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해가 그렇지 않을까마는 1983년은 다사다난이라는 표현이 어울리는 한 해였다.
이웅평 대위가 미그기를 몰고 넘어오면서 휴전 후 최초로 공습경보가 울렸고, 중국 민항기가 피랍되어 북한 영공을 통과해 남한의 춘천에 불시착했다. 이를 통해 남한은 왕년의 철천지 원수 중공을 중화인민공화국으로 부르고 중화인민공화국으로부터 대한민국의 호칭을 받는 첫경험을 하게 된다. 그리고 10월에는 전두환 (나는 이 자에게만큼은 대통령 호칭을 붙이지 않는다)을 노린 북한의 아웅산 테러가 있었다. 그 가운데 5월 7일 뜻밖의 인물이 대한민국 땅을 밟았다.
인민군 13사단 민경대대 참모장 신중철이었다. 그의 말에 따르면 그는 김일성 군사대학 졸업자이며 군관학교에서 김일성의 아들 김평일과 1, 2등을 다툰 엘리트 장교였다. 또한 한국군으로 보면 영관급은 되어야 할 참모장을 일찍부터 하고 있었던 것으로 미루어 나름 북한에서는 잘나가던 장교임은 맞아 보였다.
고위 장교의 아내를 유혹했다는 설도 있지만 하여간 무슨 사고를 쳤을 것이다. 기자회견에서처럼 “서울의 자유를 동경하고 있었고 이웅평 대위의 귀순을 알고” 이에 힘입어 귀순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남한 실상을 알면 인민군 70퍼센트가 귀순할 것”이라는 말도 흰소리였을 가능성이 크다. 적어도 당시 북한은 지금의 북한은 아니었으니까.
이 신중철 대위는 제 4땅굴에 대한 정보를 제공했고 (이 땅굴이 진짜 땅굴을 숨기기 위한 위장 땅굴이며, 신중철은 이를 위해 파견된 위장간첩이라 믿는 이들도 있다. 반면 그 정보가 시원찮았다는 견해도 있다.) 그는 바로 한국군 소령으로 변신한다.
그는 인민군 엘리트 장교 출신답게 한국군에서도 두각을 드러냈다. 4년만에 중령을 달더니 귀순 8년 후에는 무궁화 셋 대령을 어깨에 매다는 기염을 토한 것이다. 물론 끌어주는 사람도 있었지만 한국군 엘리트로서도 쉽지 않은 승진이었다. 그는 그 자체로 정보의 보고였던 것이다.
“신씨의 귀순은 우리 군 내부적으로도 상당히 가치 있는 것이었다. 그는 사병에서 출발해 수색대대장에 오름으로써 북한군의 전술(戰術)을 제대로 공부한 군인이었다. 북한군의 대대(大隊)전술 이론과 실무를 체계적으로 익힌 최초의 귀순자이기도 했다.우리 군은 그를 통해 전시(戰時)의 북한군이 어떤 체계로 움직이는지를 고스란히 파악할 수 있었다. 한 예비역 장성은 “신씨를 통해 북한의 전술체계를 속속들이 파악함으로써 방어 위주로 짜여 있던 우리 군의 전시 작전개념에 공격개념이 추가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월간중앙 2001.7, 南과 北 어디에도 뿌리 못내린 ‘浮草인생’55년)
그는 똑똑한 사람이었다. 오히려 남한 사람보다 더 패기 있고 자신만만했다고 한다. 결혼한 과정도 재미있다. 환영 대회에서 꽃다발을 건넨 여학생에게 ‘꽂혀서’ “저 여학생 연락처 좀 주시라요.” 해서 과감하게 접근했고 띠동갑 연하 아내를 맞게 된 것이다. 이북에 처자식을 두고 온 사람치고는 너무도 빠른 변신과 결단. 군 생활도 튀었다.
운동 경기를 하더라도 상관을 배려해서 져주기 따위는 꿈도 꾸지 않아 상관의 심기에 일희일비하는 한국군 장교들을 조마조마하게 만드는 ‘눈치없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한국군의 비윗장을 건드리는 얘기도 많이 털어놨다고 한다. 특히 구타 문제.
“북한에서 13년 동안 군생활을 했지만 나는 단 한번도 맞거나 때려본 적이 없다. 인격대 인격끼리 만나 어떻게 패고 맞을 수 있느냐.”
그로부터 30년이 지난 지금도 ‘구타 근절’이 성취되지 않은 한국 군대에서 ‘구타 사고’에 대한 진지한 접근이 시작된 것은 이런 신중철의 타박 때문도 있다고 한다. 그럼 어떻게 인민군의 군기는 유지되며 어떻게 군대는 돌아가는가. 지만원을 만난 신중철은 이렇게 얘기했다고 한다.
“북한 사단장은 토의 주재를 참 잘 합니다. 소위도 사단장을 마음대로 비판하지요. 진나게 토의하면 결론이 나옵니다. 사단장이 결론을 요약하지요. 그래서 박수를 치는 겁니다. 남한에서는 그 박수치는 걸 강제로 치는 것이라고 교육하고 있더군요. 그런데 정작 민주군대라고 하는 한국 사단에서는 예외 없이 사단장이 황제더군요. 같은 식탁에서 식사를 하면서도 대령도 사단장에게 제대로 소신 있는 말을 하지 못하더군요. 절절 매는 대령들이 대부분이구요. 전시에 어떻게 작전을 위한 토의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매우 위험합디다.”
자신의 정보 가치와 그를 통한 공헌, 그리고 그를 이쁘게 본 사람들의 배려로 대령까지는 승승장구 올라갔지만 언감생심 별은 어려웠을 것 같다. 아마 군대를 갔다 온 사람들은 그 이유를 알 것이다. 한국 사람도 그런 장교 별 달기 힘들다는 것을. 김일성이 죽었을 때 그는 대령이었다.
대선배(?) 김신조와 만난 자리에서 신중철은 조심스럽게도 이런 말을 한다. “누구보다도 김일성이 밉지만”이라는 단서를 달면서 “이쪽에서도 ‘잘죽었다’ 식의 반응은 자제하는 것이 좋겠다.” 김일성 분향소가 설치됐다고 대역죄마냥 몰아치던 그 즈음, 이 언론 보도를 스크랩한 기무대원은 신중철 대령의 ‘국가관’에 대해 어떤 보고서를 올렸을까.
“20년을 살아도 도무지 적응이 안돼.” 그가 남긴 말이다. 군 동료들과의 관계가 엉킨 상황에서 홧김에 또는 시위용으로 낸 전역원이 덜컥 받아들여져 제대한 뒤 그에게 밀어닥친 한국 사회는 똑똑한 그로서도 감당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사고를 낸 뒤 본인은 한다고 했는데 사후 조처 미숙으로 뺑소니 처리가 되어 교수 임용에서 탈락했을 때는 정말 눈앞도 암담했을 것이다.
결국 가정 생활도 파탄을 맞았고 그는 이발소 안마사와 함께 중국으로 출국한 것이 드러나 또 한 번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른다. 오랫 동안 그 존재를 숨겨 온 이중간첩 아닌가 하는 영화같은 이야기들이 흘러나왔고 실제로 그는 한국군 대령이었으니 그가 넘어왔을 때 이상의 정보 가치를 두르고 있긴 했을 것이다. 그러나 군 당국은 일단 그를 부인했다. 그냥 평범한 도피행각이라는 것이다. 모처에서 그를 발견해 귀국을 종용했다는 소식까지 나와 있다.
그 뒤 신중철의 이름은 검색에 등장하지 않는다. 그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남과 북 모두에서 인정받을만큼 똑똑한 군인이었던 그는 지금 어느 틈바구니에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한국 정보 요원 팔에 끌려 고개를 숙인 채 귀국해서 어느 변두리 단칸방에서 안마사와 살림을 차리고 살아가고 있을까. 아니면 혹자의 추정대로 여유작작한 웃음을 띠고 압록강을 건너 연락부 요원들의 환영을 받으며 “동무는 영웅이오!” 소리를 들은 뒤 북한의 처자식을 만나 살아가고 있을까.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나는 모르겠다. 하지만 그의 일생 또한 세상 어느 나라에서도 찾기 힘든, 대한민국과 조선인민공화국 사이의 험로에서나 피어날 수 있는 불운한 꽃이었다는 것만은 알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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