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익환 목사의 영원한 짝 박용길 장로
내가 입사한 해였을 거다. 한창 더웠던 7월 31일, 판문점을 거쳐 한 할머니가 북에서 남으로 넘어 왔었지. 북한 사람은 아니고 남한 사람이었어. 박용길 장로. 문익환 목사 사모님이었지. 등 뒤에 한복 차려 입은 북한 처자들이 운집해서 눈물 흘리며 손을 흔드는 가운데 흰색 옷차림의 박용길 장로는 결연한 표정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떼면서 남쪽을 향했다.
알다시피 나는 감상적 통일론은 오히려 통일을 멀게 한다고 생각하고 그날 박용길 장로 뒤에서 조국 통일 외치며 눈물 흘리던 북한 처자들이 진실로 통일의 열망에 사로잡혀 있다고 믿을 만큼 순진하지도 않아. 즉 김일성 주석 1주기에 굳이 참여하겠다고 북한을 방문하고 되돌아오는 일에는 그다지 호감이 없었다는 거지. 그래도 박용길 장로의 걸음을 보면서는 사뭇 묘한 느낌에 휩싸였던 기억이 난다.
이제는 고인이 되신 분께 외람된 소리일 수도 있겠지만 나는 통일의 어머니라기보다는 평생 한 남자를 사랑했던 한 여성의 당찬 행보를 보았다고나 할까. 마치 자랑하고 있는 듯 보였거든. 과시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거든. “여보 보고 있소? 나 당신 대신 갔다 왔어요.” 라는 것처럼 말이야.
천생연분 커플의 탄생
3,1운동이 있던 해 구한말 기마장교의 딸로 태어나서 좋은 교육 받고 일본 유학까지 갔던 박용길은 허약해 보이는 유학생 하나를 만나. “이마가 넓고 잘 생긴 얼굴이어서 금방 눈에 띄었던” 남자였지. 근데 비유가 좀 이상하긴 하다. “만주국 황제 부의같았다.” 글쎄?
아닌게 아니라 문익환 목사 젊을 때 사진 보면 오히려 그 아들인 영화 배우 문성근보다 훨씬 낫다 싶어. 둘은 결혼할 뜻을 밝히지만 친정에서는 완강하게 반대한다. 저 비실비실한 남자랑 결혼시켰다가 딸 생과부 만들 일 있냐는 거였지. 하지만 이때 박용길은 선언해. “6개월을 살아도 나는 이 사람과 결혼하겠어요.”
사람의 연이란 게 그렇다. 미칠 것 같은 악연도 있지만 어떻게 구정물을 끼얹어도 아름답기만 한 가연도 있는 거야. 언젠가 촬영했던 식당 부부도 그랬다. 허구헌날 얼굴 보며 한 식당에서 따닥따닥 붙어 있기를 수십 년 한 부부였지만 평생 한 번도 부부싸움한 적이 없다는 부부. 내 앞에서 하는 거짓말이 아니라 서로 진지하게 우리가 언제 싸웠지? 하면서 이맛살을 좁히며 기억을 짜내던 부부. 천재는 부러워하는 것이 아니라 인정해야 하듯, 천생연분도 그래. 부러워할 게 아니라 그냥 너희는 전생에 을지문덕에 잔다르크였구나 치부하는 게 편해.
그때 박용길의 결단은 문익환을 그의 사람으로 만들었고 그 후 수십 년 동안은 평온하게 지냈다. 전쟁통에도 큰 난리는 피했고 영어에 능숙한 남편은 최소한 식솔들을 바닥에서 구르게 만들 깜냥은 아니었지. 그렇게 순탄한 인생은 1976년에 이르러 끝장이 난다. 성경 구약의 권위자이고 오늘날 우리가 읽는 시편의 번역자로 이름높은 신학자 문익환이 ‘3.1구국선언’ 사건으로 투옥된 거지. 대한민국 빵잽이 경력으로 누구에게 뒤지지 않을 문익환의 빵잡이의 시작이었고.
뒤늦게 세상을 보았다는 뜻으로 문익환은 늦봄이라는 아호를 사용했지만, 봄이란 우리 말은 Seeing이자 Spring이지. 박용길의 아호는 봄길이 된다. 자청이든 남편의 작명이든. 늦봄의 봄길에 대한 애정 행각(?)은 문익환이 감옥에 있을 때 주변 재소자들의 눈꼴을 비틀었던 일화로 기억되지. “혹시 엽서 하나 남는 거 있어?”라고 물으면서 “아니 뭘 더 쓰시려고?” 하는 핀잔을 들으면서 얻어낸 엽서에 끄적이는 남편의 사랑
“오늘 새벽에 당신을 만났었죠. 그 꿈이 아쉬워서 오래오래 누웠다가 늦게 일어났지요. 지난 번 접견 때의 그 신선한 아름다움이 봄길의 향기로 코끝에 그대로 남아 있는 거죠. 30대의 젊음이 내 몸에 옮아 온 것 같군요. 이 편지를 많은 사람들이 보리라고 생각되어 이 정도로 우리의 젊음을 토로하고 이야기를 다른 데로 옮기기로 하겠소.” 이 편지를 쓸 때는 유신 말기, 즉 문익환 목사 나이 환갑 때였어. 그런데 이런 편지를 날린다….. 전문용어로는 주책이라고 하지. 하지만 봄길 박용길도 비슷했다는 게 문제.
옥살이도 끊을 수 없었던 사랑
문익환 목사는 툭하면 감옥에 들어갔고 거기서 숱한 편지를 날리며 아내에게 대한 사랑을 과시했어. 1976년 이후 이 양반은 사회에서 생활한 거보다 감옥에서 생활하는 게 더 익숙했을지도 몰라. 옥살이 합계가 11년 3개월이니까. 6월 항쟁으로 형식적 민주화가 이뤄진 뒤 문익환 목사의 시선은 휴전선 너머 북쪽으로 향한다.
문익환 목사는 방북을 결심하지만 동시에 망설이고 주저한다. 선례도 없고 그 파장도 경험한 바 없는 남한 인사의 북한 방북. 그것이 어떤 회오리를 가져올지, 자신은 어떻게 될지 두려움도 있었겠지. 여기서 “6.25 때도 탱크 기관총 소리가 나도 쿨쿨 잠 잘자던” (문익환 목사 회고) 강단으로 “6개월만 살아도 이 사람과 결혼하겠다.”던 결기로, 박용길 장로는 남편의 얼굴에 스트레이트를 날려 버린다. “내 남편이 이렇게 우유부단한 지 몰랐소.” 아내에게 이런 말을 듣고 Go!를 외치지 않는 남자는 호모 에렉투스 이래 없을 거다.
또 시작된 옥살이에서 문익환 목사는 엄청난 편지를 보내고 박용길 장로는 그에 답한다. 그 가운데 이런 대목이 있네. “(지인의) 청첩장 표지에 하나가 된다는 것은 더욱 커지는 일이라고 써 있군요. 통일되는 것은 이 겨레가 더 커지는 일이라 생각하며 한 말인데 그게 두 젊은이가 한 가정을 이루는데도 의미있는 말이 되리라고는 미처 생각 못했군요. 그러고 보면 우리가 한 가정을 이루어 1년이 모자라는 50년을 살았는데 우리도 꽤 커졌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몰라도 나는 당신을 만나 엄청나게 커졌다고 주저하지 않고 말할 수 있을 것 같군요.”
겨우 50년의 3분지 1을 살아낸 처지지만 내가 저 말을 하면 아내는 “나는 팍 쪼그라 들었어!”라고 일갈할 것이 분명할 것이기에 문득 서글퍼지기는 한다만 저 글을 받아들었을 박용길 장로의 가슴이 어떠했을지를 상상하기란 별로 어렵지 않구나. 아마 스스로 거인이 된 느낌이 아니었을까. 6개월 살아도 좋다고 생각한 남자가 50년 뒤에 편지를 보내 그대와 함께 함에 나는 엄청나게 커졌노라고 고백하는 걸 듣는 행복한 여자라면 거인 아니라 크라켄처럼 커질 수도 있었을 거야.
박용길 장로가 남편을 잃은 그 해, 남편이 목숨을 걸고 만나러 갔던 김일성 주석도 죽는다. 정상회담을 앞두고 일어난 급작스런 일이었지만 남한 정부와 보수층은 대통령이 만나러 가기로 했던 회담 상대의 죽음을 원수의 죽음으로 치부했고 조문하는 것을 대역무도 행위로 몰았지. 그런 분위기에서 박용길 장로는 방북을 결심했다고 해. “남편을 통일 제단에 바친 사람으로서 지도자를 잃은 북쪽 동포들과 유가족에게 위로의 말을 전하고 싶었다.” 이걸 쉽게 풀어 쓰면 박용길 장로는 “여보. 내가 대신 갔다 올게요.”라는 말을 하고 싶었던 걸 거야.
아울러 11년이 넘는 남편의 감옥살이도 한 번쯤은 다녀오고 싶었을지도 몰라. 50년 해로한 옥중 남편에게 꽃잎을 눌러 편지를 보내던 아내의 마음이었겠지. 여기에 “가 본 길만이 길이 아니다. 어둠 속으로 뻗은, 가 보지 않은 길은 얼마나 깊고 싱싱한가. 그곳에 흩어진 마음 조각들이, 저들끼리 모여서 노래가 된다”(이기철의 시, “지상에서 부르고 싶은 노래 중)으로 화답하던 남편의 필체를 그리면서. ‘어둠 속으로 뻗은, 가보지 않은 길’을 향하여 나아가고 싶었던 게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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