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Obery M. Hendricks가 Huffington Post에 기고한 The Uncompromising Anti-Capitalism of Martin Luther King Jr.를 허락 하 번역한 글입니다. 소제목은 편집자가 임의로 삽입했습니다.
마틴 루터킹의 반자본주의적 삶을 지운 마틴 루터킹 데이
마틴 루터킹 데이가 있은 후로, 공식적으로 그를 기렸던 수천개의 축사가 있었다. 그의 삶과 행적, 사상을 기리는 축사들 가운데, 그가 미국의 자본주의에 완고하게 반대했던 점을 기리는 축사는 없었다.
반 자본주의적인 입장이 마틴 루터킹 삶의 후반부 삶에 한에서만 발전된 것은 아니다. 그의 반자본주의적 입장은 어린시절 부터 죽음에 이르기 까지 전 생애에 있었던 것이며, 공공 노조를 위한 안정적인 임금과 노동조건은 그가 전 삶에 걸쳐 요구한 것이었다. 왜 마틴 루터킹은 그렇게도 자본주의에 반대 했던 걸까?
전 여러분이 이미 제가 저의 경제관이 자본주의 보다는 사회주의적이라고 하는 걸 알고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자본주의]는 숭고하고 높은 동기를 가지고 출발했습니다.. 그러나 인류의 다른 체제들과 마찬가지로 자본주의는 사람들을 물질의 희생자로 전락시켜 마침내 반기를 들도록 했습니다. 오늘날 자본주의는 오랫 동안 살아남았고, 더이상은 쓸모 없게 되었습니다. (코레타 스콧에게 보낸 편지, 6.18. 1952)
언젠가 우린 이 질문을 해야만 합니다, “왜 4천만명의 가난한 사람들이 미국에 존재하는가?”… 우리가 이 질문을 할 때, 비로소 자본주의 경제체제에 대한 질문을 던질 수 있습니다. (남부지역 크리스천 리더쉽 컨퍼런스에서의 마지막 연설, 1967)
한 단면으로, 자본주의는 무한한 부를 유지시켜 왔고, 삶의 질 표준을 크게 향상시켰다. 일반적으로 삶을 보다 안락하게 만들었고, 대부분의 자본주의 국가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삶의 정도를 다양한 방식으로 안락하게 유지시켰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자본주의는 인류에게 노역과 부의 착취를 요구하였다. 자본주의는 무한한 고통과 구조적 억압과 착취, 그리고 사회적 소외로 부터 사람들을 취약하게 만들었다. 자본주의의 업적은 사실 이기심과 공격적인 행동에 의한 성취였다. 사람 보다 이윤을 가치있게 여기는 자본주의는, 물질적 가치들이 영적 가치들보다 중시되도록 했고, 사회적 책임으로 부터 면책권을 주었으며, 사람을 언제든 버려질수 있는 상품으로 다루어지도록 했다.
더 나아가, 자본주의는 “1인, 1투표” 라는 정치적 민주주의와는 양립할 수 없다. 대부분의 자본가들은 막강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자본가 한 사람의 힘은 다수 미국인들 보다 강력하다. 자본주의는 노동현장에서의 민주주의를 허용하지 않기에, 경제 민주화 또한 불가능하다. 노동자들은 온전히 자본가들이 정한 룰과 명령을 따라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지독간 가난을 감수해야 하고, 심한 경우 물리적 폭력에 고통받게 된다.
성서에 기반해 자본주의를 반대한 마틴 루터 킹
그러나, 마틴 루터 킹으로 하여금 자본주의를 반대하게 한 가장 강력한 요인은 절망적인 빈곤과 과도한 부의 극심한 격차 속에서 고통받는 이들을 상기시켜준 성서 신앙에 있었다. 이런 바탕에서 마틴 루터 킹은 자본주의야말로 그의 신앙을 모욕하는 것이라고 여겼다.
마틴 루터킹의 윤리관는 확고하게 아모스, 미가, 그리고 이사야 처럼 부유하고 권력이 막강했던 이들에게 mishpat(근본적 평등주의의 정의), hesed (확고한 사랑; 최소한의 정치적 시민권), 그리고 emet(공적 그리고 사적인 진실함) 과 같은 윤리적 원칙들에 의한 통치를 역설한 성서의 급진적 예언자 전통에 속해있다.
이런 윤리적 위치에 의한 정치적 함의들은 예언자 이사야의 선포에 그대로 반영된다 ; “hesed (확고한 사랑)위에 왕좌가 설 것이다.. 그리고 emet (진실한) mishpat (평등주의적 정의)를 추구하는 통치자가 그 자리에 앉을 것이다. 그리고 지체없이 sadiqah (정의를 세우는 행동)을 행할 것이다.” (이사야 16:5). 우리가 알고있는, 이런 예언자들이 정의내린 윤리적 망토를 걸친 왕은 근본적으로 반성서적인 탐욕의 자본주의 윤리와 서로 먹고 먹히는 사적 금융 거래를 반대할 것이다.
자본주의의 해악스러움은 오늘날 미국을 병들게한 비정상적인 부의 불평등에서 드러난다. 미국 인구의 15%, 4천 7백만 가량의 사람들은 공식적인 빈곤률 4인 가정당 한해 24,000 달러의 소득으로 살아가고 있다. 1천8백만 이상의 더욱 빈곤한 사람들은 130% 의 빈곤선에 속한 채 살아가고 있다. 보다 수치스러운 것은 전체 미국아이들의 20%가 빈곤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자본가들과 그들의 정치적 꼭두각시들은 모든 미국의 노동자들이 기본적인 생활할 수 있는 임금을 받도록 하는 데에, 온갖 수단을 다 써서 반대하며 싸우고 있다. 마틴 루터 킹은 경제는 생활이 가능한 보편적 최저 임금을 감당할수 없다고 주장한 자본가들의 논리를 거부했다. 킹 목사가 말하길, “하느님은 그의 모든 자녀들이 삶의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들을 갖길 바라신다, 하느님은 보편적이고 충분한 것들을 남기셨고, 그러한 목적을 위해 베푸신 것이다.”
어떻게 자본주의 고유의 구조적 불의가 대체될수 있을까? 마틴 루터킹의 대답은 민주적 사회주의 (Democratic Socialism) 였다. 1960년대 중반, SCLC 스테프와 함께 미팅을 갖는데, 마틴 루터 킹은 “한 가지 사실에 대해 말할게 있는 데, 그것은 그가 자본주의를 가난한 이들의 궁핍을 해결 해줄 것으로 믿지 않았고, 우리에게 사회주의적인 것을 관철할 필요가 있다는 것과 민주적인 사회주의 형태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1966년 스테프 들에게 한 연설에서 마틴 루터 킹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우리는 자본주의는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부의 분배가 더 나을 것이 분명하고, 아마 미국은 민주적 사회주의로 향해 가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이 생각하는 대로 요청되고 있고, 민주주의가 요청되고, 혹은 민주적 사회주의가 요청됩니다. 이 나라에 속한 하느님의 모든 자녀들에게 부의 분배가 훨신 나은 선택일 것입니다.”
마틴 루터 킹의 타협할 수 없는 가치: 성숙된 민주주의
비록 마틴 루터 킹이 부자와 가난한 자 사이에서 수정주의자로서 민주적 사회주의를 특별히 지지했지만, 분명한 점은 그의 개인적 관심이 민주적 사회주의나 다른 어떤 이데올로기가 그 자체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함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의 관심은 가난한 사람들의 궁핍한 삶이 개선되는 것이었고, 모든 사람이 동등하게 성공할수 있는 기회를 갖는 것이었으며, 노동자들이 노동현장에서 민주적인 권리를 갖게 되는 것이었다.
자본주의 하에서 노동자들은 정치적 권리를 가진 시민이지만, 노동 조건이나 시간, 임금 등에 대해서 분명히 권리를 주장하거나 말할 수 없는 상황에 놓여있다. 기업 자본가들은 현재 노동자들이 자신의 권리를 말할수 있는 그리고 노동 현장 밖에서 활동할 수 있는 권리들에 대한 통제권을 강화하고 있다.
미국 전국 노동 관계 위원회가 최근에 진일보한 행보를 하려 할때, 조지아 퍼시픽의 소유주 코크 형제는 노동자들이 소셜 미디어로 자신들의 임금, 노동시간, 고용환경에 대한 정보를 공유할때, 이를 무력화 시킬 수 있었다. 노동자들의 삶에 대한 기업 자본자들의 통제력 확장은 미국 노동현장의 신 봉건주의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마틴 루터 킹은 분명히 민주적 사회주의를 선호했음에도, 그는 부자와 가난한 사람들 사이의 극심한 격차를 해소 할수 있는 정치, 경제적 형태라면 무엇이든 지지했다. 그에게 있어 타협할수 없는 것은 바로 민주주의였다. 이것이 마틴 루터 킹이 대중의 투표에 의한 민주적 결정으로 변화를 가져와야 한다는 이해와 승인의 의미로서의 민주주의에 기반한 민주적 사회주의를 강조했던 이유다.
따라서 그의 민주 사회주의는 반민주주의로서 해석의 여지는 없다. 그의 신앙은 평등주의적 정의의 윤리였기에, 마틴 루터 킹은 공산주의나 혹은 그 밖의 어떤 권위주의적 형태를 인정하지 않았다. 이런 입장은 그의 행적에서 수없이 되풀이 된다.
마틴 루터킹에게 민주 사회주의는 사람을 우선하는, 성숙하게 협력하는 경제 관계들로서의 인간 사회를 지향하는 관점이자, 세계관, 접근 그 이상이었다. 이는 서로 먹고 먹히는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경쟁과 기업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짓밟아 버리는 이기적 개인주의와 탐욕의 가치와는 상반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마틴 루터 킹은 보다 성숙된 민주주의를 원했다. 1962년 그가 소매상 조합에서 했던 연설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전 민주주의가 보다 나은 부의 분배를 만들어낼 토대이며, 그 아래서 우리가 일하게 되리라 믿습니다.” 민주주의에 대한 믿음은 일찍이 1955년 그가 공개적으로 몽고메리 진보연합에서 했던 첫 연설에서도 울려펴진다. “우리는 민주주의를 향한 우리의 사랑으로 이곳에 서 있습니다. 우리는 얇은 종이가 거대한 행동으로 이 땅위의 정부 형태를 가장 위대하게 바꿀수 있다는 깊은 민주주의에 대한 믿음으로 이자리에 섰습니다.”
미국이 다시 태어난다는 것: 자본주의의 재단 앞에 무릎꿇지 않는 것
그렇다, 마틴 루터킹은 민주주의를 원했고, 더더욱 민주주의를 원했다. 그의 주요 과업은 경제 민주화 달성을 위한 임시적 법안이나 파편적인 정책에만 머물렀던 것은 아니었다. “수년간 저는 현존하는 사회기관들을 개혁할 담론에 종사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말하길 “작은 변화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리고 작은 변화가 저기에도 있습니다, 그러나 전 좀 다르게 느낍니다. 우리는 사회 전체를 고쳐 세워야 합니다. 가치의 혁명입니다.”
이것은 그가 1966년 견지했던 견해로, Ebony 잡지에 실린 기사이다. “우리의 목표,” 그는 이렇게 적었다. “우리의 목표는 사랑이 넘치는 공동체를 만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선 우리 영혼의 질적 변화 뿐 아니라 우리 삶의 (경제적) 양적인 변화도 요구될 겁니다.” 그리고 또한 이것은 1967년 SCLC 그의 마지막 연설에서의 그가 가졌던 견해이다. “오늘 전 말합니다.. ‘미국은 다시 태어나야 합니다!”
마틴 루터 킹이 말한 “미국의 다시 태어남”은 무슨 의미일까? 마틴 루터 킹의 말과 행동으로 부터, 우리는 자신있게 몇가지를 견해들을 대담하게 실천해 볼 수 있다 : 이웃사랑과 평등주의적 정의에 의한 움직이는 미국의 정책들; 먹고 먹히는 경쟁 대신 협력과 상생에 기초한 경제 체제, 이기적 가치가 아닌 궁핍한 이들을 향한 정치적 사회적 책임; 이윤이 아닌 사람의 가치를 중시하는 구조의 경제관계, 엄격한 의미로서 “일인, 일투표”의 정치적 민주주의가 되살아난 미국; 사실상의 계급 혹은 전 노동자가 노동현장이나 그들의 운명에 대해 아무말 하지 못한체로 착취당하는 것에 대해서 반대하는 경제 민주주의.
마틴 루터킹에게 미국이 타시 태어난다고 하는 것은 어떤 의미였을까? “가난을 만들어내는 구조를 다시 고쳐세우는 것” 마틴 루터 킹의 이런 이해가 반영된 미국. “가난에 대한 저주는 사회적으로 인육을 먹는 행위 만큼이나 잔혹하고, 무지한 것입니다.” 마틴루터킹이 열정적으로 느꼈던 미국. “우리 스스로 온전히, 직접 그리고, 곧 바로 빈곤을 폐기하는 그런 때가 우리에게 오고 있습니다.” 마틴 루터킹이 행동하고 믿었던 그 미국.
마틴 루터 킹의 행동에 있어 “미국이 다시 태어난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이 었을까? 여러 가지들 가운데, 자본주의의 재단 앞에 무릎끓지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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