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학평론가 조영일 씨가 쓴 『마쓰모토 세이초 걸작 단편 컬렉션』(북스피어)의 해설을 편집한 글입니다.
1. ‘세이초 공방설’과 그 진위에 대하여
미스터리, 시대소설, 현대사, 고대사… 한 사람의 두뇌에서 이렇게 폭넓고 깊이 있는 작업이 동시에 이루어질 수 있을까? 그것은 누구라도 쉬 믿지 못할 모습이었다. 그래서 유령 작가가 따로 있다느니 집필 공방이 있다느니 하는 풍문이 나돌았으리라.
- 후지 야스에(藤井康栄, 마쓰모토 세이초 기념관 관장)
일본 근대 문학사를 읽다 보면 히라바야시 다이코(平林たい子)라는 작가를 만난다. 1905년생인 그녀는 프롤레타리아 문학가로 출발했지만 패전 후 보수적 반공주의자가 되었는데 아마도 이런 정치적 입장은 당시 왕래가 매우 어렵던 시절에 한국을 방문할 수 있는 특권을 가지게 했을 것이다.
1962년 5월 18일, 그녀는 당시 남한 문단의 대표자라 할 수 있는 김동리와 대담한다. 사실상 사회를 본 평론가 여석기를 포함하여 삼자 형태를 띠었다. 지금과 다르게 해방 후 양국문단은 이렇다 할 교류가 전혀 없었던 터라 다소 일반적인 이야기만 오갈 수밖에 없는, 쉽게 말해 명백한 한계가 있는 좌담이었다. 따라서 지금 읽어보면 너무 소박하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그러나 이 좌담을 무턱대고 무시할 수 없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부분이 잠깐 등장하기 때문이다. 어찌어찌하다 여석기가 일본 작가들의 생활(경제적 기반)에 대해 묻자 평소 순문학 작가임을 자랑으로 여기는 히라바야시가 자국의 유행 작가(대중 작가)를 대놓고 폄훼하는 그 부분이다.
글쎄요. 그런 작가는 사고라는 게 없습니다. 아침부터 밤까지 쓰고 있는데 몇 명의 비서를 채용해서 자료를 모아오게 해 가지고는 그 자료를 가지고 쓸 뿐이죠. 그렇기 때문에 예를 들어 마쓰모토 세이초(松本清張) 같은 작가는 상당히 반미(反美)인데요. 그 이유가 자기 비서 중에 공산주의자가 있어요. 그런 것이 있기 때문에 그런 자료를 모아 가지고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쓰모토라고 하면 인간이 아니라 ‘타이프라이터(타자기)’입니다.
- 「한일 문학을 말한다」, 《사상계》, 1962년 8월호
흥미롭게도 이 대담은 정작 이 대담이 행해진 한국이 아니라(당시 세이초를 아는 사람이 한국에는 거의 없었을 것이기 때문에) 일본에서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고 한다. 그녀의 말은 사실상 ‘세이초 공방설’에 대한 공식적인 제기라 할 수 있는데 따지고 보면 그런 소문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가 보여준 엄청난 작업량은 ‘그가 지하실에 여러 명의 견습 작가를 두고 그들이 쓴 책을 세이초라는 이름으로 출판한다’는 추측을 낳았다. 결국 사실이 아닌 것으로 판명되었다. 즉 도와주는 사람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어디까지나 출판사의 담당 편집자 1명 정도에 지나지 않았으며 그 정도는 상당수의 작가들도 이미 받고 있는 어시스턴스에 불과했다.
따라서 히라바야시가 세이초를 인간이 아니라 ‘타자기’라고까지 부른 것은 소문에 기대어 그녀가 이전부터 가지고 있었던 ‘어떤 적개심’을 표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세이초 공방설’이 불거지자 후지 야스에는 세이초의 친필 원고를 공개하여 이를 둘러싼 의혹을 불식시키기도 했다.
2. 데뷔 이후 그가 쓴 작품의 양은 어느 정도인가
사실 나는 처음에 추리소설이란 말을 들었을 때부터 좀처럼 구미에 당기질 않았다. 추리소설이라고 하면 에도가와 란포라든가 요코미노 세이시 등의 작품을 전쟁 전에 몇 편 읽은 적이 있지만, 솔직히 말해 탐정소설은 멍청한 수수께끼 유희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 어디에 인생이 있단 말인가.
이것이 마쓰모토 세이초를 읽기 전까지의 나의 추리소설관이었다.
그러나 마쓰모토 세이초의 소설은 수수께끼 놀이 같은 단순히 알리바이 무너뜨리기가 아니었다. 추리소설에 대해 내가 품고 있었던 기존의 ‘편견’을 완벽하게 뒤집어 놓은 것이다. 나는 당장에 네리마의 안쪽 깊숙한 곳에 자리하고 있는 세이초의 집으로 찾아갔다.
“부끄러운 말씀이지만 저는 추리소설이라고는 에도가와 란포의 소년 탐정단 같은 소설을 읽은 게 다입니다. 선생님의 작품을 정독하고 보니 눈이 확 트이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래서 말입니다만, 『점과 선』을 다른 출판사에서 출간할 계획이 있으신지요?” 아직 없다는 세이초 씨. 그렇다면 하고 운을 떼자, 세이초 씨는 두껍고 붉은 입술에 온화하고 친근한 미소를 띠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고분샤에서 출판해 준다면 인세는 필요 없습니다.” 나는 그의 소박함에 놀라고 기가 막히고, 그리고 반해 버렸다.
당시에는 두세 신문사에서 주간지가 발행하고 있을 뿐 지금처럼 많은 출판사에서 주간지를 발행하고 있지는 않았다. 신인 작가 마쓰모토 세이초도 작품을 발표할 기회가 적은 것을 내심 한탄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는 아사히신문사의 광고부에 적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고분샤가 작은 출판사임에도 대대적으로 신문광고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일찍부터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이 출판사에서 책을 내서 빨리 저 넓은 세상으로 나가자. 그는 그 나름대로 도박을 한 것일 게다. 실제로 아쿠타가와 상을 탄 것으로는 그다지 주문이 없던 모양이었다. 『점과 선』에 이어 《주간 요미우리》에 연재된 『눈의 벽』 역시 큰 어려움 없이 고분샤에서 출판할 수 있었다.
나는 이 두 권을 광고하기 위해 《아사히신문》에 당시에는 흔치 않던 5단 통 광고를 게재했다. 드디어 마쓰모토 세이초의 존재가 부각되었다.
- 간키 하루오 지음, 문연주 옮김, 『출판천재 간키 하루오』, 커뮤니케이션북스
1957년에 세이초는 『얼굴』이라는 작품집으로 지금의 일본추리작가협회상인 일본탐정작가클럽상을 받고 그 이듬해 『눈의 벽』과 『점과 선』을 출간하여 폭발적인 반향을 일으키며 소위 사회파 추리소설의 시대를 연다. 그리고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엄청난 양의 작품을 쏟아낸다.
실제 그의 작품을 일별하다 보면 이게 인간인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산술적으로만 계산해도 작가 생활 40년 동안 그가 발표한 작품은 에세이 등을 포함해 약 980편, 출간한 저서만 편저를 포함해 약 750권이다. 원고지로 약 24만 매다. 300쪽짜리 장편소설이 평균 1,000매 정도니 약 240권 정도라는 이야기다. 소설만 놓고 보면 중·단편은 약 350편, 장편만 약 100편을 남겼다. 한 작품 당 등장인물의 수를 평균 4명으로만 잡아도 2,000명에 육박한다.
우리는 세이초를 보통 추리소설가로 받아들이지만 그가 뛰어난 논픽션작가이자 역사가, 그리고 고고학자이기도 했다는 점을 잊을 수 없다. 정말이지 ‘문호’라는 칭호가 어색하지 않은 인물이라 하겠다. 그의 살인적인 작업양은 종종 인구에 회자되는데 한참 전성기에는 연재물을 무려 10개나 동시에 진행했다고 한다. 신문 2개, 주간지 3개, 월간지 5개. 일반적으로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양이다.
3. 세이초는 왜 그렇게 엄청난 양의 작품을 썼을까
조원식: 선생님께서 사람을 처음 만나실 때 항상 출신 대학이 아니라 무엇을 아는지 무엇을 공부했는지를 물으시고 그에 따라 사람을 대하셨다는 점도 지금 말씀하신 평등한 사고방식과 관계가 있을까요?
후지: 네. 한 사람 한 사람 그 사람과 성실하게 대화하고 있는 느낌이고, 학력이나 지위는 아무것도 아니었어요. 그러니까 평범한 시정 사람이라도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을 아주 좋아하셨어요. 기술자처럼.
김홍민: 도쿄 대학 출신이라도 선생님 보시기에 공부를 포기한 사람이다 싶으면 인정사정없으셨다는데.
후지: 맞아요. 선생님도 여건이 허락했다면 그런 코스를 밟았을 정도의 머리가 있었으니까요. 기껏 좋은 대학에 갔는데 왜 공부하지 않냐, 졸업해서 취직하면 그걸로 끝이냐, 그게 말이 되냐고 생각하고 계셨을 거예요. 그러니까 대학에서 뭘 공부했냐고 물어서 프랑스 문학이라든가 독일 문학이라고 대답하면, 또 선생님은 거기에 대해 지식이 있으니까 끈질기게 질문하시는 거예요. 졸업 논문으로 이런 걸 썼다고 대답해도, 결국 선생님의 날카로운 질문 공세에 꼼짝 못 하죠.
보통은 그랬어요. 문답이 불가능해질 때까지 몰아붙이는 일이 자주 있었어요. 저흰 옆에서 보면서 너무 엄하다고 생각했지만, 그 정도로 성실하신 거죠. 프랑스 문학을 전공했으면서 왜 이런 걸 모르냐고 궁금하신 게 아니었을까요? 그러니까 끝까지 따지는 거예요, 아이처럼 순수하게. 못살게 군다기보다 당신이 알고 싶은 마음에. 아이 같아요. ‘왜? 왜?’라고 하잖아요, 아이는.
- 후지 야스에 인터뷰(질문자: 김경남, 조원식, 김홍민)
일본에서도 그의 작업량은 일종의 수수께끼다. 즉 무엇이 그로 하여금 그토록 쓰도록 만들었는지 관해서는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간다. 혹자는 돈독이 올랐기 때문이라고 한다. 확실히 그는 인기 작가였고 그로 인해 엄청난 돈을 번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1969년에 이미 누적판매 부수만 1,000만 권을 넘어섰으며 오랫동안 작가수입 랭킹 1위를 고수했다.
여기서 작가 수입 랭킹 운운한 것은 세이초가 얼마나 대중적으로 인기가 있었는지 증명하기 위함도, 또 그가 얼마나 많은 돈을 벌었는지 설명하기 위함도 아니다. 도리어 이미 충분히 벌었음에도 왜 그토록 엄청난 작업량을 소화하는 힘든 생활을 마다하지 않았는지에 있다.
이때 자주 이야기하는 것이 소위 ‘세이초 콤플렉스’다. 이는 그의 과거에서 현재의 맹아를 찾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사실 모든 것을 그런 식으로 환원시키는 것은 분명 무리가 있다. 하지만 적어도 세이초의 경우만큼은 그런 유혹에 빠지고 싶은 것도 사실이다. ‘세이초 콤플렉스’란 넓게 보면 그를 힘들게 한 생활환경, 좁게 보면 보잘것없는 학력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간주한다. 그는 소학교밖에 졸업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후 대작가가 되었을 뿐 아니라 역사가로서 아카데미와 정면으로 대결하여 종국에는 그들로부터 일정 정도의 인정을 얻어내기도 했다. 실제 그는 일본에서 학력이라는 매우 두꺼운 장벽을 뛰어넘은 입지전적인 작가로 평가받고 있기도 한다. 예나 지금이나 문학계는 고학력자가 득실거리는 세계이다. 특히 한국의 경우는 거의 예외가 없다. 그에 비해 일본은 그나마 예외가 많은 편이다. 미야베 미유키(宮部みゆき)부터 고졸 학력의 소유자로 대학 따위는 구경도 해본 적이 없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런 것이다. 정말 세이초는 ‘학력 콤플렉스’ 같은 것을 가지고 있었던 것일까? 사실 그와 같은 처지에서 열등감 내지 콤플렉스를 느끼지 않았다면 그게 더 이상할 것이다. 그의 고백에 따르면, 그중에서 특히 지방 신문사를 찾아갔다가 “신문기자가 되려면 대학 정도는 나와야 한다”며 실소를 당한 것이 아마도 결정적이었던 것 같다.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그의 방대한 작업을 단순히 ‘학력 콤플렉스’로 환원시키는 것에는 분명 문제가 있다. 그에게 콤플렉스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적어도 그는 그것을 객관화시킬 줄 알았다. 예컨대 세이초는 어느 에세이에서 ‘학력에 의한 차별’, 그리고 사실상 그것이 낳은 ‘학력 콤플렉스’가 사회 전체에 만연해 있다는 것을 깨닫고 도리어 평안함을 느꼈다고 고백한다.
아사히(朝日)에 들어가자 학력에 의한 차별대우를 분명히 보게 되었다. 현재는 없어졌지만, 전전(戰前)의 아사히신문에는 사원 신분으로 세 계급이 있어 사원, 준사원, 임시직원으로 나뉘었다. 대체로 임시직원은 소학교나 중학교 졸업자, 준사원은 전문학교 졸업자, 사원은 대학 졸업자였던 것 같다. 준사원 이상과 임시직원은 매사 대우가 달랐는데, 예를 들어 월급날이 달랐고 강당에서 사원집회를 할 때도 임시직원은 참석할 수가 없었다.
중졸의 젊은 임시직원은 비분강개했다. 이곳에서 중졸자들이 대졸자에 대해 갖는 그런 의식이 내가 그들(중학교 진학자)에게 가지고 있었던 열등감과 큰 차이가 없음을 알았다. 계속해서 전문학교졸은 대졸자에게, 사립대 졸업자는 도쿄대 졸업자에게 각기 열등감 같은 것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다소 마음이 평안해졌다.
이런 평안함이 곧바로 ‘극복’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극복을 위해서는 좀 더 적극적인 무언가가 필요했다. 세이초는 자신은 원래 교훈적인 문장을 쓰는 것을 싫어하며, 또 스스로도 열등감에서 완전히 벗어났다고 말하기 힘들지만, 중요한 것은 학력이 아니며,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런 차별에 결코 져서는 안 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사정이 이러하다면, 문호 세이초의 작업을 단순히 ‘학력 콤플렉스’로 환원하는 것에 무리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차라리 그것을 그 같은 열등감과 암울한 환경 속에서 얻은 어떤 낙천성과 왕성한 호기심(앎에 대한 갈구)에서 찾는 것이 훨씬 더 설득력이 있을 것이다.
4. 세이초는 사회파 미스터리의 대가로 알려졌지만 데뷔작은 순문학이라던데?
이 장 제목을 ‘출발점’이라고 정한 이상 여기에는 마땅히 「사이고사쓰」를 넣어야겠지만 감히 그것을 제쳐 놓고 다른 작품을 택했습니다. 왜냐하면 이 작품이 제 28회 아쿠타가와상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마쓰모토 세이초 씨는 아쿠타가와상 수상 작가였습니다. 나오키상이 아닙니다. 사회파 추리 작가라는 간판이 너무 압도적이라 이 사실을 깜빡 잊어버리기가 쉽지만요.
- 마쓰모트 세이초 지음, 미야베 미유키 편집, 『마쓰모토 세이초 걸작 단편 컬렉션』, 미야베 미유키의 해제 中, 북스피어
1950년 《주간 아사히》는 ‘백만 인의 소설’이라는 문예 공모를 실시한다. 바로 여기에 투고하기 위해 세이초는 느닷없이 소설을 쓸 생각을 하는데 문학에 큰 뜻을 품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그저 가계에 보탬 될 돈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물론 거기에는 생활의 고통으로부터 도피하고 싶은 의도도 있었다.
그렇게 해서 어렵게 쓴 소설이 바로 「사이고사쓰」로 이 작품은 3등으로 입선, 이례적으로 나오키상 후보에까지 오른다. 결국 수상에는 실패했지만 몇몇 심사위원에 눈에 들어 큰 격려를 받는다. 이때 그의 나이는 41살이었다.
이어 나오키상 심사위원이었던 기기 다카타로(木々高太郞)의 권유로 《미타 문학》에 두 편의 소설을 발표한다. 그중 하나가 다음 해 나오키상 후보에 오른 「어느 「고쿠라일기」 전」이다. 그러나 어찌 된 일인지 이 작품은 아쿠타가와상 후보로 바뀌고 놀랍게도 제28회 아쿠타가와상을 수상하기에 이른다. 어두운 반생을 보낸 중년의 마쓰모토가 죽고 이후 일본국민의 사랑을 받은 추리소설의 대가 세이초가 탄생하는 순간이다.
5. 세이초는 왜 자신의 인생에 대해 얘기하기를 꺼렸을까
몰라서 그렇지 저자의 원고가 늦으면 늦을수록 편집자의 수명은 단축된다. 대체로 언론계 출신 저자들이 늦다. 출판사의 생리를 훤히 알고 있는 통에 마감 날짜를 속이지도 못한다. 한마디로 거짓말이 통하지 않는다. 원고가 늦기로는 마쓰모토 세이초도 유명하다. 그가 쓴 소설 시리즈의 후반부를 내가 맡게 됐다. 신문에 연재했던 글이라 원고는 이미 다 나온 상태였다. 교정쇄를 보내주면 고치겠다고 해서 교정쇄를 들고 찾아갔다.
언제쯤 나올지 물었다. 힐끔 노려보더니 한 달 후에 연락하라는 것이었다. 조심스럽게 한 달 후에 전화했다. 다 되어 있을 리 없었다. 매달 정해진 날에 자택까지 가지러 오라는 것이었다. 하는 수 없었다. 아무 기대하지 않고 매달 찾아가 1년 후에야 겨우 받았다. 그런데 또 그 교정쇄가 문제였다. 손댄 부분이 너무 많았다. 당시는 활판이었던 탓에 1년이나 잠들어 있던 활자에 곰팡이가 피고 말았다. 결국 판을 다시 짰다.
- 와시오 겐야 지음, 김성민 옮김, 『편집이란 어떤 일인가』, 한국출판마케팅회의
나는 자신에 대해서는 거의 쓰지 않았다. 소위 사소설이라는 것이 내 체질과 맞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 소재는 가구(假構)의 세계로 새롭게 만든다. 그쪽이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이나 감정이 강조된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소설의 본도(本道)라는 생각이 든다. 독자적인 사소설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나의 길과는 다르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나는 사소설 같은 것을 2, 3편 썼다. 그러나 결국은 위와 같은 생각을 확인한 결과밖에 되지 않았다.
- 마쓰모토 세이초 지음, 『반생의 기록』
세이초가 자신에 대해 말을 아꼈던 것은 어두운 과거를 은폐하기 위함이라기보다는 자신보다 사회에 더 관심이 많았기 때문이다. 좀 더 직접적으로 말하면 자신(근대문학이 만든 환영이기도 한 내면)을 탐구하는 것보다 역사나 사회를 탐구하는 것이 재미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크게 두 가지다. 첫째, 그가 자신의 과거와 자신의 작품을 연결하여 이해하는 것에 저항하고 있다. 이는 최근의 문학이론(텍스트론)에서는 상식이 된 지 오래지만 현실적으로 그런 식의 연구가 여전히 대세라는 점에는 변함이 없다.
둘째, 세이초가 그토록 방대한 작업량을 소화한 것은 돈 때문이라기보다는 순전히 재미 때문이라는 것이다. 즉 그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작업을 한 것이 아니라(우리는 보통 ‘문학자’라고 하면 이런 이미지를 떠올릴 것이다), 호기심이 가득 찬 눈으로 자료를 읽고 나름대로 이야기를 구축해갔던 것이다.
세이초 문학을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점 중 하나는 이것이다. 사실 『반생의 기록』은 세이초의 어두운 이미지 구축에 큰 역할을 했다. 하지만 정작 그 자신은 그것이 매우 못마땅했던 것 같다. 그로 인해 자신의 작업이 전부 그 같은 이미지로 환원되고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세이초가 자전적인 작품이 영상화되는 것을 꺼려한 것도 이와 관련있다.
그러므로 오랫동안 세이초의 담당 편집자였고 지금은 마쓰모토 세이초 기념관 관장인 후지 야스에의 지적은 주목할 가치가 있다. 그녀는 『반생의 기록』에 담긴 자전적 내용을 점검하면서 그곳에 담기지 않은 그의 다른 면, 즉 소년처럼 호기심이 왕성하고 매우 낙천적이었던 세이초의 모습을 부각시킨다. 그런 의미에서 그녀가 『반생의 기록』을 문자 그대로 이해하는 경향에 대해 우려를 표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그렇다면 『반생의 기록』은 허구인가? 그렇지는 않다. 내가 생각하기에 거기에 쓰인 것은 하나같이 사실이다. 그렇다면 후지이가 제시하는 ‘낙천적이고 명랑한 세이초’는 어떻게 되는가? 그녀는 이를 ‘모순’으로 표현하지만 딱히 모순이라고 할 것까지도 없다. 두 가지 면 모두가 세이초라는 인간의 본모습이다. 즉 그의 낙천성은 그가 생활인으로서 겪은 어두운 인생 경험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