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는 어렵다. 잘못을 인정하는 것은 자기방어의 본능을 거스르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누구나 자기 합리화를 하며, 자신을 일관된 사람으로 꾸민다. 자신을 일관되게 만드는 스토리의 주제가 착한 사람인지 정의로운 사람인지, 이기는 사람인지 봐주는 사람인지 등에 따라 자신이 한 말이나 행동의 의미를 프레임 안에 맞춘다. 안 들어가면 접어서라도, 구겨서라도 넣는다.
‘나라는 사람’의 스토리에 균열이 생기면 불안하고 위험하게 느껴진다. 그래서 누군가 “네가 그랬지!”하고 따지면 방어막이 생겨난다. 창과 방패를 든 수비군이 나타나 어떻게 스스로를 방어할지 긴급 대책 회의를 한다. 이야기를 비꼬기도 하고, 잘못을 인정하는 듯하다가 상대방을 쑤시기도 하고, “쟤가 잘못한 거야”라며 엉뚱한 사람을 탓하기도 한다. 이러한 방어전략은 다양하고 광범위하다. 손자병법 뺨친다.
그래서 사과를 한다는 것은 반사적으로 나오는 자기방어를 내려놓는 일이다. “하지만!”이란 말이 튀어나오는 것을 억지로 밀어 넣고, “내가 언제!”라는 뾰족한 말을 타일러서 삼키고, “네가 시작했잖아!”라고 삿대질하는 손가락을 다시 접어 넣는 것이다. 절대 자연스럽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제대로 배워야 한다.
어렸을 때 사과를 배웠으면 좋았겠지만, 그랬을 리가 거의 없다. 그러니 이제라도 달달 외우자. 장담하건대 사과가 필요한 상황은 평생 있을 것이다.
사과의 Don’t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은 너무나 많은데, 그중에서 아주 흔한 경우를 예시로 들었다. 순차적인 리스트는 아니고, 그냥 다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1. ‘미안해’와 ‘안 미안해’를 동시에 하지 않는다
문장 구조: 미안해, 하지만(sorry but)
- 예시) 미안해, 하지만 다 너를 위해서 한 거야.
이런 말은 상대방을 혼란스럽게 하고 화나게 한다. 사과는 자기 잘못을 인정하는 것인데 사과에 자기 방어가 섞여 있다면, 이중 구속(double-bind)이라고 부르는 언어 구조가 된다.
이중 구속은 두 개 이상의 메시지가 충돌되며 제시되는 것으로, 사과의 경우 인정과 거부가 같이 들어있는 소통을 뜻한다. 한때 인류학자 그레고리 베이트슨은 부모의 이중 구속적인 소통 방식이 자녀의 조현병을 일으킨다고까지 말했다. 이는 사실이 아니라고 밝혀졌지만, 받는 사람을 답답하게 만드는 것은 사실이다.
예를 들어 엄마가 “너 공부하지 마! 밥도 먹지 마! 그냥 다 때려쳐!”라고 했다고 치자. 이런 말은 자녀를 욱하게 만든다. “나보고 어쩌라고!” 라고 소리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사과가 이중 구속의 언어를 가지고 있으면 더욱 효과가 없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우리는 이런 사과를 정말 많이 본다.
2. 조건부 사과를 하지 않는다
문장 구조: 만약… 했다면, 미안해 (if… I’m sorry)
- 예: 네가 기분 나빴다면 사과할게.
이 말에는 상대방이 속 좁고 옹졸한 사람이라는 지적이 포함되어 있다. 자신이 잘못했다는 온전한 인정도 들어있지 않다. 그래서 이 말을 듣는 사람은 자신의 상처를 증명해야 하는 상황에 처하므로 기분이 더 나빠진다.
3. 잘잘못을 따지지 않는다
- 예: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어! 말해봐, 이게 그렇게 큰일이야?”
법에는 무죄 추정의 원칙이 있지만, 가까운 관계 안에서는 법보다는 상처받은 내면에 더욱 주목한다. 마찬가지로 상대방의 상처에 대해서는 옳다 그르다 논할 것이 아니다. 최근에 보았던 유튜브 영상에서는 유부남인 남자 변호사가 이런 말을 했다.
부부끼리는 법정에서 싸우는 것처럼 이기려고 하지 마라.
가정에서 열리는 건 재판이 아니다. 부부 모두가 내가 잘못했을 수 있다는 ‘유죄 추정의 원칙’을 가지는 것도 생각해볼 만하다.
4. 잘못의 균형을 맞추지 않는다.
- 예: “내가 잘못한 것은 알겠어. 하지만 너도 잘못했잖아?”
사과는 균형을 맞추는 게임이 아니다. 누가 더 잘못했는지 따지는 자리가 아니다. 사과는 상대방의 입장에서 내가 했던 행동을 되돌아보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공감력은 기본으로 필요하고, 방어 본능을 누를 자기 객관성도 있어야 한다.
사과의 Do
상처를 입은 사람은 사과를 받고 싶어 한다. 존엄성을 회복하고 싶기도 하고, 금이 간 관계를 회복하고 싶기도 하고, 때로는 정의를 구현하고 싶기도 하다. 사과가 없으면 화가 나지만, 사과가 진심으로 들리지 않을 때는 더 화가 난다.
사과를 하고 나면, 사과를 ‘제대로’ 했는가로 판단 기준이 넘어간다. 사과가 실패할 구멍은 많다. 어떤 때는 미안하다고 말하고 미안한 마음을 먹는 것만으로 충분할 때도 있지만, 구체적인 보상과 방지 계획이 필요한 경우도 있다. 그러므로 사과를 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다면 다음 리스트를 보고 어느 단계까지 필요한지를 가늠해보자.
1. 사과의 대상을 명확히 한다.
정치인이나 경제인들이 사과할 때 대상을 명확하게 말하지 않아 국민들의 분노를 자아내는 경우가 있다. 실제로 다치고 죽은 사람들이 있는데 ‘국민에게 사과한다’는 식으로 대상을 모호하게 확대하거나, “만약에 고통을 받으신 분이 있으시다면”이라는 말을 더해 조건부로 대상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과는 대상을 명확히 해야 한다.
2. 미안하다고 말한다
사과, 혹은 미안하다는 말을 또렷하게 말하자. 이 말은 모든 사과의 시작이다.
3. 잘못을 밝힌다
‘미안하다’는 말을 했다고 끝난 게 아니다. 상대방이 받은 피해를 구체적으로 밝힌 뒤, 저지른 잘못이 무엇인가에 대한 양쪽 합의가 있어야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내가 한 행동이나 말이 상대방을 아프게 했다’고 인정하는 것이다. 나뿐만 아니라 너도, 쟤도 잘못했다고 말하고 싶어 입이 간질간질할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서는 자신의 잘못만을 인정해야 한다. 더 큰 상황과 맥락은 사과가 받아들여진 후에 살펴보는 게 좋다.
4. 책임을 진다
피해가 있을 때에는 어떻게 책임질지 밝힌다. 어떻게 보상하고 미래의 피해를 방지할 것인가? 금전적인 보상이 될 수도 있고, 공식 사과문 발표로 이어질 수도 있다. 전혀 다른 방식의 보상이 진행될 수도 있다. 다음의 예를 보자.
1974년 캐나다의 작은 도시 엘마이라에서 술에 취한 청소년 두 명이 난동을 부렸다. 이 사건으로 자동차가 부서지고 유리창이 깨지는 등, 하룻밤 동안 22곳의 집이 피해를 입었다. 관할 경찰과 담당 판사는 이들에게 법적 처벌을 내리는 대신, 피해를 입은 이웃들을 직접 찾아가서 사과하라고 명령했다.
실제로 어떤 이웃들은 청소년이 와서 사과한 것만으로 용서를 해주었다. 이후 3개월 동안 청소년들은 현금 배상, 잔디 깎기, 부서진 펜스와 발코니 수리를 했다. 마지막으로는 용접을 배워 부서진 교회 십자가를 다시 세웠다. 이 사건은 세계 최초로 ‘회복적 정의 프로그램’을 시작한 엘마이라 사건이다.
처벌을 강조하는 응보적 정의 패러다임은 정작 피해자의 피해 회복에는 관여하지 않는다. 회복적 정의 패러다임에서는 가해자의 처벌이 피해자의 회복과 연결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엘마이라 사건 이후 이웃들은 자신들의 거주지가 더 안전하다고 느끼게 되었으며, 청소년 중 한 명은 훗날 회복적 정의 트레이너로 활동했다. 회복적 정의는 세계적인 운동으로 조금씩 퍼져나가고 있으며, 우리나라에서도 학교와 가정법원 등을 중심으로 확대되고 있다.
5. 방지 계획을 세운다
피해를 되돌려놓거나 그에 따른 보상을 하는 것으로 끝나는 경우도 있지만, 미래에 비슷한 일이 재발하는 것을 막을 구체적 계획이 필요한 경우도 있다. 즉, 엎어진 물을 닦은 후 앞으로 어떻게 물을 엎지르지 않을 것인지에 대한 계획을 세우는 것이다.
미래에 대한 약속을 하는 단계이므로 실천 가능해야 하고, 확인이 가능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앞으로 조심하겠다거나 최선을 다했다는 두루뭉술한 말로는 충분하지 않다.
6. 무엇보다, 진짜로 미안해한다
말만 아니라, 진짜 상대방의 입장에서 자신의 행동을 되돌아보고 미안해해야 한다. 진정성 있는 말과 행동은 마음에서 나온다.
그러나 인간은 스스로를 방어하는 본능이 있기 때문에, 미안하기 위해서는 나의 연약함을 들여다볼 수 있어야 한다. 평소에 자신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인정할 수 없는 사람은 진심 어린 사과를 하기 어렵다. 바로 이 점이 권력 높은 사람의 사과를 어렵게 만드는 이유인지도 모르겠다.
만약 머리로는 이해가 가는데 마음이 안 움직인다면, 사과문을 글로 써서 소리내어 읽어보자. ‘빈 의자’ 기법을 활용해도 좋다. 빈 의자에 상대방을 상상으로 앉혀 놓고 사과의 말을 건넨 뒤, 자리를 바꾸어 앉아 상대방의 입장에서 어떻게 느낄지 상상해 보는 기법이다.
그래도 만약 마음속으로 “나만 잘못한 게 아니야!” “쟤가 나빴어!” “상황 때문에 그런 건데!” 등의 말이 떠오른다면, 이 모든 상황을 안타깝게 보되 안타까움 뒤에 숨지 않도록 노력해 보자. 사과는 연약하고 보호받고 싶고 방어하고 싶은 내가 숨지 않고 앞으로 나와서 두 손을 내미는 행위다. 그 손을 잡을지 말지는, 사과를 받은 상대방에게 달렸다.
7. 왜 그렇게 행동했는지에 대한 설명은 나중에 한다
사과를 충분히 하기도 전에 왜 그랬는지 설명해서 문제가 생기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이런 경우다.
그래, 네가 속상한 건 알겠는데, 내가 왜 그랬냐면…
상처를 줄 의도가 아니었기에 억울하거나 속상할 수 있다. 하지만 이 말은 자기 방어나 변명으로 여겨져 상대방을 더 화나게 할 확률이 높다. ‘왜’에 대한 설명은 사과 이후 회복의 단계에서 더 중요하다. 사람들은 아마도 마음이 진정된 다음 왜 그랬냐고 물어올 것이다. 그때 대답하자.
마무리하며
회복정 정의 센터의 이재영 센터장이 들려주는 일화다.
한 번은 내가 사는 지역의 초등학교 학생들에게 ‘학교에서 잘못하면 어떻게 되니?’라고 물은 적이 있다. 아이들은 이구동성으로 ”혼나요!“라고 대답했다.
우리 시대의 상식은 ‘잘못(죄)은 벌을 낳는다!’이다. 그러나 회복적 정의 관점에서 생각하면 잘못은 ‘피해를 낳는 것’이다.
- 『회복적 정의』 241p
진심 어린 사과는 상대방에게 상처와 피해를 주었으며, 내가 그 피해를 일으켰다는 점을 인정하고 느낄 수 있을 때 가능해진다. 그렇다면 사과는 내가 저지른 일과 내가 받을 처벌이 아니라, 상대방이 입은 피해와 상대방이 경험하는 고통에 집중할 수 있어야 비로소 가능해질 것이다.
원문: 정은혜의 브런치
참고 문헌
- 김종훈 「유부남이 예비신랑에게 전하는 결혼생활 꿀팁」창천 미팅룸, 2021년 5월 7일
- 이재영 「회복적 정의: 세상을 치유하다」피스빌딩, 2020
- Battistella E 『Sorry About That: The Language of Public Apology (한국판 제목: 공개 사과의 기술)』, Oxford University Press, 2016
- Rowland M 『The Power of Apology』 Wellbeing, Issue 191,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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