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과 인문학의 만남,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따라잡기조차 버겁네요. 유홍준 교수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시리즈’(이하 ‘나문답’) 말이에요. 한반도를 두루 훑더니 어느새 일본으로 넘어가 있으니 그럴 수밖에요. 저는 시리즈의 여섯 번째 책인 ‘인생도처유상수’까지 따라 읽다가 잠시 머뭇거리고 있어요.
아무려나 ‘나문답’은 미덕이 많은 여행책이에요. ‘창비’(출판사)에서도 베스트셀러를 낼 수 있다는 걸 증명한 첫 번째 책이라는 점에서도 그렇거니와 진정한 미덕은 여행책의 수준을 한껏 끌어올렸다는 것이겠고요. 결코 가볍지 않고, 그렇다고 지나치게 무게를 잡는 것도 아닌, 그야말로 여행책의 새로운 경지를 보여줬다고 할까요. 상투적 서술로 일관됐던 기존의 여행서가 기껏 ‘여행안내서’나 ‘감성에세이’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면 ‘나문답’은 여행책의 새로운 서술양식, 즉 웅숭깊은 사유를 인문학적 소양으로 버무려낸 정신여행의 한 경지를 구축했다는 평가를 받을 만한 거죠.
이즈음 각종 미디어와 매체들이 쏟아내는 특집기사 혹은 특별기획의 타이틀 롤은 단연 ‘여름휴가’네요. 특별법 관철을 외치며 단식투쟁을 하고 있는 세월호 유가족들을 생각하면 한가하게 들릴 법도 하지만, 어쩌겠어요. 더위를 피해 휴가를 떠나고 싶은 충동이 이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니 말이에요. 그래서예요. 이래저래 홀가분한 여행이 불가능하다면 여행 대신 여행책이라도 한권 읽어두자는 거죠. 물론 떠날 수 있는 상황이라면 떠나는 게 더 낫겠지만요.
여행에 대한 인식과 기호, 방식이 다양해지는 것에 발맞춰 여행책 또한 변신에 변신을 거듭해 왔다고 볼 수 있어요. 특히 이즈음 서점에는 여행의 의미와 정보가 담긴 여행책들이 즐비하지요. 그중에서 나에게 꼭 맞는, 실질적으로 내게 도움이 될 만한 여행책을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에요. 선택의 기회가 는 만큼 선택의 어려움이 커진 거죠. 그럴 때는 우선 많은 사람의 입에 오르내렸던 스테디셀러를 찾아보는 게 좋은 방법이 아닐까 싶어요. 그중 대표적인 것이 바로 위에서 소개한 ‘나문답’ 시리즈일 테고요.
작가 여행기의 백미, 김훈의 <자전거 여행>
‘나문답’이 자연과 문화유산에 대한 재발견을 가능케 했다면 유럽으로 눈을 돌린 최영미의 <시대의 우울>은 문명과 예술의 ‘세기말증후군’을 잘 포착해 내고 있어요. 이어진 시인의 예술기행 <화가의 우연한 시선>은 예술작품 속에 농축돼 있는 시대상을 그리는 것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가 ‘근대의 예술작품을 응시하는 현대의 시선이 어떠해야 할지’를 새삼 고민하게 해주네요.
최영미의 예술기행을 읽다보면 자연스럽게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천상의 두 나라>가 떠오르기도 해요. 그야말로 ‘여행기’의 모범으로서 가치와 미덕을 두루 갖춘 책이라 할 수 있거든요. 작가 특유의 예민한 감각을 발휘하여 신비로운 전통과 정신을 가진 동양의 과거와 현재를 예리하게 파헤치고 관찰하면서 인간의 본질적인 자유와 새로운 희망을 찾고 있다는 점에서 최영미의 예술기행은 대작가 카잔차키스의 발자취를 역으로 좇고 있는 셈인 거죠.
‘작가 여행기’의 백미는 아무래도 김훈에게서 찾아야 할 듯해요. 담대하고 웅숭깊은 필력과 깊이 있는 사색으로 밀도와 질감을 느끼게 하면서도 예의 아날로그적 친근감을 놓치지 않는 김훈의 <자전거여행>은 당대 여행기의 절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거든요. 자연이 이루어놓은 무수식의 풍경들과 어쩔 수 없이 수식을 필요로 하는 인간의 사유가 어긋나는 듯 절묘하게 어우러져 이루어낸 페달과 페달을 밟은 근육들의 기록은 실로 압권이라 할 수 있죠.
집 팔아 송두리째 여행경비로 썼다는 소설가 김형경의 <사람풍경> 또한 인간의 내면을 향한 작가의 끝없는 탐구의 여정으로서 색다른 가치와 맛을 느끼게 하지요. 사실 모든 문학은 여행의 기록이라 할 수 있어요. 여행은 비단 몸의 움직임이 아니에요. 몸만 움직이는 건 단순한 ‘이동’이지만 몸과 마음이 함께 움직일 때, 비로소 여행이 되는 거죠.
그래서 여행의 기록을 기행문이라는 좁은 틀의 장르에 가두는 건 부당해요. 그것은 때로 시(詩)이며 소설이고, 역사이며 수상(隨想)이죠. 결국 모든 문학은 몸과 마음의 여행을 통해 길어 올린 것이에요. 따라서 이 세상의 모든 책, 모든 글은 여행기일 수밖에 없는 거죠.
스물아홉, 뉴턴하기 좋은 나이
신경숙의 소설집 <모르는 여인들>에 나오는 대사 역시 뇌리 깊은 곳을 파고드네요. 마흔이라는 나이는 “여행지에서 전화기를 붙잡는 대신 책을 읽을 수 있는 나이”라는 문장에서예요. 무슨 말이냐고요? 앞서 언급했듯이 여행은 단지 몸으로, 어떤 곳으로의 물리적인 이동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잖아요. 중요한 건 늘 새로운 어떤 것을 찾으려는 마음이고, 그것은 종내 책읽기를 통한 심리여행, 혹은 정서여행으로 귀결되는 거죠.
최근 가장 뜨거운 여행책 한 권을 꼽으라면 단연 <내가 사랑한 유럽 TOP10: 꿈만 꾸어도 좋다, 당장 떠나도 좋다>(정여울 저, 홍익출판사 간)가 꼽힐 거예요. 거기 이런 문장이 나오네요.
“그렇게 밤의 풍경을 제대로 감상하는 법을 몰랐던, 감정만 지나치게 풍부했지 경험은 협소하기 이를 데 없었던 내가 처음으로 야경의 아름다움을 깨달은 건 첫 번째 유럽여행 때였다.(…) 유럽의 밤열차는 내게 돌아오지 않는 시간을, 돌아갈 수 없는 공간을 그리워하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중요한 것은 그리하여 ‘유럽’이 아니라 ‘여행’ 자체다. 우리가 단단히 무장한 마음의 빗장을 열고 세상을 바라본다면, 이 삭막한 도시도 언젠가는 아름다운 엽서 속의 함초롬한 풍경으로 거듭날 것이다.”
작가가 스물아홉 살 때 시작한 첫 유럽여행의 감흥이 그대로 전해져 오는 느낌이에요. 마침 젊은 작가 이홍의 소설 <걸프렌즈>에 ‘스물아홉 살’에 대한 얘기가 나오네요. “스물아홉은 유턴하기 좋은 나이인 거 같다. 헤어진 애인에게 다시 돌아가든, 사귀던 남자에게 이별을 고하든, 훌쩍 여행을 떠나든…”이라는. 이어서 맞닥뜨릴 서른 살은 더 섬뜩하지요. 김광석의 노랫말이 감성코드로 ‘서른 즈음에’를 읊는다면 시인 최승자는 섬뜩하리만치 겁을 주네요. “이렇게 살 수도, 이렇게 죽을 수도 없을 때, 서른은 온다.”고 읊고 있으니 말이에요.
굳이 노래와 시의 한 구절을 끄집어내는 데는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요. 꼭 스물아홉일 필요는 없어요. 누구나 시인이거나 가인일 필요도 없어요. 삶의 ‘터닝 포인트’가 필요한 건 누구에게나 마찬가지일 테니까요. 그때가 바로 미련도 망설임도 없이 떠나야 할 때가 아닐까 싶어요.
절망의 봄바람을 밀어내고 아무 것도 해결되지 않고, 아무 것도 해소되지 않은 현실 속으로 불쑥 쳐들어온 여름, 그 여름의 더위를 이기기 위해, 더러는 해소되지 않은 봄의 절망을 다시 희망의 산들바람으로 바꾸기 위한 재충전의 시간이 필요한 때가 아닌가 싶어요. 스물아홉이라도 좋고, 서른 즈음이라도 좋고, 하마 마흔이라도, 쉰이라도 상관없이.
Tip, 내맘대로 여행책 ‘베스트10’
1. 김 훈 <자전거 여행>
2. 유홍준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1>
3. 김형경 <사람풍경>
4. 최영미 <화가의 우연한 시선> (함께 읽으면 좋은 저자의 다른 책, <시대의 우울>)
5. 피에르 바야르 <여행하지 않은 곳에 대해 말하는 법>
6. 정찬주 <돈황 가는 길> (함께 읽으면 좋은 저자의 다른 책, <암자로 가는 길>)
7. 레베카 라인하르트 <방황의 기술>
8. 알랭 드 보통 <여행의 기술>
9. 이병률 <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
10. 체 게바라 <모터사이클 다이어리>
그 외 읽을 만한 여행 책들…
11. 니코스 카잔차키스 <천상의 두 나라>
12. 정여울 <내가 사랑한 유럽 TOP10>
13. 서명숙 <제주올레여행 : 놀멍 쉬멍 걸으멍>
14. 한비야 <한비야의 중국견문록>, <지도 밖으로 행군하라>
15. 정수일 <실크로드 문명기행>, <한국 속의 세계1,2>
16. 손미나 <스페인 너는 자유다>
(피처 이미지 출처: 도란도란 책 이야기)
원문: 대안미디어 너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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