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혹성탈출> 시리즈는 시대상을 반영하는 아주 훌륭한 예술작품이다.
원래 SF가 원작인데 원작 소설은 인간과 유인원의 입장이 뒤바뀐다면 어떨까? 라는 아이디어를 제공했고, 영화는 이 원작을 그 시대에 어울리는 형태로 변주해냈다.
우선 찰턴 헤스턴 주연의 1968년 오리지널 <혹성탈출>에서는 이 아이디어에다가 끝없이 극단으로 치닫던 이념대립으로 인류의 멸절을 유발할 핵전쟁을 각오해야 했던 당시 동서냉전과 핵대결 시대의 모습을 새로운 반전과 함께 곁들임으로서 대성공을 거두었다. 덕분에 이후 3편의 연작을 만들어내기에 이른다.
2011년의 리메이크인 <혹성탈출의 시작>은 유전자 조작이든 뭐든 잠재적 위험성은 미뤄두고 돈만 되면 다 하려는 자본의 탐욕이 설치는 시대상을 반영했다. 특기할 것은 이 영화에는 오리지널 혹성탈출 같은 반전이 없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영화는 성공했다. 왜냐면 관객들이 바로 그 끝없는 자본의 탐욕 때문에 개작살이 난 경제를 실시간으로 체험하고 있었으니까.
팀버튼의 2001년 작품이 평을 못받는 이유는 반전은 있는데 시대가 없다는 점이다. 2001년 작품에서 볼 거는 팀 로스와 헬레나 본햄카터의 연기, 그리고 에스텔라 워렌 뿐.
어쨌거나 68년의 원작시리즈와 2011년 이후의 시리즈 모두 종말론적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 그것도 졸라 최악의 종말론이다. 그냥 인류멸종이면 차라리 깔끔하다. 죄다 죽으면 그냥 끝이니까. 근데 이건 멸종보다 더 굴욕적이다. 자기들보다 하등하다 여기던 유인원의 노예가 되는 결말이니, 차라리 인류 멸종이 낫다 싶을 정도다. 하지만 그만큼 참신하고 인상적이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이렇게 인류가 자기들이 무시하거나 멸시하던 뭔가의 노예가 된다는 설정은 이후 많은 영화들에 영감을 줬다고 볼 수 있다. 대개는 유인원 자리에 로봇이나 인공지능을 넣는 경우가 많다. 그니까 터미네이터, 매트릭스 모두 68년 혹성탈출의 후손인 셈이다. 인류 멸종의 계기도 의미심장하다. 앞서 언급했듯, 68년작은 핵전쟁을 원인으로, 2011년작은 생명공학과 유전자조작을 원인으로 삼았는데 모두 그 시대의 화두였던 것들이다.
그리고 이제 올해 개봉한 <혹성탈출: 반란의 서막>을 보자.
이건 일단 시작된 인류의 멸망이 진행되어 가는 과정을 다루는데, 몇가지는 낚시다. 무엇보다도 포스터에 나오는 시저가 총들고 설치는 장면, 안 나온다. 밀리터리 매니아의 입장에서 요 총기 관련 부분들을 언급할 필요가 있다.
이 영화 속 주인공 시저는 마치 회교근본주의자처럼 행동한다. (충분히 주변에서 조달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인류의 무기 뿐만 아니라 심지어 인간이 쓰던 도구도 사용하지 않는다. 마치 유인원 고유의 삶의 방식을 지켜려는 듯, 거주지도 순수 자연주의, 무기도 자연주의다. 그러니까 총 쓰면 쉽게 잡을 수 있는 사슴들도 힘들고 위험하게 잡는다. 21세기 도시 근교의 숲속에서 이러고 있으니까 마치 무슨 원주민 코스프레 하는 것 같기도 하다.
도대체 왜? 그걸 알 수가 없다. 인류와는 구별되는, 유인원 고유의 지속가능한 진보를 찾는 거라고 봐야 할까?
더 놀라운 건, 그렇게 자연주의 도구만 쓰던 유인원들에게 총이 쥐어지니까 너무 쉽고 능숙하게 총을 다룬다는 거다. 코바는 미니미 아킴보를 시전하고. 나머지 유인원들도 말타고 달리면서 원거리에서 한손으로 소총을 완전자동으로 쏘는데 죄다 면표적에 집중된다. 쉽게 말해서 사람보다 잘 쏜다. 아무리 침팬지 근력이 성인보다 3배 이상 강하다 해도 이게 근력만 가지고 되는 거라고 봐야 하나? 심지어 시저 아들이 총 다루는 걸 보니까 방아쇠 훈련도 철저하더라. 사격하지 않을때는 방아쇠에 손가락 걸지 않기를 잘 지키고 있다. 우리나라 액션영화에서조차 잘 지켜지지 않는 원칙인데 말이다.
어쨌든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자. 이번 혹성탈출2편은 남북관계를 떠올리게 한다. 이번 편의 줄거리를 간단히 요약하면 이러하다.
시저가 인간과 상호불가침 조약을 체결하고 그 댓가로 전력(정확히는 인간이 스스로 발전시설을 작동할 기회)을 제공하는데, 이걸 본 코바가 인간에게 퍼준다고 시저는 유인원편이 아니라 인간편이며 인간 2중대이고 종인주의자라고 공격하면서 군사반란을 일으키는 이야기.
즉, 이번 편은 유인원 내부의 파국적인 이념대립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시저와 코바는 정확히 우리나라에 존재하는 두 입장과 일치한다.
우선 코바, 그는 주전론자다. 그를 움직이는 동기는 인류에 대한 분노와 증오다. 그는 유인원의 정체성을 정의할 때도 인간을 증오하는지의 여부로 결정하는 것으로 보인다. 인간을 미워하지 않으면 유인원 아니라는 거다. 우리나라의 극우들도 거의 같은 입장다. 그네들은 북한을 미워해야 자유민주주의자라고 주장한다. 그래놓고 5.16이나 12.12가 뭐냐고 질문하면 머뭇머뭇하고 말이지…
내 보기에 코바는 우리나라 극우보다 오히려 더 낫다. 코바는 진짜 전쟁을 할 각오가 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정말로 잘 싸운다는 점 말이다. 역시 다시 그의 미니미 아킴보를 떠올려보자. 아, 여포처럼 광전사처럼 종횡무진 달리며 전황을 뒤바꾸던 코바여.
근데 어째서인지 우리나라 극우들은 전쟁나면 다 도망갈 거 같다. 혹여 남아서 싸우더라도 삽질만 할 것 같다. 왜냐하면 그네들이 너무 이념만 강조하는 거 같거든. 게다가 그 이념이라는게 결국은 북한에 대한 증오심에 불과하다. 최근에 국방부에서 실시하는 초등학생 대상 이념교육 내용이 보도되었는데, 그 내용이 가관이다. 북한 정권의 잔학성을 가르친다면서 온갖 고문장면을 PT로 보여준 거다.
우리 어릴 때 이승복 어린이가 어떻게 잔인하게 죽었는지를 사진이나 그림으로 보여주던 이념교육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은 이 구태의연함이라니.. 이건 이념교육이 아니라 그냥 스너프고, 그네들이 한 짓은 미성년자 관람불가물을 미성년 초등학생들에게 보여준 거다. 더 따지자면 이승복 어린이의 죽음에 대한 책임은 사실 국가에게 있다. 휴전선 경계에 실패했기 때문에 발생한 민간인 희생이었으니까. 근데 반공교육에서는 국방부 책임은 쏙 빠지고 북한에 대한 증오만 강조했다. 최근 천안함 사건도 마찬가지 아니던가? 난 해군이 북한의 그 버블어뢰에 대응하기 위한 무슨 준비를 한다는 소식을 전혀 들은 바가 없다.
어쨌든 이런 미성년자보호를 위반하고 공연윤리도 위반하면서 저런 끔찍한 짓을 하는 이유는 북한에 대한 증오심을 키워야지 국방이 튼튼해진다는 믿음 때문이다. 근데 그건 정말로 틀린 생각이다.
이념을 정신적 요소, 훈련과 장비를 비롯한 나머지를 물질적 요소라고 할 때, 군인에게 필요한 이념은 자기 가족 공동체에 대한 애정과 믿음, 그리고 희망이다. 그게 내가 왜 여기서 이 고생을 하는지를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이유가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동과 청소년에겐? 자유를 마음껏 누리면서 자유의 중요성을 체득하게 하는거다. 이게 국가 할 일이다. 군인이나 학생들에게 증오교육하는 거 말고 말이다. 나머지는 죄다 이념이 아닌 어떻게 해야 잘 싸울 것인지를 궁리하고 준비하고 훈련하는 문제다.
근데 이런 적에 대한 증오 중심의 이념에 집중하면 정작 싸움은 못하는 수도 있다. 예를 들어, 6.25때 축차투입으로 후방전력을 날려버린 최악의 지휘관 채병덕. 그는 실향민으로 북괴에 대한 증오심만은 투철한 인간이었음. 근데 실전을 못하면 군인으로선 실격이었다. 아주 심각한 실격자.
어쨌든 코바는 인류에 대한 증오, 주적정신이 투철한 이념주의자라 할 수 있다.
반면에 시저는 일단 평화주의자로 보인다. 근데 사실 시저가 추구하는 게 무조건적 평화는 아니다. 1편에서도 보여주었듯, 그는 전쟁을 해야 하면 주저하지 않고 전쟁을 하는 존재다. 2편에서도 마찬가지고. 시저는 그냥 현실주의자라 할 수 있다. 언젠가 전쟁을 해야 할 때는 하더라도, 지금 평화로운 공존이 가능하다면 그걸 선택하겠다는 입장인 거다.
왜냐면 시저가 최우선 가치를 두는 건 집과 가족이기 때문이다. 시저가 늘 말하지 않던가? 홈! 패밀리!
그를 움직이는 최우선적인 동기와 목표는 집과 가족을 지키는 것이다. 그는 이걸 위해서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그가 전쟁을 피하려는 건 일단 전쟁을 벌이면 바로 집과 가족이 위험해지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그에게 전쟁은 최후의 선택일 뿐, 평화만을 꿈꾸는 이상주의자는 아니다.
재미있는 건, 인간과 공존을 하려는 시저와 인간을 증오하는 코바 중 누가 더 인간의 추악함을 보여주느냐 하면 당연 코바라는 점이다. 코바의 전략은 기본적으로 거짓말과 음모를 기반으로 한다. 그가 인간의 무기를 훔칠 때도 그랬고, 반란을 일으키는 과정도 그랬다. 그리고 시저가 제일 싫어하는 인간의 모습이 바로 그 기만이다.
니체가 말했듯 우리는 자신이 가장 미워하는 존재를 닮는다. 하지만 반대로 나와 상대가 닮아서 미워하기도 한다. 이렇게 나와 닮은 모습을 미워하는 사람들은 자신에 대한 진정한 애정이 없는 사람들이다. 자기 자식이 자기 닮았을때 뿌듯하고 더 사랑스럽게 느끼는 부모와 오히려 시껍해 하는 부모의 차이랄까. 코바도 마찬가지다. 코바는 자신의 지금 모습을 싫어한다. 그리고 자신이 이 지금 이 모양인 된건 모두 인간 때문이라고 믿는다. 모두 북한 탓, 혹은 전직 대통령 탓을 하는 누구들과 비슷하지 않은가?
그들은 또한 자기가 미워하는 존재를 남들도 미워하지 않으면 그들을 좌파에 종북주의자로 낙인찍고 오히려 자기들이 공격한다. 근데 자유민주주의는 이념과 사상의 자유를 전재로 하는 체제이므로 이런 편가르기와 공격의 결과는 자기부정이 된다. 그 결과, 북한을 미워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가장 북한과 비슷한 사고방식에 빠지는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코바와는 달리 시저는 유인원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시저는 인간을 증오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처럼 되지 않으려고 한다. 그래서 앞서 말했듯 자연주의자로 사는 것이기도 하다. 그는 유인원들이 인간을 닮을 필요가 없다고 믿는다.
사실 평화를 선택하기 위해서는 전쟁을 선택하는 것보다 더 큰 용기와 자신감이 필요하다. 전쟁을 저지르기 위해서는 상대에 대한 증오심에 광기만 곁들이면 된다. 하지만 상호공존은 상대를 의심하면서 동시에 신뢰할 수 있어야 한다. 훨씬 어려운 과제인거다. 이 방법을 선택하려면 내가 상대의 기만을 극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영화에서도 시저와 말콤이 Trust라는 단어를 교환하는데, 이게 바로 그 자신감이다.
트러스트는 상대에 대한 믿음만으로 되는 게 아니다. 자신에 대한 믿음 없이 상대만 믿으면 그거야 말로 병약한 의존에 불과하다. 대개 종북 찾는 사람들이 미국은 철썩같이 믿는데 마찬가지 원리라 하겠다. 그네들은 자신감이 없는거다. 그래서 북한은 무조건 두려워하고, 미국은 무조건 의지한다.
이건 평화를 원한다면 전쟁을 준비하라는 격언의 요점이기도 하다. 북한과 공존을 추구하며 교류하려면 우리는 실질적인 방위력을 더 확고히 해야 하는 거다. 노크귀순이나 당하는 요즘 국방현실에서는 그래서 트러스트가 불가능한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여담인데, 최근 미국 뉴욕에서는 침팬지들에게 이 혹성탈출 영화를 관람시켜주는 행사가 있었다. 뉴스에 따르면 실제 침팬지 두 마리가 사육사와 함께 일반 상영관에 가서 팝콘 콜라 사먹으면서 영화를 관람했다더라. 그네들은 무서운 장면에서는 외면을 하고, 주인공이 악당을 쳐부술 때는 박수도 치면서 몰입하면서 보더란다. 근데 이러면 안되는 거 아닌가? 그 침팬지들이 영화 보고 반란을 꿈꾸면 어떻게 하나? 누가 이런 걱정을 하면 다들 그냥 웃고 말 거다.
우리 인간들이 여유롭게 침팬지들에게 이런 유인원이 반란을 일으키는 선동적인 영화를 보여줄 수 있는 이유는 절대로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그게 침팬지를 무시하거나 경멸해서는 아니다. (뭐 그렇게 보는 인간도 있겠지만. 그렇게 생각하면 이 행사는 그냥 침팬지를 놀리는 거로만 보일 듯) 그보다는 인간이 이룩한 세상에 대한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현실과 상상의 격차를 즐기면서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우리도 이런 여유를 가질 수 있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러니까, 누구를 종북으로 몰지 않으면 불안할 정도로 자신감이 결여된 사람들은 줄어들고 상호공존을 모색하는 걸 받아들일 수 있을만큼 우리 사회에 대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더 많아지면 좋겠다.
– 2014. 7. 딴지 영진공 48회
원문 : 싸이코짱가의 쪽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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