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이 빠지고 있다. 넘치는 유동성 물결을 타고 밀려 들던 스타트업 투자가 올 들어 뚝 끊겼다. 업계를 가득 채웠던 돈이 썰물처럼 빠져 나가고 있다. 스타트업 민관협력 네트워크인 스타트업얼라이언스에 따르면 지난 7월 국내 스타트업의 투자유치 금액은 8368억원으로 전년 동기(3조659억원) 대비 82.7% 줄었다. 1년 사이에 투자자의 씀씀이가 5분의 1로 준 셈이다.
성장의 원동력이었던 투자가 줄자 스타트업들의 진짜 실력이 드러나고 있다. J커브 성장을 약속하며 퍼붓던 마케팅 자금이 떨어진 회사는 이용자 수가 뚝 떨어지고, 투자금으로 적자를 버티던 회사는 직원을 내보내고 있다. 서로 투자하려고 줄을 섰던 유명 스타트업도 하나둘 흔들리면서 업계를 바라보는 눈길은 더 싸늘해지고 있다.
위기의 스타트업은 공통점이 있다
흔들리는 스타트업은 비슷한 점이 있다. 일반 소비자를 대상으로 공격적인 마케팅을 해 비즈니스의 규모를 빠르게 키우는 스타트업의 ‘성장 공식’을 따랐다. 하지만 일반 소비자에 기댄 이 전략은 시장이 침체에 빠지자 부메랑으로 돌아왔다. 경기 변동에 민감한 소비자들이 빠르게 지갑을 닫으면서 스타트업이 흔들리기 시작한 것.
소비자를 붙잡아두기 위해 큰 적자를 감수하던 전략에도 빨간 불이 켜졌다. 이전까진 매출과 MAU(월간 활성 사용자 수) 증가로 투자자를 설득할 수 있었다. 꾸준히 투자만 이어진다면 적자 행진을 벌여도 기업이 무너지지 않았다. 마치 자전거 페달을 계속 밟으면서 앞으로 나가는 것과 같은 상황이다. 투자자가 매출 성장이 아닌 수익성 입증을 요구하면서 이 공식은 흔들리고 있다.
스타트업 업계의 트렌드인 ‘슈퍼앱’ 전략도 위험을 키우고 있다. 일단 큰 트래픽을 확보하면, 여러 비즈니스로 확장해 기업 규모를 키우는 전략이다. 프리미엄 신선식품을 팔던 마켓컬리가 매출 확대를 위해 여행과 여가 상품을 팔고, 야놀자가 전시 예매를 시작한 게 그 사례다. 하지만 틈새시장에서 경쟁력을 키웠던 스타트업이 사업 영역을 늘리면서 전략이 모호해지고, 투자 부담은 커졌다. 몸집 불리기 전략에 제동이 걸린 것이다.
천천히 그리고 단단하게 성장한 스타트업의 시간
썰물은 수영복도 입지 않고 헤엄치던 기업의 민낯을 드러내지만, 튼튼한 구명조끼를 멘 견실한 스타트업이 주목 받을 기회이기도 하다. 조용히 내실을 다지며 성장해온 기업의 시간이 온 것이다. 상대적으로 안정성이 높은 B2B(대 기업 비즈니스) 매출 비중이 높고, 꾸준히 영업이익을 낸 ‘똘똘한 스타트업’이 그 주인공. 성장성에 안정적인 매출 구조와 수익성을 갖춘 스타트업, 알스퀘어가 대표적인 사례다.
알스퀘어? 이 이름을 들은 대다수 독자는 머릿속에 물음표를 띄울 것이다. 만약 ‘아! 그 회사’라고 생각했다면 부동산, 특히 상업용 부동산에 관심이 있거나 업계 종사자일 가능성이 높다. 알스퀘어는 국내 프롭테크(IT 기술을 활용한 부동산 비즈니스) 1등 기업이다. 임차인을 찾는 사무실과 기업을 연결하는 비즈니스를 하고 있기 때문에 고객은 건물주와 기업이다. 지난해에만 1000건 이상, 거래액으로는 2조원이 넘는 상업용 부동산을 중개했다.
알스퀘어는 위기에 빠진 스타트업의 특징과 반대되는 비즈니스 전략을 펴고 있다. ①B2C가 아닌 B2B ②슈퍼앱 대신 특정 영역에 집중 ③무리한 적자 감수가 아닌 수익성 확보 전략이다. 빙하기를 이겨내는 알짜 스타트업의 전략을 자세히 알아보자.
①B2B 비즈니스의 안정성
2000년대 초 이커머스 시장 개척에 나선 아마존은 10년 이상 매우 낮은 영업이익률을 보였다. 이 기간동안 회사의 시가총액과 매출은 빠르게 불어났지만, 영업이익은 제자리걸음에 그쳤다. 이렇게 오랜 기간 낮은 수익성을 보인 이유는 아마존의 창업자 제프 베조스가 시장 선점을 위해 공격적으로 투자 규모를 늘렸기 때문이다. 돈을 버는 족족 물류센터를 짓고, 상품 구성을 늘려 이커머스 시장의 점유율을 확대한 것이다.
이렇게 공격적인 투자를 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믿을만한 수입원이 있다. 클라우드 서비스인 아마존웹서비스(AWS) 사업이다. 2006년 문을 연 이 서비스는 원하는 기업에 요금을 받고 서버를 빌려주는 사업이다. 기업에 온라인 공간을 빌려주는 일종의 인프라 사업이다. 인프라에 가까운 클라우드는 경기 침체를 겪으면서도 꾸준히 매출과 영업이익을 키워왔다. 불황이 찾아와도, 기업이 곧바로 클라우드 사용을 중단하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AWS는 아마존의 핵심 사업으로 자리잡았다. 많은 사람이 아마존을 미국 최대 이커머스 회사로 생각하지만, 수익 구조를 뜯어보면 다른 모습이 나타난다. 지난해 기준 아마존의 영업이익 248억 달러(약 33조 7900억원) 중 74%(183억 달러)가 AWS에서 나왔다. B2B 비즈니스의 높은 수익성과 안정성을 입증하는 수치다.
알스퀘어의 주요 고객은 대기업과 유명 스타트업이다. 네이버와 하이브, 대우조선해양 등 대기업과 ‘배달의민족’ 운영사인 우아한형제들, 라인게임즈, 카카오뱅크 등이 알스퀘어를 통해 큰 면적의 사무실을 마련했다. 주요 고객 가운데는 지방자치단체인 서울 종로구청도 있다. 경기 변동에 따라 씀씀이가 크게 바뀌는 개인이나 소규모 기업보다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지출이 가능한 우량 임차인을 확보한 것이다.
대체로 B2C 시장에 비해 경쟁 강도가 상대적으로 낮은 점도 B2B 시장의 매력이다. 주요 빌딩 소유주와 우량 기업을 중심으로 시장이 이뤄져 있기 때문에 새로운 경쟁 기업의 출연이 드물다. 오랫동안 만들어진 시장의 네트워크에 접근하는 것이 어렵기 때문이다. 2012년 상업용 부동산 시장의 정보와 거래처를 수집한 알스퀘어의 선점 효과를 후발 주자가 이겨내기 어렵다.
반면 B2C 시장은 치열한 경쟁을 거치면서도 뚜렷한 시장 주도 기업이 나타나지 않고 있다. 앱·리테일 분석서비스 와이즈앱에 따르면 주로 주거 상품을 다루는 부동산 앱 시장은 직방과 호갱노노, 네이버부동산, 다방, 아파트 실거래가(아실) 등 여러 기업이 엇비슷한 점유율을 보이며 경쟁하고 있다. 초기 주자인 직방이 선두를 지키고 있지만, 후발주자의 추격도 끝나지 않은 모양새다.
업계에선 시장 성격의 차이를 강조한다. 한 빌딩 중개회사 관계자는 “상업용 부동산을 가진 건물주는 한번 믿고 거래를 튼 중개자를 쉽게 바꾸지 않는다”며 “아파트와 달리 주요 대형 오피스는 매물이 한정돼 있기 때문에 업력이 오래된 선두 주자를 뛰어넘기가 쉽지 않다”고 말했다.
②전문 영역에 집중한 전략
스타트업의 전략을 크게 2가지로 나누면 슈퍼앱을 지향하는 ‘수평 전략’과 특정 시장에 집중하는 ‘수직 전략’으로 나눌 수 있다. 수평 전략을 채택한 대표적인 기업은 쿠팡이다. 식품과 생필품을 중심으로 매출을 키워온 쿠팡은 2년 전 패션 분야에도 진출했다. 2500만이 넘는 거대한 MAU를 바탕으로 패션 시장을 뒤흔들거라는 전망도 나왔지만, 성과가 미미하다는 게 시장의 중론이다. 상품 구색과 규모에 방점을 찍은 쿠팡의 슈퍼앱 전략이 예민한 패션 소비자와 잘 맞지 않다는 분석이 나온다.
반면 ‘패션 외길’ 전략으로 유니콘으로 뛰어오른 스타트업이 있다. 2012년 문을 연 무신사다. 신발 애호가 커뮤니티로 시작해 패션 이커머스 플랫폼으로 성장한 무신사는 지난해 투자를 유치하면서 2조5000억원의 기업가치 평가를 받았다. 설립 10년여 만에 유니콘(기업가치 10억 달러 이상의 스타트업)으로 뛰어올랐다.
무신사는 청년층, 특히 남성 패션시장의 강자다. 이 시장에서의 확고한 우위를 바탕으로 생산자와 소비자를 끌어모으는 플랫폼 효과를 발휘하고 있다. 틈새 시장(Niche Market)을 확보한 뒤 다른 시장으로 진출하며 몸집을 키우는 일반적인 공식을 따르지 않았다. 대신 이커머스에서 오프라인 매장으로, 남성 스트릿 패션에서 골프와 여성복으로 영역을 넓혔다. 특정 카테고리 안에서 영향력을 키우는 ‘수직 전략’이다.
알스퀘어의 핵심 역량은 상업용 부동산에 집중돼 있다. 그 원천은 2012년부터 10년째 축적해온 상업용 부동산 데이터 베이스다. 시작은 직접 건물주와 임차인을 만나며 얻은 정보를 수기로 적으면서였다. 이렇게 쌓은 데이터가 총 16만 건에 이른다. 이 정보를 바탕으로 알스퀘어는 2017년부터 고속 성장에 올라탔다. 이렇게 주요 오피스 정보를 손에 쥐면서 경쟁자가 따라잡기 어려운 위치에 올라섰다.
알스퀘어는 상업용 부동산에서 확보한 우위를 바탕으로 수익을 키웠다. 단순한 중개를 넘어 임대할 사무실의 인테리어와 리모델링을 맡고 사무 관련 기기를 판매하는 방식으로 부가 수입을 낸다. 일반 주거로 사업 포트폴리오를 넓히는 게 아닌 상업용 부동산에 집중하는 수직 전략을 선택한 것이다.
상업용 부동산을 중심으로 한 신사업 발굴은 계속되고 있다. 지난해부터 당일·새벽 배송으로 수요가 급증한 물류센터와 리테일(상업시설)로 임대차 중개 사업을 넓혔고, 매입·매각 자문, 부동산 자산관리(PM) 사업에도 뛰어들었다. 한국에서의 성공 모델을 바탕으로 베트남과 싱가포르 시장에도 진출하며 사업 영역을 확대하고 있다.
③꾸준한 수익성
시중에 유동성이 마르면서 투자자들은 기업에 수익성을 입증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적자를 용인하면서 빠른 성장 곡선을 보여주는 J커브 전략의 시대가 저물고 있다. 대신 투자자의 관심은 꾸준히 수익을 내며 성장하는 알짜 스타트업으로 쏠리고 있다. 투자가 끊기면 적자를 감내하지 못하고 무너질 위험이 있는 스타트업 대신 불황을 이길 수익 창출 능력을 가진 기업의 시대가 오고 있다.
이런 분위기 변화의 배경에는 빠른 금리 인상이 있다. 금리가 낮을 땐, 지금 당장 벌어들이는 수익보다 먼 미래에 거둘 더 큰 수익의 가치를 높게 평가한다. 반면 금리가 치솟으면 지금 거두는 현금의 가치가 더 커진다. 미래를 약속한 유망주보다 지금 앞가림을 해내는 우량주에 눈이 갈 수 밖에 없는 환경이다. 초저금리 시절 외면 받던 ‘모범생’은 이제야 제대로 평가를 받게 됐다.
신선식품 시장의 다크호스, 오아시스마켓은 지난 8일 연내 주식시장 상장(IPO)를 마치겠다고 밝혔다. 연내 상장이 불투명한 마켓컬리와 대조된다. 자신감의 원천은 수익성이다. 오아시스마켓은 2011년 창사 이래 꾸준히 영업이익을 내고 있다. 올해 상반기에는 전년 동기 대비 171% 증가한 72억원의 영업이익을 거뒀다. 유통 대기업도 적자에 지쳐 두 손 든 신선식품 시장에서 이례적인 모습이다.
무리하게 물류망에 투자하기보다 오프라인 매장 운영을 병행하며 수익 관리에 나선 게 주효했다. 새벽배송 시장이 급성장한 2020년 코로나 확산 이후에도 무리한 투자 확대보다 수익성 유지에 초점을 맞췄다. 이른바 ‘물 들어올 때 노를 젓지 못하는’ 오아시스마켓의 행보에 대해 당시 일각에선 비판도 있었다. 하지만 스타트업 시장에 위기가 찾아오자 오아시스마켓의 수익성 중심 전략은 빛을 발하고 있다.
2017년 이래 연평균 64%의 빠른 성장을 해온 알스퀘어도 이런 수익성 유지 전략을 고수했다. 알스퀘어는 2017년 이래 코로나19 펜데믹으로 시장이 얼어붙은 2020년을 제외하고 매년 영업이익 흑자를 거뒀다. 이 기간동안 물류창고 시장을 개척하고 해외 지사를 설립하는 등 사업 확장을 하면서도 수익성을 지킨 것이다. 상업용 부동산을 중심으로 영향력을 유지하고, 부수 사업을 늘리는 방식으로 수익을 거둔 결과다.
사모펀드 업계 관계자는 “최근에 투자 유치에 실패하거나 정리해고, 폐업 수순에 들어간 스타트업의 공통점은 투자를 받지 못하면 망하는 구조”라며 “이젠 돈이 비싼 시기다. 자기 밥벌이는 안정적으로 하면서 성장성을 갖춘 기업에만 깐깐하게 투자하는 분위기”라고 말했다.
대멸종의 위기, 주인공이 바뀌는 순간
B2B 시장의 안정성과 집중 전략, 수익성을 바탕으로 스타트업 업계의 위기를 이겨내고 있지만 알스퀘어가 넘을 파도는 또 있다. ‘알스퀘어호’가 떠있는 바다, 부동산 시장의 침체다. 금리 인상이 강타한 부동산 시장의 침체 위기를 알스퀘어는 어떻게 돌파할 계획일까.
알스퀘어는 10여년전 직접 부동산 침체기를 이겨낸 경험을 강조한다. 알스퀘어 관계자는 “회사가 문을 연 10여년 전에도 부동산 시장은 침체했지만, 그 와중에 성장하고 살아남았다”며 소비자 니즈에 맞는 데이터와 매물을 확보하고, 부가 수익 사업을 발굴하고 있다”고 말했다.
지구상에 생명체가 등장한 이후 5번의 대멸종이 있었다. 갑자기 찾아온 빙하기, 대규모 화산 폭발, 소행성 충돌 등의 결과다. 하지만 재난 이후에는 여기서 살아남은 종의 시대가 왔다. 번성하던 스타트업 업계에 금리 인상과 유동성 축소라는 재앙이 찾아왔다.
좋았던 시절 몸집을 키우고 투자금에 취했던 기업은 비틀거리고 있다. 튼튼한 고객 네트워크와 확실한 시장 장악력, 여기에 수익성까지 확보한 똘똘한 스타트업 시대의 여명이 밝아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