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일본인 재소자의 죽음
1926년 7월 23일 일본 우쓰노미야 형무소 도치기 지소(支所)에는 긴장이 흘렀어. 재소자 하나가 자살한 거야. 아니 자살을 했는지 누가 죽였는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어제까지 살아 숨쉬던 젊은 여자가 시신이 됐어.
그녀는 잡범 나부랭이가 아니라 그 이름도 무거운 국사범 (國事犯)이었다. 일본 천황을 죽이려는 음모를 꾸미다가 감옥에 들어왔고 그로 인해 사형 선고까지 받았으며 천황이 특별히 사면을 내린 은사장을 박박 찢어갈길 정도의 강골이었어. DNA에 관한한 남성보다 훨씬 우월해 보이는 조선인 여성이냐. 아니었어. 일본인이었어. 이름은 가네코 후미코라고 했고, 역시 같은 혐의로 구속돼 있던 조선인 박열의 연인이었다.
후미코의 아버지는 학생 신분으로 그녀를 낳았고 그녀를 호적에 올리지 않았다. 그녀의 유년 시절은 참혹한 생활의 연속이었다고 하네. 아버지는 어머니를 떠났고 어머니는 이 남자 저 남자를 떠돌았으며 그 와중에 후미코는 온갖 냉대와 학대를 경험하게 된다. 그러던 중 친할머니를 따라 조선으로 건너가게 되는데 충북 청주 인근에서 살았던 그녀는 그곳에서 중대한 경험을 하게 돼. 바로 3.1 운동이었어.
일본 헌병의 총칼 앞에서도 만세 부르며 맞서는 조선인들의 영상은 그녀의 뇌리 깊숙이 박히게 돼. 밑바닥 인생의 동병상련이랄지 그녀는 조선인들에게 친밀감을 느끼고 있었지만 일본인 할머니는 그녀가 조선인과 어울리는 것을 용서하지 않았고 그녀는 ‘죽고 싶을 만큼’의 구박을 받아야 했다고 해. 그녀의 조선에서의 소학교 학적부에는 고막이 터지는 둥 학대의 흔적이 남아 있다고 하네.
한국인 무정부주의자와의 사랑
이후 일본으로 건너왔지만 그 타고난 고된 팔자는 고쳐지지 않았어. 아버지는 후미코를 (우리나라 삼국시대나 고려시대의 개족보처럼) 절의 승려였던 외삼촌에게 시집보내려고 했다. 그런데 후미코가 잠깐 남자와 데이트한 것을 핑계로 외삼촌 겸 예비 신랑은 제멋대로 파혼을 선언했어. 결국 후미코는 아버지와의 연을 끊다시피 하고 스스로 자신의 인생을 개척하기로 결심해.
그러려면 공부를 해야 했지. 그런데 책을 읽고 새로운 사실에 눈을 뜨다보니 그녀에게는 완전히 다른 세상이 열렸고 그 세상에는 그녀를 따뜻하게 맞아주는 이들이 있었어. 무정부주의자나 사회주의자들이었다. 그러던 중 1922년 후미코는 하나의 벼락을 맞는다. 일본 유학생들이 펴낸 잡지 <조선 청년>에 실린 시가 그것이었어. 그 시의 제목은 민망하게도 ‘개새끼’였지.
“나는 개새끼로소이다/ 하늘을 보고 짖는/ 달을 보고 짖는/ 보잘것없는 나는/ 개새끼로소이다/ 높은 양반의 가랑이에서 뜨거운 것이 쏟아져 내가 목욕을 할 때/ 나도 그의 다리에다/ 뜨거운 줄기를 뿜어대는/ 나는 개새끼로소이다.”
이 시를 뭐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뜨거운 냉소? 차가운 분노? 하여간 이 시에 후미코는 완전히 반해 버렸다. “내가 찾고 있던 사람, 내가 하고 싶었던 일, 그것은 틀림없이 그 사람 안에 있다. 그 사람이야말로 내가 찾고 있던 사람이다.” 그 시를 지은 이가 박열이라는 조선인이었어.
박열은 무정부주의자였다. 훗날 그가 쓴 ‘나의 선언’에서 보듯 “멸하라! 모든 것을 멸하라! 불을 붙여라! 폭탄을 날려라! 독을 퍼트려라! 기요틴을 설치하라! 정부에, 의회에, 감옥에, 공장에, 인간시장에, 사원에, 교회에, 학교에, 마을에, 거리에. 모든 것을 멸할 것이다.”고 부르짖던 극단적인 아나키스트였지.
두 사람은 1923년 관동대지진 이후 일어난 검속에서 천황 폭살 음모를 꾸민 혐의로 체포돼. 박열이야 조선인으로서 당연히 할 일을 한 것이라지만 가네코 후미코는 박열만큼이나 강고하고 튼튼히 일본 제국주의를 규탄하고 자신의 정당함을 토로했어.
일본 쪽으로의 전향 권유를 뿌리친 후미코
우선 그녀는 박열을 사랑했다. “나는 박열을 사랑한다. 그의 모든 결점과 과실을 넘어 사랑한다….. 재판관에게 말해 둔다. 우리 둘을 함께 단두대에 세워 달라. 둘이 함께 죽는다면 나는 만족할 것이다. 박열에게 말해 둔다. 설령 재판관이 우리 둘을 갈라 놓더라도 나는 당신을 혼자 죽게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예심판사 다테마스 가이세이는 그녀가 무척이나 안타까왔던지 도합 일곱 번이나 되는 전향 제의를 건네. 안타까웠겠지. 남자 하나 잘못 만나 팔자 망치는 불쌍한 여자 보는 기분이었갰지.
이런 심리는 후일 80년대 운동권을 상대하던 한국의 공안당국에서도 발견돼. “남자친구 잘못 사귀어 뭣도 모르면서 데모하는 여자애들”이라는 편견은 당시 운동권 여학생들을 무지하게 열받게 했었으니. 하지만 “당신은 박열처럼 민족적 견지에서 시작한 것도 아닌데, 마음 좀 바꾸지 그래?”라고 묻는 판사에게 후미코는 여지없이 고개를 저었다.
“유서 깊은 일본 땅에서 태어난 당신에게 반성할 기회를 주고 싶은데?”라고 회유하자 “유서 깊은 일본 땅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내 생각과 방법이 옳고 필요하다고 믿습니다.”라고 단호하게 선언하기도 했어.
“저는 일본인이긴 하지만 일본인이 너무 증오스러워 화가 치밀곤 합니다…. 저는 정말이지 이런 운동(조선독립운동)을 속 편하게 남의 일이라고만 치부할 수 없습니다.” ( “식민지 조선을 사랑한 일본 제국의 아나키스트 가네다 후미코”- 산처럼)
사형을 면하게 해 준다는 사면장을 찢어발겼던 그녀는 판사의 배려(? 또는 음모)로 박열과 마지막 만남을 가져. 둘의 정다운 사진이 외부로 유출되어 일본 내각이 뒤흔들리는 한바탕 홍역을 치르게 되지만. “대역죄인들 둘이서 밀회를 하게 하다니!”
그리고 저승에서
그 얼마 후 후미코는 허리띠로 목을 맨다. 임신 중이었다는 설도 있어. 박열은 형에게 부탁하여 후미코의 시신을 고향 문경의 선산에 안장하게 한다. 하지만 박열의 인생은 연인의 삶과는 달리 길었고 파란만장했다. 박열은 감옥에서 일제의 닦달에 못이겨 전향하였다고 알려져 있고, 해방 후에는 조총련과 맞선 우익 민단에 가담했거든.
그러다 귀국해서 재혼하고 살다가 6.25 때는 또 납북을 당해. 하지만 남쪽 출신의 독립운동가들이 거의 싹쓸이당하던 중에도 살아남아 1974년 천수를 다하고 북한 혁명 열사릉에 묻힌다. 반면 “결코 혼자 죽도록 내버려두지 않겠다”며 조선인 남자에게 사랑을 고백하던, 조선인의 아픔과 함께 하고자 했고 조선의 치마 저고리를 입고 법정에 섰던 한 일본 여성 혁명가의 무덤은 또 한 번 외롭게 문경 산자락에 남겨져 있지, 그녀가 저승에서 박열을 만났을 때 과연 무어라고 했을지 궁금해.
처음 얘기로 돌아가서…. 에비타 페론은 자신의 계급적 상승과 남편의 성공을 위해 헌신했고 그 뜻을 이룬 여자고, 후미코는 자신보다 못한 조선인들의 해방을 위해 싸웠고 그 조선인 가운데 한 남자를 사랑한 남자야. 에비타에게는 너는 페론을 사랑한 거냐 아니면 네 계급 상승을 사랑한 거냐 물어볼 수 있을 것 같지만 후미코에게는 그렇게 묻기 어려울 것 같아. 그녀에게 그 질문은 의미가 별로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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