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자 주: 이 글은 New York Times의 How math got its ‘Nobel’을 번역한 글입니다. 이 글을 쓴 마이클 J. 배러니는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과학사를 전공하는 대학원생이다.
노벨은 수학을 무시한 게 아니다
오는 8월 13일(수)은 대한민국 서울에서 국제 수학자대회가 열리는 날이다. 이 자리에서는 필즈 메달 수상자가 발표되기도 한다. 1936년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처음 수여된 필즈 메달은, 4년마다 두서너 명의 수학자들에게 주어진다. 그것은 수학계의 노벨상으로 불리며(심지어 필즈상 위원회조차도 그렇게 부른다), 노벨상이 빠뜨린 부분을 메우는 것으로 간주된다. 알프레드 노벨은 무슨 연유에선지, 1896년 사망 당시 노벨상 목록에 수학을 포함시키지 않았다.
많은 수학자들은 이렇게 말한다: “노벨이 수학을 빠뜨린 것은 그의 라이벌인 스웨덴의 수학자 고스타 미타그-레플러를 엿먹이기 위해서였으며, 이를 바로잡고자 캐나다의 수학자 존 찰스 필즈가 자기 이름을 따서 필즈상을 제정했다.” 그러나 이것은 허황된 거짓말로, 시정되어야 한다. 첫째, 노벨과 미타그-레플러 사이에 불화가 있었다는 증거가 없다. 둘째, 노벨이 수학을 빠뜨린 것은 순전히 “다른 학문이 수학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필즈로 말할 것 같으면, 그는 노벨상을 대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국제적 단합의 상징으로 상을 제정한 것이다. 즉, 1차 세계대전 후 전세계 과학계는 국가간 라이벌 의식으로 인해 분열되어 있었다. 1920년 국제 수학연맹이 처음 설립됐을 때, 종전의 동맹국(Central Powers) 출신 수학자들은 가입이 금지됐었다.
그래서 필즈는 “후보자들을 부당하게 차별하지 말고, 과거의 업적보다는 미래의 가능성을 중시하자”는 원칙을 제시했다. (그의 두 번째 원칙은 후에 수상자의 연령을 40대 미만으로 제한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데 이용되었다. 그러나 필즈 자신은 젊은 수학자들에게만 상을 줄 의향은 없었다.)
빨갱이 사냥 덕분에 수면 위로 올라온 필즈상
지난 수십 년 동안, 필즈 메달은 비교적 듣보잡 수준이었다. 1950년의 수상자 두 명은, 수상 직전까지 그런 상이 있는지도 모를 정도였다. 그렇다면 필즈상은 어떻게 ‘수학계의 노벨상’이라는 소리를 듣게 되었을까? 그 이면에는 지금껏 종종 간과되었던 수학과 정치의 연결고리가 숨어 있다.
1966년 8월 5일, 샌프란시스코 이그재미너는 “스티븐 스메일이라는 수학자(UC 버클리)가 모스크바로 도주했다”고 보도했다. 그는 베트남전 반대 활동과 관련하여, 하원 반미활동 조사위원회(1940-50년대의 「빨갱이 사냥」으로 유명함)에 출두하여 증언하기로 되어 있었다.
하지만 스메일은 도망간 것이 아니라, 소환장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유럽에 가 있었다. 그의 지인이 부랴부랴 신문사에 전화를 해서 자초지종을 해명하는 사이에, 그는 모스크바에서 열리는 국제 수학자회의에 참석했고, 공교롭게도 소환 예정일에 필즈 메달을 받았다.
혹자들은 “스메일이 상은 받은 것이야말로 그가 공산주의 활동을 했다는 증거”라고 믿었다. 게티스버그 타임즈는 “미국의 수학선생이 소련에서 주는 상을 받았다”고 대서특필을 했다. 그러나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과 뉴욕타임스는 시각이 달랐다.
그들은 스메일의 동료들이 AP통신과의 인터뷰에서 한 말을 믿었다. 그들의 말인즉, “스메일은 노벨상에 필적하는 상을 받으러 외국에 나갔다”는 것이었다. 이건 과장된 말이었지만, 스메일의 위상을 높여 비판을 막는 방패가 되기에 충분했다. 그 후에 스메일에 대한 스캔들은 차츰 사라졌다.
이듬해에 스메일은 또 한 번 매스컴을 탔다. 이번에는 그의 반전활동을 못마땅하게 여긴 미 과학재단이 그의 연구비 지원을 차단한 것이었다. 그러나 또 한번 “스메일은 노벨상에 필적하는 상을 받은 사람이다”라는 주장이 그를 보호해 주는 바람에, 연구비 지원은 재개되었다. 이렇게 맺어진 필즈상과 노벨상과의 억지인연은 냉전의 산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까지도 끈질기게 이어지고 있다.
수학과 정치
수학자들은 현실세계에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수학과 정치가 얼마나 엮여 있는지 모르는 경향이 있다. 스메일의 사례에서 보는 것처럼, 그의 수학적 업적은 정치활동과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지 않다. (단, 그가 수학자로서 쌓은 명성이 그에게 정치활동의 기회를 준 것은 논외로 한다.)
그러나 수학자라면 몰라도, 수학 자체는 정치적일 수도 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미 육군은 엘리트 수학자들에게 연구자금을 제공하여, 위상학, 미분방정식, OR(operations research), 게임이론을 연구하게 했었다.
일부 군산복합체는 수학자들을 귀하신 몸으로 모셔 왔지만, 수학자들로부터 맹렬한 비판을 받아 오기도 했다. 오늘날 미 국가안전국(NSA)의 비인도적 감시활동이 만천하에 폭로된 와중에서, 수학자들은 “과연 정보기관과의 밀월관계를 계속 유지해야 하는가?”라는 문제를 놓고 논쟁을 벌이고 있다. 정보기관은 수학자들의 오랜 물주이자 고용자였기 때문이다.
스탠퍼드 대학교의 케이스 데블린 교수는 최근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수학자들의 좌절감을 이렇게 토로했다: “우리는 그들이 미 합중국 헌법을 준수하고 수학을 옳은 일에 사용할 수 있음을 증명할 때까지, NSA를 위해 일하지 않겠다.”
스메일이 무심코 베트남전을 반대한 것이 아니었던 것처럼, 다른 수학자들도 우연히 NSA를 도와주거나 반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들이 그런 행동을 하게 된 데는 어떤 형태로든 수학이 관련되어 있을 것이다. 수학자가 누구며, 무슨 일(나쁜 일일 수도 있고, 좋은 일일 수도 있다)을 하는 사람들인지를 규정하는 것은 수학이다. “수학은 정치적이다”라고 말한다고 해서 수학의 가치가 희석되지는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수학의 의미, 가능성, 책임을 더욱 더 분명히 해 주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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