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명량>이 연일 화제다. 마른장마가 지나자마자 영화 한 편이 말의 소나기를 쏟아내고 있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명량>은 각종 기록을 갈아치우고 있다. 최단기간 1천만 관객 돌파에 이어 개봉 18일 만에 역대 최다관객 기록을 갈아치웠다. 이 추세라면 관객 1천5백만이라는 전인미답을 밟게 될 것이라는 예측이 가능하다.
영화에 대한 평도 다양하다. 재미와 감동에 더해 우리 역사의 자부심을 고취하는 진정한 ‘가족영화’라는 찬사가 쏟아지는가 하면, 시대가 요구하는 리더십에 대한 성찰의 계기를 만들었다는 평가도 나온다.
와중에 문화평론가 진중권은 ‘졸작’이라는 혹평을 내놓았고, 일각에서는 대기업의 상영관 싹쓸이에 편승했다거나 애국주의 마케팅을 펴고 있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 어떤 비판도 <명량>의 기세를 누그러뜨리지는 못했다. ‘졸작’론을 편 진중권이 되레 역풍에 휘말렸고, ‘좋은 건 좋다’고 인정하는 비평문화가 필요한 것 아니냐는 의견이 나오기도 했다.
더불어 한 영화에 대한 평가는 단지 영화(기술)적 완성도에 국한돼서는 안 된다는 의견이 대두되기도 했다.
아무려나 올여름 극장가의 화두는 <명량>이며, 화두는 정치권으로 전이되기도 했다. 박근혜 대통령이 문화융성위원회 위원들과 함께 <명량>을 감상한 뒤 청와대대변인이 “민·관·군 협력의 본보기”라는 얼토당토않은 감상평을 내놓으면서 논란을 야기했다.
청와대의 아전인수 감상평에 대한 시민들의 응수는 “진정한 충(忠)은 백성을 향하는 것”이라는 작중 이순신의 대사에 주목하라는 일갈이었다. 혹자는 지난주 방한했던 프란치스코 교황의 리더십과 작중 이순신의 리더십이 닮아 보인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아쉽기는, <명량>에 대한 ‘말폭탄’이 난무하는 와중에 중요한 걸 놓치고 있다는 점이다. 오늘의 글은 영화 <명량>과 관련한 환호와 열광, 혹평과 비판 등 다양한 반응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놓치고 것, 즉 ‘한국형 팩션(faction, fact +fiction)소설’의 저력에 초점을 맞추려 한다.
영화 <명량>은 물론 우리 영화계의 축복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축복은 결코 우연히 나타난 것이 아니다. 기본적으로 감독과 배우, 스텝 등의 창작열의 결과이겠지만 그것만으로는 설명이 부족하다. 영화 <명량>의 탄생 이면에는, 단언컨대 ‘한국형 팩션(faction)소설의 힘’이라는 숨은 공로자가 엄존하고 있는 것이다.
‘성웅 이순신’에서 ‘인간 이순신’으로, <명량>의 뒤를 받쳐준 팩션 <칼의 노래>
<명량>의 미덕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기존의 ‘성웅 이순신’ 이미지를 해체하는 대신 ‘인간 이순신’의 이미지를 성공적으로 형상화했다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무려 한 시간 가까이 이어지는 해전 장면의 완성도라 할 것이다.
후자가 컴퓨터그래픽 등의 기술적 발전을 표상한다면 감동코드는 단연 전자, 즉 ‘인간 이순신’에 힘입은 바 크다고 볼 수 있다. 바로 그 점과 관련해서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가진 것이 바로 한국형 팩션소설의 한 경지를 보여준 김훈의 소설 <칼의 노래>이다.
이즈음 서점가에선 <칼의 노래>(초판 2001, ‘문학동네’ 개정판 2012)가 영화 <명량>의 흥행에 힘입어 새롭게 조명되면서 출간 10여년 만에 다시 베스트셀러 순위에 올랐다는 얘기가 나온다. 어찌 보면 ‘전도’이고, 달리 보면 ‘시너지 효과’인 셈이다.
영화 <명량>이 한국영화계의 벼락같은 축복이라면 소설 <칼의 노래>는 출판계와 문단의 그것이었다. <칼의 노래>의 모토가 바로 ‘영웅 이미지에 고착됐던 20세기의 이순신’을 해체하고 ‘고뇌하는, 인간 이순신’을 21세기의 한국사회로 불러낸 것이었다. 어설프게 표절시비를 하자는 게 아니다.
다만, <명량>과 <칼의 노래>를 따로 떼어놓고 말하기는 쉽지 않다는 얘기다. 그래서다. <칼의 노래>라는 걸출한 소설이 있었기에 영화 <명량>이 가능했다. 뿐만 아니다. <명량> 이전의 선취로 꼽을 만한 것은 또 있다.
김탁환의 동명소설을 원작으로 했던 KBS드라마 <불멸의 이순신> 역시 <칼의 노래>와 마찬가지로 <명량>의 ‘숨은 원작’이었거나 최소한 감독의 영감을 자극했을 것이다.
팩션, 무엇 때문에 이토록 인기인가?
최근의 TV드라마와 영화의 경향을 살펴보면 팩션 열풍이 거세게 휘몰아치고 있음을 단박에 알 수 있다.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으되 그중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한국형 팩션소설이 견실한 독자층을 확보하고 있다는 점일 테다. 대체 한국형 팩션소설이란 어떤 것들이며, 그의 출현이 갖는 역사적 의미는 무엇일까.
팩션과 관련해서 빼놓을 수 없는 책이 있다. 경기대학교 김기봉 교수의 <팩션시대, 영화와 역사를 중매하다>(프로네시스, 2006)이다. 김 교수는 우선 근래 1천만 이상의 관객을 동원했거나 그 언저리에 접근한 한국영화들의 공통점이 대체로 팩션이었다는 점에 주목한다. <왕의 남자>, <태극기 휘날리며>, <실미도>, <웰컴 투 동막골>, <관상>이 그것들이다.
천만 관객은 15세 이상의 인구 가운데 극장에 갈 수 있는 여건이 되는 사람의 약 절반 이상이 영화를 관람했다는 의미이며, 거기엔 남녀노소, 직업, 계층, 지역, 이념 등과 같은 사회적 배경과 관계없이 우리나라 사람들 거의 모두가 위의 영화들을 즐겼다는 것과 같은 말이 된다.
김 교수는 팩트(fact, 사실, 실재)를 강조하는 역사와 픽션(fiction, 허구)의 장르인 영화가 결합하여 우리 인구의 절반을 극장으로 불러 모을 정도로 막강한 힘을 발휘하는 ‘팩션시대’의 의미를 다음의 세 가지 주제로 정리한다.
첫째, ‘국사’라는 이름으로 우리에게 주입되는 매트릭스로서의 역사, 객관성을 바탕으로 한 역사와 상상력을 주입한 사극의 차이, 즉 원본을 복제하는 유사성에서 그 차이를 인정하는 상사성으로의 전환, 또한 교과서 밖의 ‘탈국사적’ 역사교육의 가능성.
이어서 김 교수는 “역사는 문자화되어 텍스트로만 접해야 한다는 낡은 관념, 그리고 권력과 이념의 충돌만이 역사라는 고정 관념을 버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아래로부터의 역사를 구현한 영화들은 오히려 교과서보다 더욱 강렬한 힘으로 우리에게 진정한 역사를, 그 시대의 아픔을 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김 교수가 역사를 소재로 한 영화, 즉 팩션영화에 초점을 맞췄다면 필자는 역사를 소재로 한 소설, 즉 팩션소설에 주목하고자 한다. 마찬가지의 의미에서다. 김기봉 교수 역시 그의 또 다른 저서 <역사들이 속삭인다 : 팩션 열풍과 스토리텔링의 역사>(프로네시스, 2009)에서 밝혔듯이 스토리텔링의 기본형식은 소설이며, 소설이야말로 역사의 대중화, 박제된 역사를 현실로 호출하는 가장 좋은 서사형식이라는 것에 동의할 것이다. 김 교수의 발언을 참고 해보자.
“역사서사와 허구서사는 어느 시대에나 공존하며 인간의 삶을 이야기했다. 따라서 문제는 어느 하나를 다른 것으로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그 차이를 인식하여 생산적인 대화를 함으로써 시너지 효과를 발휘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역사들이 속삭인다> 중에서.)
구스타브 플로베르는 “역사란 대양(大洋)을 마시고 한 줌의 오줌을 싸는 것”이라고 일갈했다. 그만큼 역사를 기술하는 일은 부족하고 미흡했다는 얘기이며, 이제부터 서두른다 해도 실제의 역사적 실재에 비하면 빙산의 일각에 불과할 뿐이라는 얘기일 것이다.
특히 우리는 5천년이라는 장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것에 비해 비약하기 짝이 없는 ‘이야기’를 가졌을 뿐이다. 그래서다. 작금의 팩션 열풍은 결코 우연적으로 찾아온 단기 유행이 아닐 것이다. 그것은 무엇보다 이야기에 굶주린 현실의 반영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기존의 지식과 권력의 틀에 갇혀 있던 역사의 해체를 부르짖는 목소리는 반갑고 의미가 크다.
에코의 <장미의 이름>, 댄 브라운의 <다빈치 코드>에 도전하는 한국 작가들
20세기말 국내 독서시장을 강타했던 소설들은 안타깝게도 우리 소설이 아니라 외국 소설들이었다. 그 중에서도 비상한 관심을 끌었던 건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과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었고, 그것들은 고스란히 팩션의 원조 격으로 자리 매김 됐다.
와중에 우리 문단은 ‘후일담 류(類)’와 서사를 포기한 대신 자의식의 과잉으로 채워진 여성작가들의 작품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박일문의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나 김형경의 <세월>, 공지영의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등이 당시의 우리 소설이었고, 이순원과 윤대녕, 장정일 등이 간헐적으로 독자를 붙잡았을 뿐이었다.
움베르토 에코의 현란함과 밀란 쿤데라의 결코 가볍지 않은 무게감에 짓눌렸던 우리 문단에서 한국형 팩션의 가능성을 엿보인 작가는 뜻밖에도 무라카미 하루키를 ‘혼성모방’했던 것으로 구설수를 탔던 이인화(본명은 류철균, 작품은 <나는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였다.
그의 <영원한 제국>은 최인호의 고군분투(<잃어버린 제국>, <상도>, <유림> 등)와 너무 묵직하게만 흘러가던 대하소설들(조정래, 이문열, 박경리, 황석영, 김주영 등의 대하소설들)에 비해 ‘가벼운 듯 경쾌하고, 짧은 듯 속도감을 더한’ 대중의 눈높이에 맞춘 한국형 팩션의 가능성이자 미래였다.
그러나 국내독서시장의 대세는 이미 외국작가들의 각축장으로 전락했다. 후일담과 과잉된 자의식에 도취해 신음하던 국내 독서시장의 틈새를 집요하게 파고든 세기말적 ‘데카당스’가 무라카미 하루키였다면, 21세기의 불안과 기대가 교차하는 의식의 공터를 날렵하게 장악해 버린 건 댄 브라운의 ‘지적 오락물’이었다.
특히, 댄 브라운의 <다빈치 코드>는 침체를 거듭하던 우리의 독서시장을 일으켜 세우는 공을 세우기도 했다. <다빈치 코드>가 21세기 최초의 밀리언셀러의 반열에 오른 기세를 타고 그의 다른 책들과 그 외 영미권 작가들의 공세가 거세지는 가운데 뜻밖에도 우리 문단에 벼락같은 축복이 나타났다. 김훈의 <칼의 노래>가 그것이었다.
작가 김훈은 여러모로 한국 문단의 충격이었다. 빼어난 문체는 단박에 한글의 아름다움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는 찬사를 불러왔고, 속속 풀어내는 그의 역사소설들은 독자들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현의 노래>에서 다소 머뭇거리는 듯 하더니 이내 <남한산성>으로 완성도를 끌어올렸고, <흑산>으로 주제의 깊이와 폭을 넓혀왔다.
한국형 팩션의 세계를 넓히는 주목할만한 작가들
김훈이 단문의 아름다움과 묵직한 주제의식으로 독자를 끌어들였다면 세태적인 감성을 잘 녹여내면서 경쾌하고 치밀한 사서로 독자를 옭아맨 이는 이정명과 조두진이었다.
이미 영화와 드라마로 확인됐듯 탄탄한 스토리텔링의 노하우를 인정받고 있는 이정명은 <뿌리 깊은 나무>와 <바람의 화원>으로 일약 한국팩션의 대표주자의 이미지를 굳힌 데다 <별을 스치는 바람>과 <찬국의 소년> 등 꾸준한 작품 활동으로 기대감을 키우고 있다.
조두진 역시 만만지 않은 스토리텔링 능력을 보여주고 있다. 한겨레문학상을 수상한 <도모유키>가 독특한 시점으로 주목받았다면 <능소화>와 <북성로의 밤>은 예의 시적 문체와 풍부한 감성을 무기로 독자들의 시선을 끌기에 부족함이 없다.
소품처럼 보이긴 하지만 안소영의 <책만 보는 바보>와 <다산의 아버님께> 또한 아기자기한 재미를 담은 팩션으로 읽을 만하다.
앞서 거론한 작가들이 주로 팩션을 써왔다면 나날이 소설문학의 지평을 넓혀가며 장취성을 입증하고 있는 작가로 김연수를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그의 출세작이기도 한 <굳빠이, 이상>은 이상과 관련한 다양한 자료를 꼼꼼하게 갈무리한 데다 치열한 취재정신이 돋보이는 수작이었다. 이어지는 그의 <밤은 노래한다>는 넓은 의미에서 팩션으로 분류될 만하다.
일일이 거론하지 못하는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서 이름만이라도 거론하고싶은 작가들이 많다. 성실함의 대명사 김탁환(<불멸의 이순신>, <방각본 살인사건>, <리심> 등)과 새로운 문법의 팩션을 기대하게 하는 김별아(<미실>, <채홍> 등), 시인이자 소설가인 김선우(<나는 춤이다>), 장용민(<건축무한육면각체의 비밀1,2>) 등이 팩션의 자장을 넓혀줄 작가군이라 할 것이다.
팩션이라는 장르에 가두기엔 뭣하지만 저 멀리 떨어져 있던 역사라는 소굴에서 부단히 이야기의 실을 뽑아내고 있는 이덕일(<그 위대한 전쟁>,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 <윤휴와 침묵의 제국>, <조선왕 독살사건> 등)과 정민(<미쳐야 미친다>, <삶을 바꾼 만남> 등)의 수고는 소중하고도 고맙기만 하다.
한국형 ‘팩션’베스트10
1. 김훈 <칼의 노래>
2. 김연수 <굳빠이, 이상>
3. 이인화 <영원한 제국>(작가의 다른 책 <하비로>)
4. 이정명 <바람의 화원>(작가의 다른 책 <뿌리 깊은 나무>)
5. 김훈 <남한산성>(작가의 다른 책 <흑산>)
6. 조두진 <도모유키>(작가의 다른 책 <능소화>)
7. 김탁환 <방각본 살인사건>
8. 김별아 <미실>
9. 최인호 <유림>
10. 장용민 <건축무한육면각체의 비밀1,2>
언제나 필독서 <역사란 무엇인가>
한편, 20세기의 진보적 역사관을 선도했던 E. H.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를 넘어 새로운 역사서술의 시대를 열어야 한다는 주장을 담은 데이비드 케너다인의 <굿바이 E. H. 카>(푸른역사, 2005)를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역사란 무엇인가?>의 탄생 40주년을 기념해 런던역사연구소가 주최한 심포지엄의 내용을 정리한 <굿바이 E. H. 카>는 <역사란 무엇인가?>가 역사학계와 학문 전 분야에 얼마나 큰 영향을 끼쳤는지를 새삼 확인하면서 동시에 현재의 역사학이 처한 현실과 과제를 들여다보고 있다. 카는 역사의 지평선이 확장될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있었고 그 믿음은 속속 증명되었다.
특히 카의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끝없는 상호작용(대화)”이라는 명제로 압축되는 카의 역사관은 곧 “역사의 진보성에 대한 믿음, 즉 역사는 이성을 통한 진보의 과정”이라는 말이 된다. 그러나 카의 그러한 명쾌한 논리도 세월 앞에서는 어쩔 도리가 없나 보다.
카의 역사관을 극복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도처에서 들리기 시작했고 어느덧 그 역시 해체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그 이유는 첫째, 카는 역사의 과학성에 집착하는데, 포스트모던시대의 역사에서는 과학성보다는 문학성이 더 주목받고 있다. 역사의 수사적 서술구조가 문제의 핵심으로 등장하면서 역사도 하나의 문화적 텍스트이며, 그것을 지배하는 코드를 읽어내는 것이 중요하다는 주장이 팽배해진 것이다.
둘째, 카의 책(혹은 역사관) 역시 하나의 ‘담론’으로서 포스트모던 시대의 해체의 대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카의 대화(과거와 현재의)는 지식/권력 관계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방적인 대화이며, 그러므로 카의 역사는 과거를 지식/권력 체계 안에서 전유하는 것이 되고, 과거는 그 해석 안에서 부단히 타자화 될 수밖에 없다.
카는 ‘진보’와 ‘객관성’을 이용하고 있는데, 진보는 오히려 서구중심적 산업화와 지식의 팽창을 의미할 뿐이며 따라서 해체되어야 할 지식/권력 담론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제 역사는 더욱 세분화되고 전문화되어 저마다의 분야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제 역할과 기능을 다하고 있다. 이른바 ‘미시사’라 일컬어지는 세분화된 역사학은 사회사, 정치사, 여성사, 문화사 등의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아울러 역사학은 미디어와의 밀월을 통해 새로운 돌파구를 찾고 있기도 하다. 그것이 바로 팩션이라는 돌파구일 것이다.
제2, 제3의 <명량>이 출현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그를 위한 전제이자 기초로서 한국형 팩션소설의 활약과 발전을 기대해 본다. 바라기는 김훈과 이인화, 이정명의 뒤를 걸출한 팩션 작가들의 출현을 기대해 본다.
원문: 대안미디어 너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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