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처음 입학했을 때 살던 하숙집 방이 반지하였다. 공동 화장실, 공동 세면장에 2인 1실인데도 한 달에 31만 원을 냈다.
그 집에서 총 스무 명이 살았다. 밥 시간만 되면 2층짜리 주택의 옥탑방에서 서너 명이 함께 내려오는 놀라운 광경이 벌어지는 곳이었다. 내가 살던 반지하 옆방은 잠만 자던 남자 의대생이 살았다. 그 의대생은 새벽 2시에 들어와 5시에 나갔다. 좀비 같았다.
난방도 안 해주고 온수도 나오지 않는 인심 차가운 하숙집이었다. 반찬도 부실했다. 하지만 학기 중 이사는 허용되지 않았다. 윗방에 사는 부산 출신 언니는 야반도주하려다가 주인아저씨에게 걸려 남은 학기의 하숙비를 전부 내고서야 풀려났다고 했다. 배가 고파 전기냄비에 라면을 끓여 먹었는데, 내가 학교 간 사이 내 방에 들어왔던 주인아저씨는 전기세가 많이 나간다며 전기냄비를 쓰지 말라 했다. 반지하 하숙집 주인은 나에게 물질에 찌든, 아무 영혼도 없어 보이는, 실제로도 웃음을 보여준 적이 없는 서울 사람이었다.
기숙사 공사가 끝난 후에는 기숙사에 살았다. 그러다 4학년이 되어서 기숙사에 못 들어갔고, 다시 반지하 생활이 시작됐다. 이번에는 하숙집이 아니라 자취방이었다. 개별 화장실도 있었다. 그 집에서 만 3년을 살았다. 여름 장마철이면 창문틀에 빗방울이 튕겨 방 안으로 들어오곤 했지만, 다행히 침수된 적은 없었다. 그 빗방울이 튕기는 소리가 나쁘지 않았다.
어느 날 옆방에 도둑이 들었다. 엄밀히 말하면 옆방은 아니었다. 그 방은 1층에 있었으니까. 빠루로 문 뜯는 소리가 나서, 나는 경찰에 신고했다. 경찰이 출동하기까지 총 7분이 걸렸다. 도둑이 도망치다가 경찰을 빠루로 때려 사건이 커졌다.
난 법정에 증인으로 소환되었다. 내 112 신고 기록은 “옆집에 도둑이 들었어요” 였다. 변호인은 나에게 내 방 위치를 물었고, 나는 사진인지 그림인지 도면인지에 대고 내 방 위치를 지목했다. 그러자 변호인은 나에게 물었다.
증인은 지하에 사나요?
내가 그렇다고 대답하자, 이렇게 물었다.
피해자 집은 1층이니 옆집이 아니지 않나요?
나는 112 신고 당시 다급한 상황에서, 집 구조를 자세히 말할 여유가 없었다고 대답했다. 내가 똘똘하게 대답하자 변호인의 이어지는 질문은 더 거세졌다.
평일 오전 10시에 젊은 사람이 왜 직장도 안 가고 집에 있었나요?
그 질문을 듣고 나자, 나는 한없이 작아지기 시작했다. 네, 저는 고시생이라 집에 있었어요. 그 후에도 기억하고 싶지도 않은 공격적인 질문들이 이어졌고, 재판장의 제지를 듣고 나서야 공격이 멈췄다.
그날 변호인의 공격은 반지하 방에 대한 공격이었다. 정확히 말해서 ‘반지하 방에 살면서 평일 낮에 집에서 노는, 한심하고 도저히 신뢰할 수 없는 인간’으로 주제를 잡은 듯했다. 그날 나는 벌레 취급을 당한 기분이었다. 온몸이 떨려 왔다. 없이 살았어도, 열심히 살았다. 그런데 그날은 반지하 방에서 숱하게 많이 나오는 바퀴벌레처럼 쓸모없는 존재이니, 너의 말도 쓸모없다는 선고를 받은 기분이었다.
그날 밤 남산타워에 올랐다. 서울에 깔린 모래알처럼 많은 집이 보였다. 저 집들 중 내 집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 서러워서 울었다. 기필코 성공해서 집 없는 청년들의 거처를 마련해 주는 사업을 하겠다 결심했다. 그날 법정에서 나는 마지막으로 변호인을 향해 이렇게 외치고 퇴장했다.
돈을 얼마나 받았길래 저런 사람을 변호하면서 있는 사실을 없다고 하는 거예요?
법정을 나올 때에는 증인여비를 받았다. 내 생애 최고의 시급이었다. 좋았지만, 한편으로는 씁쓸함이 가시지 않았다.
집에 오니 도둑을 잡아줘서 고맙다며 옆방 사람이 커다란 치즈 케이크를 주고 갔다. 케이크 가게 앞에서 구경만 하던 것이었다. 그게 통째로 생기다니 너무 기뻐서 꿈인가, 생시인가 싶었다. 너무 맛있어서 절반을 앉은 자리에서 다 먹었다.
그 변호인은 반지하에 살아본 적이 없을 것이다. 반지하에 사는 사람은 한심하고 불쌍한 게 아니라 가진 것을 공평하게 나누지 못하는 사회에서 밀려난 사람들일 뿐이라는 것을 죽을 때까지 모를 것이다. 그리고 그 변호인은 그렇게 맛있는 치즈케이크를 먹어본 적도 없을 것이다. 진짜 불쌍하다.
원문: 정이수의 페이스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