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스팸의 제철은 명절
추석과 설 전후로 스팸이 제철이다. 200g에 3,000원 안팎이던 것이 당근마켓에서는 2,000원 초중반 대까지 떨어진다. 선물 받은 것들을 처분하는 것이다. 채식이라도 하는 것인지, 돈이 급한 것인지 판매자의 사정은 몰라도 순해진 가격이 고마울 따름이다.
이 가격이면 동네 마트에서 파는 1,000원짜리 유사 햄들과 가성비 어깨를 견줄 만하다. 자취생들은 이때만 부지런해도 스팸을 넉넉하게 수확해 1년을 푼푼히 날 수 있다.
스무 개가 넘는 스팸을 쌓아 놓고 보면, 든든함과 동시에 아찔해진다. 저 스팸이 내 몸으로 들어와 기어이 내 몸을 스팸으로 만들겠구나 하고.
당근마켓 사용 초기에는 운동용으로 활용했다. 모든 거래 장소까지 도보로 움직였다. 왕복 두 시간 거리는 좋은 운동 코스였다. 운동을 싫어해, 거래 약속이라도 잡아야 나를 움직이게 만들 수 있었다.
동네 마트보다 묶음에 500원 저렴하게 파는 라면을 사려고 한 시간 반을 걷기도 했고, 뿌리 내린 고무나무 잎 하나 나눔 받으려고 한겨울에 두 시간 남짓 걷기도 했다. 모든 거래가 운동의 기회였으므로 당근마켓은 나의 헬스트레이너였다.
그러나 운동은 짧고, 사 온 것을 먹는 기간은 길어서 당근마켓은 내 다이어트의 주적이 되어 갔다. 당근마켓은 인스턴트 식품의 보고다. 라면, 참치캔, 3분 카레, 3분 짜장 등 자취 필수품만이 아니라 과자나 콜라 등의 군입거리 등이 깜짝 놀랄 가격에 급습해 왔다.
스팸이야 선물 받았으니 현금화할 필요가 있다지만 다른 인스턴트 식품들은 판매자들도 먹으려고 샀을 텐데 왜 헐값에 내놓는지 이해되지 않았다. 이해되지 않는 것들이 내 밥상을 효율적으로 만들었다. 어차피 세상은 내게 이해를 구한 적 없으니 내 입에 스팸, 꿈처럼 달콤하면 그만이다.
자취생이라면 응당 가성비의 노예다. 가성비 앞에만 서면 조건반응처럼 지갑이 열렸다. 이 현상이 심해져 취향으로 고착되는 경우가 노예 중의 상노예, 나였다.
나는 약간의 취향은 있지만 음식을 가리지 않았고, ‘맛있다’의 기준이 낮다 보니 내게는 싼 것이 다홍치마였다. 1+1, 특가, 마감세일 등이 입맛인 것이다. 당근마켓에는 취향이 득시글거렸다. 다이어트는 이 취향에 번번이 무너졌다.
2. 딱 한 번 취소한 중고 거래
그런데 딱 한 번, 라면 거래를 취소한 적 있었다. 컵라면 작은 것 17개를 6,000원에 사기로 예약했었다. 개당 353원짜리 컵라면은 취향이 아닐 수 없었다.
거래 당일, 혈압 때문에 받았던 피검사 결과가 나왔다. 의사는 지방간과 당뇨를 언급했다. ‘주의’ 정도였지만 술, 담배 없는 생활 하면서 처음 들은 지방간과 당뇨에 당황했다.
며칠간 채식 위주의 식단을 꾸리다가 도로아미타불 관세음-라멘. 어렸을 때 살이 안 쪄서 한약까지 달여 먹던 사람이 비만에 입문하기까지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사실 당근마켓의 라면은 생각보다 가성비가 떨어졌다. 동네 마트에서 할인 행사할 때의 가격과 엇비슷했다. 500원 때문에 한 시간 반을 걸었던 날은 한창 다이어트할 때였을 뿐, 그날 이후로 라면 때문에 움직이는 일은 드물었다.
단, 유통 기한 마감 임박 라면을 절반 가격 근처에서 파는 경우는 놓치지 않았다. 그 마감일들은 내게 무의미했다. 라면은 가성비와 무관하게 몇 안 되는 취향이기에 다섯 봉 한 묶음짜리는 2~3일, 아무리 게을러도 일주일이면 처리했다.
참치도 가성비가 떨어졌다. 2021년 현재 인터넷에서는 쿠폰 포함해도 200g 한 캔에 2,300원 정도였지만, 동네 할인 마트에서 행사할 때는 동원이든 사조든 1,750원까지 떨어졌다. 작년 빅 세일 때는 1,450원에 팔린 적도 있었다.
그러나 당근마켓 판매자들은 인터넷 최저가 검색만 해서 가격을 설정하는지, 1,750원보다 비싸게들 팔았다. 다른 물건과 끼워 팔 때 한 번 샀을 뿐, 참치는 내 관심 키워드는 아니었다.
오뚜기 3분 카레와 3분 짜장. 정확하게 말하면 3분 쇠고기 카레, 3분 쇠고기 짜장의 가성비는 압도적이었다. 그냥 ‘3분’ 시리즈가 있고, ‘3분 쇠고기’ 시리즈가 있는데, ‘쇠고기’가 붙은 것들이 이름값에도 불구하고 더 저렴했다.
인터넷에서는 정가가 1,000원이 넘어갔다. 우리 동네 마트 한 곳에서는 최저가 790원이었고, 다른 마트 두 곳에서 할인 행사를 할 때는 750원까지 떨어졌다. 그런데 당근마켓에서는 600원 안팎에 살 수 있었다. 이제 물려버렸지만, 정말 3분이면 끼니를 해치울 수 있고 유통기한도 길어서 쟁여두는 편이었다.
콜라도 종종 매물로 나왔다. 콜라를 마시지 않는 사람들은 배달 음식을 먹고 따로 챙겨둔 업소용 콜라를 팔았다. 반값 수준에 내놓고 있지만 의외로 잘 팔리지 않았다. 할인율이 얼마든 총액이 5,000원이 넘어가면 잘 사지 않는 듯했다.
불행 중 다행으로 콜라를 구매한 적은 없었다. 나는 콜라를 좋아했지만 애초에 냉장고에 음료를 사놓는 습관이 없었다. 당근마켓에서 콜라까지 사들였다면 지방간 수치는 급격히 올라갔을 것이다.
3. 인스턴트 식품의 가성비는 착시다
가난한 사람이 살찌는 시대다. 저렴한 제품이 더 저렴해져서 내 식단이 알뜰해지는 만큼 내가 살찐다. 작년에 비만에 들어서서 꾸준히 배 둘레에 스팸을 늘리다 보니 내가 ‘유사 햄’급 싸구려 인간이 된 것 같다.
어차피 먹고 싸다 끝나는 인생, 비싼 똥 좀 싸다 가면 안 되나 반감이 들기도 하지만 가성비를 마주할 때마다 활성화되는 소비 욕구에 아직도 무력하다.
사실 인스턴트 식품의 가성비는 착시다. 인스턴트 식품 섭취는 일종의 대출일 뿐이다. 30대까지는 육체 대여료가 공짜에 수렴하지만 40을 넘어가면 육체는 비용을 청구하기 시작한다. 혈압약을 비롯해 끼니마다 이런저런 약을 먹어야 한다.
눈앞의 가성비는 훗날 상환하게 될 약값과 병원비를 빌려 쓰는 것과 다름없다. 피 검사를 하고 두 달 치 혈압약을 타는데 36,500원을 지불했다. 두 달간 당근마켓에서 인스턴트 식품을 구매하며 이득 본 차액은 여기에 미치지 못하고, 몸값의 대출 상환일은 온다. 사람마다 시기는 달라도 반드시 온다.
인스턴트 식품만큼 화학 첨가물을 뿌려 말하자면, 나는 느린 자살 중이다. 알면서도 라면, 카레, 짜장 키워드 알림을 지우지 못한다. 추석을 앞두고 스팸도 추가했다.
내 몸은 제철이 지나 관리가 필요하지만, 스팸은 제철이고, 스팸은 맛있고, 맛없이 오래 살면 뭐 하나… 에라 모르겠다.
원문: 하루오의 브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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