습생들이 점심 배달했죠. 거래소, 본사, 이걸 연결해주는 사람이 팀으로 움직였죠.
이승환: 어… 컴퓨터 앞에 두고 거래하는 게 아니라, 거래소에서 수신호를 한다고요? 되게 원시적으로 보이는데요?
최한철: 아. 당연히 점점 디지털로 가고 있죠. 그런데 옵션은 이게 필요한 게, 예로 애플 주식이야 유동성이 풍부하니, 주문을 걸면 누군가 받아줘요. 그런데 주식에서 파생되는 옵션은 수백 개예요. 만기가 다르고 풋이 있고 콜이 있고, 또 합성 포지션들도 매매해야 되고… 예로 9월 30일에 만기되는 애플 150 풋옵션… 이런 대량으로 사고 싶다면 팔아줄 사람이 있어야 하잖아요?
이승환: 으어… 복잡하네요.
최한철: 네, 그러다 보니 디지털로만 오더를 넣어두면 소화가 잘 안 돼요. 그래서 중간에 사람들이 직접 대화하거나 연락하며 네고하는 거죠. 주식이나 선물 같은 단일 상품과 달리, 외환이나 옵션은 아직 이런 게 살아있습니다. 아무튼 그렇게 눈치껏 배우다, 본사로 보내져서 트레이더 생활을 시작했죠.
이승환: 트레이더는 적성에 잘 맞던가요?
최한철: 네. 스타크래프트 할 때만큼 손이 빨라야 했어요. 제가 모니터가 많았을 때는 17개까지 있었거든요. 마우스 4개에 페달도 몇 개 있고… 그러면서 전화도 받고 채팅도 하고… 그 와중에 계산도 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골드만 브로커가 자기 고객이 옵션 2만 개 팔아야 하는데 얼마에 받아줄 수 있냐… 그거 프라이싱하면서 다른 계약 체결하고… 엄청난 멀티태스킹을 요구합니다.
이승환: 성과는 어땠나요?
최한철: 아… 당시 서른도 안 됐는데 많이 벌었죠. 원래대로라면 훨씬 더 벌었어야 하는데, 제가 후려치기를 좀 당했어요. 제가 외국인이고 하니까 영주권 가지고 겁박한 거죠. 그 당시에는 잘리면 그다음 날부터 불법 체류자가 됐거든요. 이민국에서 암묵적으로 4주 정도는 봐주는데, 회사랑 척지면 잘리는 순간 그다음 날 불법 체류자가 될 수 있었어요.
이승환: 엄청난 스트레스겠군요.
최한철: 네. 웃긴 게 트레이딩도 군대처럼 맞선임 문화도 있어요. 내리 갈굼도 있고… 폭력적이고 남성 마초 문화, 그러니까 되게 남자 중학교 느낌이에요. 음담패설하고, 트레이더들끼리 지나가면 여자들 점수 매기고, 이런 거 흔했고요. 심지어 누가 콜옵션 팔다가 몇백억을 날렸어요. 그러니까 사장이 파운딩하고 주먹 날리고… 근데 얼마 뒤 맞은 사람이 임원이 돼 있더라고요. 그걸 또 합의하며 임원시켜준다 한 것 같아요. 직원들끼리 농담으로 ‘한 시간 안에 몇백억 잃으면 임원 될 수 있다’ 이러고…
무너지기 시작한 멘탈, 수십억을 날리고 빚까지 지다
이승환: 제정신으로 살기 힘든 곳이군요(…)
최한철: 네. 제가 있던 동안 옆 건물 트레이딩 회사에선 트레이더가 상사를 총으로 쏜 사건도 있었고, 자살하는 사람도 가끔 발생해요. 어느 순간 저도 정신줄을 놓게 되더라고요. 20대 어린 나이에 돈 많이 벌고 폭력적인 환경에 있다 보니, 매일 술담배에 절어 살게 되더라고요. 물론 환경 탓하는 건 비겁한 거죠. 그 속에서도 절제를 지키는 분들도 있으니까요. 그런데 저는 숙취에 절어서 주먹질하다 유리 깨서 손 박살 나서 수술하고… 진짜 다행인 건 마약은 안 했어요. 그렇게 망가지는 트레이더도 많았거든요.
이승환: 세상에;;; 그래도 돈이라도 많이 벌어 다행이군요;;;
최한철: 그 돈도 다 날렸어요. 3년간 회사에서 받은 보너스와 개인 트레이딩에서 번 돈을 합하면 억 단위가 아니라 10억 단위로 벌었는데, 갑자기 왜 그런지 예전에 잃었던 FX 생각이 났어요. 제 전문성은 옵션이잖아요? 옵션에 영향을 주는 여러 요인들과 복잡한 프라이싱에 대해 잘 알았기 때문에 제가 돈을 번 건데 착각한 거예요. 나는 옵션이 아니라 모든 트레이딩 자체를 잘하는 거다. 내가 예전에 FX로 망했었는데 복수하고 싶다…
이승환: 복수에는 실패했군요.
최한철: FX 트레이딩에서의 손실은 하나의 트리거일 뿐이었어요. 여러 사건들이 줄줄이 터지며 모은 돈을 다 날리고 빚까지 졌어요. 그런데 돌이켜보면 제 스스로가 다 자초한 거에요. 기본적으로 FX를 다시 한 것 자체도 감정적인 결정이었잖아요? 멘탈이 안 좋으니 모든 게 무너지더라고요. 인간관계도 실패하고 트레이딩도 실패하고, 이상한 사업에도 손댔다가 날리고, 또 외적으로도 제가 돈 잘 번다고 하니 주변에서 사기도 좀 당하고… 남은 건 억대 빚밖에 없는 실패한 트레이더였죠. 금리도 한 24% 됐나…
이승환: 대체 어떻게 살아남았습니까;;;
최한철: 답이 안 나오더라고요. 그때 생각했던 게 내 미래를 증권화해 보자. 미래에 내가 벌 돈의 5% 정도를 증권화해서 팔자… 2040년인가? 그때까지 매년 내가 받는 보너스의 5%를 주는 증권을 대가로 빚을 갚아보자. 그래서 주위에 연락을 돌렸는데 당연히 아무도 안 사주죠. 그 당시 멘탈이 아작난 상황이라 인간관계도 엉망이었어요. 그래서 내가 진짜 바닥이구나… 그런 비참함이 있었죠.
이승환: 그 맨날 돈 주던 친구한테는 연락 안 했습니까?
최한철: 그 친구한테는 안 물어봤었어요. 왜냐하면 이미 도움받은 것도 너무 미안했는데, 또 이런 부탁을 할 면목이 없었거든요. 근데 결국은 받아준 사람이 없어서 그 친구한테 말을 꺼내자마자 1억을 송금해줬어요. 제가 이거는 계약이니까 계약서를 쓰고 공증을 받자, 근데 그 친구가 공증도 필요 없다… 그렇게 또 친구 신세로 숨을 좀 쉬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저 도와주느라 신혼 전세집을 분당이 아닌 광교로 잡았더라고요.
이승환: ……
최한철: 정말 인생의 은인입니다… 근데 이때쯤 제가 예전에 홍콩에서 알게 된 교수님이 연락이 왔어요. 본인이 지인들과 좋은 전략을 개발했는데, 헤지펀드를 같이 만들자… 그래서 오케이하고 보스턴으로 갔어요. 근데 알고리즘을 깊게 파고드니 결국 큰 테일 리스크가 숨은 채로 과거 성과만 번지르르했던 전략이었어요.
이승환: 언젠가는 지는 전략이네요?
최한철: 네. 언젠가는 회생 불가능한 손실을 입는 전략이죠. 근데 교수님은 이걸 잘 모르고, 그 전략을 고안했던 중국인 박사를 믿고 있었어요. 저는 중국인 박사가 투자자들에게 제시했던 자료가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고, 고집을 안 꺾었어요. 그렇게 교수님과 대판 싸웠죠. 나중에 교수님이 소리 지르고 난리였죠. 되게 좋은 분이셨는데, 우리는 박사고 너는 일개 학사 아니냐 외치고…
이승환: 근데 그 똑똑한 교수님이 왜 그 문제를 몰랐을까요?
최한철: 트랙 레코드가 좋으니까요. 또 그러니 더 많은 투자자가 몰리죠. 이 똑똑한 사람들이 다 반기니까, 제가 이상해 보일 법도 하고요. 그런데 금융시장에 사기꾼들이 많은 이유가, 안 좋은 전략도 좋은 성적을 낼 수도 있어요. 반대로 아무리 좋은 전략도 일정 시기 동안은 손실을 입을 수 있고요. 결국 뭐 해보지도 못 하고 사직서를 냈죠. 그렇게 제가 그렇게 꿈꾸던 헤지펀드 매니저는 시작도 못 하고 끝났습니다. 제가 사직한 지 3년 후에 결국 XIV 사태가 터지면서 제가 누누이 강조했던 리스크가 터졌죠.
버리지 못했던 미련, 나락에 나락으로 떨어지다
이승환: 이제 뭘 합니까?
최한철: 아, 백수가 된 것도 문제인데… 그때 깨달은 게 생각보다 트레이딩이라는 분야는, 그 분야를 벗어나면 할 게 없더라고요. 트레이딩 기술이 다른 데에는 별로 쓸모가 없어요. 그리고 솔직히 당시 한국은 트레이딩 산업 자체도 없는 수준이었고… 그때는 은사의 그런 모습을 비롯해 미국 생활에 진절머리 나 있기도 해서, 그냥 한국에 돌아갔죠.
이승환: 한국으로 이직을 한 건가요?
최한철: 아니오. 아무 계획 없이 돌아가, 그렇게 그냥 실업자로 한 몇 달을 지냈어요. 2015년였죠. 돈 빌려준 친구가 결혼하며 자기 살던 원룸이 잠깐 뜨니까 그것도 저한테 공짜로 빌려주고… 거기서 여기저기 이력서 쓰고 했습니다. 그런데 한국의 트레이딩 업계는 어두운 면이 많더라고요. 여러 사람 소개를 받았어요. 트레이더다, 슈퍼개미다… 괜찮은 사람들도 있었는데, 외적으로 많이 벌었다는 사람들 문제가 너무 많더라고요. 근데 거기에 제가 또 넘어간 거죠.
이승환: 어떤?
최한철: 제게 연락온 사람이 있었는데, 언론에서 그 사람한테 무슨 중동 국부 펀드가 투자한다 기사 뜨고… 뭐 우리는 영국 헤지펀드인데 홍콩 지사를 저한테 맡기고 싶다… 사실 처음부터 이상했어요. 그걸 아주 몰랐던 건 아닌데… 제가 트레이딩에 미련이 남으니 안 좋은 선택을 하게 된 거죠. 트레이딩에 대한 어리석은 집착과, 홍콩 지사장이라는 감투에 대한 욕심… 감정적인 결정이었죠. 그렇게 또 나락으로 갔어요.
이승환: 아직도 떨어질 곳이 남았나요;;;
최한철: 한창 홍콩까지 가서 몇 개월간 이것저것 셋업하고 사무실도 차렸는데, 월급이 안 나왔어요. 그 대표가 A한테는 B랑 계약됐다 하고, B한테는 A랑 계약했다 하고… 그런 스타일이었죠. 근데 제가 홍콩서 살펴보니 이 사람이 횡령까지 한 것 같았어요. 더 엮이면 큰일 나겠다 싶어서 홍콩 생활 청산하고 또 서울로 왔죠. 그때 막 이케아 가방 들고 홍콩 골목에 중고 모니터 팔고 했던 기억이;;;
데이터과학을 공부하며 화려하게 복귀
이승환: 다시 미국 가서 트레이더 하면 되지 않나요?
최한철: 그때쯤 이미 금융, 특히 트레이딩 쪽은 수학이랑 컴퓨터가 개발자들이 장악한 상태였어요. 전 경영학과 출신이거든요. 커리어도 막다른 길에 몰린 겁니다. 자존감도 무너지고 해서 다시 취업하려면 공부해야지… 부랴부랴 대학원 준비해서 콜롬비아 데이터과학 대학원에 합격합니다. 운이 좋았죠. 그때만 해도 알파고가 나오기 전이라 데이터과학이 별 인기가 없었거든요. 다만 저는 트레이딩 쪽에 있었기에 그 흐름을 얼떨결에 알고 있었던 거죠.
이승환: 대학원 생활은 어땠나요?
최한철: 전화위복이라 생각해요. 제가 앞서 잘 풀렸다면, 적당히 벌다 막다른 길에서 오도가도 못하게 되었을 겁니다. 그런데 재교육을 받을 수 있는 마지막 타이밍인 서른에 커리어가 끊겨 버려서, 반강제적으로 이 악물고 공부하고 나니 제 상황이 너무 좋게 풀리는 거예요. 당시엔 금융 쪽에서 일하다가 데이터과학 쪽으로 전향한 사람들이 아직 드물었어요. 이 둘이 섞이자 굉장한 강점이 되더라고요. 라자드에서 일하다, 켄쇼에서 오퍼를 받아 커리어를 재시작했습니다.
이승환: 켄쇼?
최한철: 네. 인공지능 추론 엔진을 만드는 회사였어요. 다양한 이벤트별로 금융 시장의 움직임을추론하는 엔진이죠. 예로 연준이 금리를 0.5% 올리면, 주식과 채권들이 어떻게 반응할까… 몇 천 가지 상품들의 변화를 보여주는 거죠. 골드만의 애널리스트들이 몇 주 할 거를, AI가 3분 만에 한 걸로 화제가 됐죠. 하버드 물리학 박사들이 창업한 엘리트 집단이었어요. 저는 비록 석사에 불과했고 거기 들어갈 수 있는 역량이 안되었지만, 트레이더 경험이 좋게 작용했습니다. 때마침 켄쇼 내부적으로 헤지펀드를 만들려던 참이어서 제가 운좋게 채용될 수 있었죠.
이승환: 엄청나게 배울 수 있었겠군요.
최한철: 네. 저희 팀 12명 중에 9명이 박사 출신이었고, 엄청나게 지적 자극을 받았습니다. 데이터과학자 업무를 따라가기 위해서 공부도 엄청 했어요. 야간을 이용해 스탠포드에서도 24학점을 듣고, 또 조지아텍 수업도 듣고… 근데 제가 더 똑똑한 박사님들을 따라갈 수 없는 것도 그런데, 새로 오는 스탠포드 MIT 출신 20대 애들도 너무 똑똑한 거예요. 지금 하는 일로 얘네랑 경쟁해도 못 이기겠다… 어떻게 내 장점을 살릴지 고민했죠.
이승환: 샌드위치 상황에서 어떻게 했습니까?
최한철: 제가 당시 대안 데이터 담당 데이터 과학자였어서, 인공위성 데이터, 날씨 데이터 등 여러 가지 대안 데이터들을 많이 접했어요. 그 중 유독 흥미있던 게 인간에 대한 데이터였어요. 사람들이 어디로 걸어 다니는지, 웹에서 어떤 걸 클릭하는지, 건강 생체 데이터 등을 파고들었죠. 그러다 보니 심리학에 관심이 많이 갔어요. 아예 발달심리학 석사과정을 들었죠. 공부해보니 심리학이 굉장히 엄밀한 과학인 거예요. 대중이 생각하는 MBTI 이런 것보다 훨씬 더 깊은 학문이었죠.
이승환: 그래서 심리학과 AI, 금융을 접목하기로 건가요?
최한철: 처음에는 막연한 생각이었어요. 수학이나 물리학을 잘 하기 위한 소양과, 심리학을 잘 하기 위한 소양이 서로 다른데, 저는 문과 출신으로 시작해 이공계로 넘어갔으니 그 중간에서 융합 지점을 찾으면 저만의 니치가 나올 거라 생각했어요. 그러다 neurofinance(신경경제학)라는 분야를 알게 되면서 조금씩 스타트업을 구상했고, 뉴로퓨전이라는 회사를 창업하게 된 거죠.
이 글은 「20대 시절 수십억을 잃고 벌며 깨달은 올바른 투자법: 월가아재 최한철 인터뷰 2」으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