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강점기, 일본은 우리 민족의 문화를 말살하기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 역시 마찬가지였죠.
그렇게 혼란한 시대 상황 속에서, 우리 말과 글을 지키기 위해 노력한 이들이 있습니다. 이번 기사에서는 우리 얼을 지키고자 마지막까지 힘쓴 독립운동가이자 국어학자, 역사학자인 이윤재 선생을 이야기해보려 합니다.
우리는 꼭 바라고 나아갈 희망 한 가지가 있다. 그를 여기에서 기다랗게 말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모를 리 없다. 이 희망만은 어느 때 까지든지 꼭 이루고야 말리라는 것까지도 잘 안다. 우리는 이 희망을 이루면 잘 살고, 이루지 못하면 잘 살지 못할 것까지도 안다. …
오늘부터 우리가 전민족적으로 대방침을 세우고 대계획을 정하자. 그리하여 너니 나니 가리지 말고 오직 한 깃발 아래 모여서 저기 보이는 한 목표를 향하여 서로 손목 잡고 나아가자. 이것이 이 신년에 정할 조선 민족의 만전지계라 부르짖는다.”
- 1927년 이윤재 선생이 신년의 희망을 밝힌 글 중에서([동광] 제9호, 1927. 1)
한뫼 이윤재 선생은 경남 김해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김해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김해 합성학교에서 교편을 잡았고, 이후에는 대구 계성학교에서 수업하였죠. 1913년부터는 마산의 창신학교, 의신여학교에서 교편을 잡다가 평안북도 영변의 숭덕학교 교사로 재직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3·1운동에 관련되어 평양 감옥에서 3년간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습니다.
출소 후, 1921년에는 중국으로 건너가 북경 대학의 사학과에서 공부하였습니다. 1924년 귀국한 후로는 정주의 오산학교를 비롯하여 협성·경신·동덕·배재·중앙 등의 학교에서 교편을 잡았습니다.
그리고 1927년, 선생은 조선 사람에게 조선말 사전 한 권이 없음을 통탄하며 조선어학회의 전신인 조선어연구회에 가입하였습니다. 이 연구회는 표면적으로는 ‘조선어의 정확한 법리 연구’를 목적으로 하였지만, 내면적으로는 ‘우리 말과 글의 보급을 통한 민족독립 달성’을 지향했죠. 계명구락부(啓明俱樂部)의 조선어사전 편찬위원이 되었으며, 민족정신의 보전·계승을 위한 잡지 『한빛』을 편집하고, 발행하였습니다.
1929년에는 조선어연구회·조선어사전편찬위원회의 집행위원, 1930년 한글맞춤법통일안의 제정위원이 되어 국어 통일운동의 중진으로서 활동하기 시작하였는데요. 선생은 동지들과 더불어 사전 편찬 사업에 적극적으로 동참했습니다. 이 사업은 1929년 1월 독일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여 새로 조선어연구회에 가입한 이극로를 비롯한 기존 회원들의 활약으로 일대 전기를 맞았습니다.
즉, 선생을 비롯한 회원들의 노력으로 “말은 민족의 단위를 결정하는 가장 큰 요소이고, 말의 단위가 곧 민족의 단위이므로 조선말이 곧 조선 겨레이다.”라는 어문 민족주의적 인식이 퍼져나갔는데요. 이에 기반하여 “조선문화의 쇠퇴와 민족의 낙오는 무엇보다도 조선어문의 불통일에서 기인했다.”라고 하는 목소리가 커져 갔습니다.
선생은 1931년, 연희전문학교에서 강의를 맡았으며, 이 해부터 4년간 여름마다 동아일보사·조선일보사 등에서 벌인 한글강습회 강연을 위해 지방을 순회하였습니다. 또한, 1932년에는 조선어학회의 기관지 『한글』의 편집 및 발행 책임을 맡았는데요, 이는 주시경의 가르침을 받은 한글 배곧(조선어강습원) 출신이 주축으로 발행하였던 동명의 잡지를 계승한 것이었습니다.
…사 년 전 몇 분의 뜻 같은 이들끼리 「한글」 잡지를 내기 비롯하여 일 년 남아나 하여오다가, 온갖 것이 다 침체되는 우리의 일인지라, 이것마저 이어갈 힘이 모자라서, 지금까지 쉬게 된 것은 크게 유감되는 바이다.
우리는 이제 시대의 요구에 맞후며 본회의 사명을 다 하고저 하여 이 「한글」 잡지를 내게 된다. 이로써 우리 한글의 정리와 통일이 완성하는 지경에 이를 것을 믿는다. 무릇 조선 말을 하고, 조선 글을 쓰는 이로써, 누가 이에 공명하지 아니할 이 잇으랴.…
- 이윤재 선생이 『한글』 재창간의 이유를 「한글을 처음 내면서」라는 글을 통해 설명한 부분 中
1934년에는 진단학회(震檀學會) 창립에 참여하였습니다. 진단학회는 실증적인 연구방법론으로 식민사학에 대항하며 <진단학보>를 통해 회원들의 연구 성과를 발표하며 국학의 발전을 이루었습니다. 그리고 이듬해 선생은 감리교신학교에서 강의를 맡았으며, 조선어표준어사정위원회의 사정 위원이 되었고, 1936년에는 조선어사전편찬위원회의 편찬전임집필위원이 되었습니다. 한편, 1937년에는 안창호가 조직한 민족운동단체인 ‘수양동우회(修養同友會)’ 사건에 관련되어 서대문 감옥에서 약 1년 반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습니다.
출감 후, 선생은 기독 신문사 주필로서 한글 보급과 우리말 사전 편찬에 주력하던 중 1942년, 이른바 ‘조선어학회사건’으로 동지들과 함께 홍원 경찰서에 붙잡히고 맙니다. 일제 경찰은 1942년 10월, 눈엣가시처럼 여기던 조선어학회 주요 인사를 대거 체포하였으며, 조선어학회 회원들과 사전 편찬 후원 회원들 전원을 검거하였습니다. 그리고 사전 원고와 수십만 장의 자료 카드를 압수, 조선어사전 편찬 사업을 중단시키고 조선어학회를 강제 해산시켰습니다.
이후 1년여의 조사를 통해 일제 경찰은 “민족운동의 한 가지 형태로서 소위 어문운동은 민족 고유의 어문의 정리, 통일, 보급을 도모하는 하나의 민족운동인 동시에 가장 심모원려(深謀遠慮)를 포함한 민족 독립운동의 점진형태(漸進形態)다”는 이유로 치안유지법 제1조의 내란죄를 적용하였습니다. 내란죄의 적용을 위해 조선어학회 관련 인사들에게는 소위 ‘육전’ ‘해전’ ‘공중전’이라고 불리는 잔혹한 고문과 악형이 가해졌습니다.
특히 선생에 대한 고문은 더욱 가혹했는데요. 이는 선생이 3·1운동 참여 전적이 있고, 민족주의 역사학자로서 한국사 관련 글을 발표해 왔을 뿐만 아니라, 사전 편찬의 실무 책임자로서 상해에서 독립운동가 김두봉을 만난 적이 있는 전력 때문으로 이해됩니다. 결국, 선생은 1943년 12월 8일 새벽, 함흥 감옥의 독방에서 55세의 나이로 옥사하고 말았습니다.
선생의 순국 이후, 그의 유고 『표준한글사전』(1953)이 간행되었습니다. 이는 조선어학회에서 발표한 「한글맞춤법통일안」과 「사정한 조선어표준말 모음」을 기준으로 엮은 것이었습니다. 『표준한글사전』은 75000여 어휘의 뜻을 풀이한 사전으로, 일상에서 많이 쓰이는 순우리말과 한자말, 널리 쓰이는 외래어와 사투리 및 특별히 많이 쓰이는 전문어를 골라 뜻을 풀이하였습니다.
「한글맞춤법통일안」은 1933년, 조선어학회가 제정한 한글맞춤법을 토대로 한 한국의 정서법(正書法) 통일안입니다. 또한, 「사정한 조선어표준말모음」은 조선어학회가 한국어의 표준어를 확립시킬 필요성이 있다는 판단 아래 조선어표준어사정위원회를 발족, 당시의 한글날인 1936년 10월 28일에 발표한 것이었습니다. 훗날,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한 바 있습니다.
이처럼 풍전등화와 같은 국면 속에서도 우리 말과 글을 보전하기 위해 애쓴 이윤재 선생의 노력을 잊어서는 절대 안 될 것입니다. 12월은 선생의 기일이 있는 날입니다. 목숨을 바쳐 민족의 말과 글을 지키려 노력한 선생의 정신을 한 번쯤은 그려봤으면 합니다.
원문: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의 브런치 / 글·기획: 대한민국역사박물관 한걸음기자단 8기 양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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