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에 가고 싶은 군대가 어딨어요?”
2007년 군가산점 문제가 한창 논란일 때, KBS 심야토론이 이를 다룬 적이 있다. 여기에서 소위 ‘뜬’ 사람이 전거성, 전원책이다. 나는 전원책 씨의 토론 방식도, 그의 가부장적인 세계관도 무척 싫어하지만, 여기에서 그의 일갈 하나만은 정말 최고였다고 생각한다. 다음 부분이다.
남윤인순: “갈 만한 군대를 만들자는 겁니다. 군대를 가고 싶어 하는 게 해법이죠.” (중략)
전원책: “이 세상에 가고 싶은 군대가 어딨어요?” (중략)
남윤인순: “지금 현 제도가 그렇다는 거죠.”
많은 군필 남성들은 월급이 얼마가 되든, 복지가 어떻게 되든 군대 하면 일단 손사래를 칠 것이다. 군대는 자유를 박탈한다. 먹고 싶을 때 먹을 수 없고, 자고 싶을 때 잘 수 없고, 놀고 싶을 때 놀 수 없다. 일신에 매우 강력한 수준의 통제가 이루어지며, 외부 사회와의 접촉이 상당부분 차단된다. 그 어떤 제도적 개선이 있더라도 이 한계를 극복할 순 없다. 가고 싶은 군대 따위는 생길 수 없다. 남윤인순 씨의 환상 속에서만 존재할 것이다.
작은 사회
윤 일병 폭행 치사 사건을 보며 나는 문득 섬노예 사건이 생각났다. 두 사건은 분명 다르지만, 어떤 측면에서는 또 비슷한 점이 있다.
폐쇄된 작은 사회에서 일어난 사건이라는 점이다.
섬노예 사건을 들여다보자. 사회 전체가 가해자였고, 치안을 담당해야 할 경찰마저 심지어 사건에 가담하여 섬노예라는 개인을 핍박하고 착취했다. 섬노예는 외부에 접촉할 수단을 차단당했다. 사실 만일 섬노예가 어찌 기회를 얻어 자신의 실상을 외부에 알릴 수 있게 되더라도, 변하는 건 없을 것이다. 주도적으로 그를 착취한 몇 사람이 가벼운 처벌을 받게 될 것이고, 그리고 – 섬노예는 섬으로 돌아가 더 큰 착취에 시달리게 될 것이다. 그곳이 자신이 속한 유일한 사회이기 때문이다.
윤 일병 사건도 비슷하다. 그를 둘러싼 사회 전체가 가해자였다. 부대를 통제하고 부대원을 보호해야 할 간부조차도 가해자였다. 윤 일병은 군대라는 사회에 갇혀 외부와 접촉할 수 없었으며, 심지어 가족 면회조차도 차단당했다. 설령 윤 일병이 어찌 기회를 얻어 자신의 실상을 알릴 수 있게 되더라도, 변하는 건 없을 것이다. 바로 그 부대가 윤 일병이 속한 유일한 사회이기 때문이다. 지금처럼 비극적인 결말이 없었다면, 적당히 사건이 봉합되고 누군가는 영창에 가고 – 그리고 다시 윤 일병은 사방이 가해자인 자신의 작은 사회로 돌아와야 했을지도 모른다.
작은 사회 내부의 제도는 자연히 유명무실해진다
폐쇄되고 자유가 박탈된 작은 사회. 벗어나고 싶다 해서 벗어날 수 없고, 마주치기 싫다 해서 마주치지 않을 수도 없다. 하루 24시간을 함께 생활해야 한다. 군대는 가장 극단적인 형태의 작은 사회다. 여기에서 폭력이나 집단괴롭힘이 시작된다면 피해자에게는 탈출구가 없다. 보통 사회라면, 여차하면 가해자로부터 도망이라도 칠 수 있다. 군대에서는 두 발에 족쇄가 묶여 있다. 가해자로부터 피해자가 도망칠 수가 없는 구조다. 도망치면 곧 탈영이다. 범죄다.
그러나, 이처럼 작은 사회의 문제가 극단적으로 나타날 수 있는 만큼, 해결책 또한 쉽게 찾을 수 있는 곳이 군대다. 자유를 박탈당한 것은 가해자도 마찬가지다. 가해자를 처벌하고 전출보내버릴 수도 있고, 아예 그 작은 사회를 뿔뿔이 해체해버릴 수도 있다. 보통 사회에서는 누구를 강제로 전입 전출시키거나 하나의 사회를 해체해버린다는 게 불가능하다. 하지만 군대에선 그게 가능하다.
이를 위한 보호 장치가 없는 것도 아니다. 가장 대표적이고 일반적인 것이 소원수리고, 그 외에도 이런저런 신고센터가 운영되고 있다.
하지만 모든 군필자들은 이 제도에 대해 코웃음을 칠 것이다. 이 제도조차도 결국 그 작은 사회 안에 속해있기 때문이다. 사회 전체가 가해자다. 간부조차도 방관자 또는 가해자가 될 수 있다. 일이 시끄러워지는 것을 원치 않는 이 작은 사회의 관리자들은 문제를 키우지 않고 적당히 봉합하기를 원할 수도 있다.
물론 관리자의 정의심이 불타올라, 일이 잘 풀려 가해자가 처벌받고 윤 일병이 그 작고 폭력적인 사회를 떠날 수도 있겠지만, 이를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 만일 그냥 적당한 훈계, 혹 영창 조치 정도로 사태를 봉합해버린다면? 이런 위험부담을 무릅쓰고 자신의 피해 사실을 알릴 만큼 강한 심장을 가진 사람은 얼마 되지 않을 것이다. 만일 일이 잘못 풀린다면, 나는 내가 고발했던 바로 그 가해자들과 함께, 작은 사회에서 다시 하루 24시간 종일을 생활해야 한다. 발에 족쇄가 달린 채로.
결국 제도 자체가 유명무실해지고 만다. 실제로도, 집단 괴롭힘에 시달리던 사병이 간부에게 전출을 직접적으로 요구하는 경우조차 행정적인 문제를 내세우며 이를 차일피일 미루는 일이 다반사라 한다.
결국 제도 자체가 이 작은 사회 바깥에 존재해야 한다. 피해자를 당장 가해자의 폭력으로부터 격리시킬 수 있는 그런 권한이 필요하며, 피해 사실이 입증되었을 때 재차 이를 영구적으로 격리할 그런 권한이 필요하다.
제도와 더불어, 책임자의 인식 전환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충분하지가 않다. 결국 제도를 운용하는 것은 사람이다. 단순히 이 작은 사회 바깥에 존재한다고 해서, 이 제도가 충분히 훌륭하게, 피해자 보호를 일차적인 목표로 삼고 제대로 작동할 수 있을 것인가? 고개를 가로젓게 된다. 학교 폭력, 가정 폭력 등에 대해서도 학교 바깥, 가정 바깥에서 이에 관여할 수 있는 수많은 제도가 만들어졌으나, 결국 운용하는 사람의 구태와 나태로 인해 유명무실한 제도로 전락한 게 한두번이 아니다.
제도도 제도지만, 사람의 의지 또한 중요하다. 박근혜 대통령은 이번 사건의 가해자와 방조자를 일벌백계하라고 주문했지만, 정작 제대로 된 사후 대책은 내놓지 않았다. 대책이라고 내놓은 “바른 인성과 창의력을 갖춘 전인적 인간을 길러내는 게 우리 교육의 목표가 돼야 한다”는 말은 공허하기 짝이 없다. 여당의 김무성 대표도 “아주 잘못된 교육환경에서 기인한 것”이라는 헛다리를 짚는데 그친다.
일벌백계가 효과가 없다는 건 아니다. 강력한 신호가 될 것이다. 하지만 그 유효기간은 수 년을 채 가지 못할 것이라 생각한다. 아마 시간이 지나고, 다시 억울한 희생자가 생기면, 또다시 그때 대통령이 될 누군가가 일벌백계를 부르짖게 되겠지. 사후약방문이라 해도 제대로 된 사후약방문이 필요한데, 지금의 처방은 사후에조차 그 효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할 게 분명해 보인다.
야당 또한 마찬가지다. 야당의 박영선 원내대표는 강력한 제도적 개선을 요구하는 대신 “사건의 핵심은 은폐이고 그 책임은 김관진 현 청와대 안보실장에 있다”며 문책론에 무게를 싣는다. 결론이 결국 또 이명박근혜 책임론이다. 그렇다면 김대중, 노무현 정부 때는 군내 부조리가 전혀 없기라도 했다는 것인가. 김관진을 문책하면 사태가 자동으로 해결되는 것인가.
강력한 의지가 있다면 얼마든지 제대로 작동하는 제도를 만들 수 있다. 학교 폭력, 가정 폭력 문제보다 오히려 해결 자체는 쉬운 게 군대 폭력 문제라고 생각한다. 책임자의 냉정한 현실 인식과 강력한 의지만 있다면 말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최고책임자부터 두 가지 모두 제대로 갖추고 있지 못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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