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재석이 지겹다. 그는 이미 다 아는 이야기를 하고 또 했다. 나는 묵묵히 밥을 먹다가 간혹 피식거렸다. 내 웃음소리가 내게 들릴 때, 빈 방의 윤곽이 선명해졌다.
내 방은 늘 비어 있었고, 나는 빈 것을 완성하는 마지막 퍼즐 조각인 듯했다. 내 방에는 내 목소리보다 유재석, 박명수, 정준하, 정형돈, 노홍철, 하하, 길의 목소리가 더 많이 들렸다. 형이었던 멤버들이 동생이 되는 동안 나는 그들과 밥을 먹어왔다. 우리가 함께한 끼니가 얼마인데, 그들은 나를 몰랐다.
나는 ‘혼밥’이 대중적으로 명명되기 전부터 혼밥을 해왔다. 휴일에는 사람을 만나지 않았고, 학원에 있을 때는 다른 선생님과 교대로 저녁을 먹었다. 밥은 영양분을 섭취하는 일이므로 타인과 함께할 필요가 없었다.
혼자 밥 먹는 것을 꺼려하는 사람들을 한심하게 생각했다. 그 당시 파스타집에 가서 알리오 올리오 파스타 하나를 주문할 때 당황한 것은 점원이었다. 혼밥 난이도 최상이라는 고깃집에 가지 않은 이유는 혼자 한 테이블을 차지하기 미안해서지, 타인의 시선과는 무관했다. 진시황이 내시를 사람이라 여기지 않아 그들이 진시황의 잠자리를 지켜보도록 내버려 뒀듯이, 내게 타인은 사물에 가까웠다.
사람과의 끼니는 곤혹스러울 때가 더 많았다. 친구가 아닌 사람과 스테이크를 써는 것보다 방구석에서 라면을 후루룩대는 게 맛있었다. 애초에 음식에 가치를 부여하는 편은 아니어서 어지간한 메뉴는 불편한 자리와 등가교환 되기 힘들었다. 어중간한 친분이 있는 사람들과의 수다는 말을 공백 없이 이어나가는 초조함과 관심 없는 화제에도 잘 듣고 반응해야 하는 의무감 때문에 피곤했다.
특히 대학 졸업 전후 나이 대비 가장 가난한 시절, 나는 학생 식당이면 충분한데 사람을 만나면 학생 식당 가격의 곱절이 넘는 식사에 아메리카노까지 마셔야 해서 곤혹스러웠다. 나이가 들며 겨우 내 나이의 평균 지갑을 따라잡았지만, 입맛의 하한치는 여전히 나이의 평균에 미치지 못해 사람과의 식사에서는 ‘굳이 이렇게까지 먹어야 하나?’하는 것이 마음속에 소소한 투정으로 남았다.
혼밥이 보통 명사화되어 표준어 진입을 앞두고 있는 시대에 나는 더 이상 특이한 사람이 아니다. 혼밥은 부끄러운 일에서 일상적인 문화가 되었다. 1인분 단위로 포장되는 식재료와 1인용 밀키트 시장이 이를 증명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혼밥의 시대에도 독보적인 구석이 있다. 명절에 식구들과 먹는 끼니를 포함해도 사람과의 식사는 1년에 스무 끼가 안 된다.
베테랑 혼밥러가 말하건대 혼밥 그 자체는 문제가 아니다. 4인 가구를 제치고 1인 가구가 가장 많은 가족 형태로 올라선 지금 혼밥은 이제 가장 보편적 식사 형태다. 문제는 보편적이어서 괜찮다고 여기는 것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식사는 관계적 행위다. 특히 한국은 만났을 때 ‘밥 먹었니?’, 헤어질 때 ‘다음에 밥 한 끼 먹자.’, 미안하거나 고마울 때 ‘맛있는 거 사 줄게’가 인사말로 쓰이고 이성에게 대한 호감도 ‘밥 사준다/밥 사달라’로 표현될 정도로 인간관계는 밥을 매개로 연대된다. 누구와 밥을 먹었느냐는 그 사람의 인간관계를 의미하고, 인간관계의 총합은 인생에 수렴한다.
돌이켜 보면 내가 불편하다고 여겼던 식사들이 소소한 기억이 되었고, 거기서 만들어지는 관계의 결합 에너지가 인생의 서사를 추동하는 운동에너지가 되어 더 유의미한 기억을 합성해냈다. 인생은 죽어가며 기억을 누리는 일이고, 기억은 서사 형태로 존재하고, 서사는 인물·사건·배경으로 구성되고, 식사 자리에서 인물·사건·배경이 캐스팅되어 사건이 그려지는 것이다.
그러나 혼밥에서는 아무것도 캐스팅될 수 없다. 인물도, 사건도, 배경도, 모두 나다. 이 대하 모노드라마는 지겹다. 시간을 융합해 기억을 생산하는 일과 시간을 소화해 배설하는 일은 질적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잇대지는 혼밥으로 인생은 허기진다.
내 모노드라마의 유일한 조연은 <무한도전>이었다. 우리는 그렇게 많은 식사를 나누었지만, 나는 <무한도전>으로 설명되어도 <무한도전>은 나로 설명되지 않는 일방향적 관계만 지속되었다. <무한도전>으로 기억이 채워진다면, 내 인생은 유재석과 멤버들의 대리전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이 주연, 내가 조연으로 역전당하는 것이다.
정주행이 끝나고 나면 또 처음으로 돌아가 N회차 시청할 내 습성이 답답하다. 심지어 <무한도전>은 종영 3년이 넘었다. 나는 도전은커녕 방구석에서 쉽게 인생을 나불대기만 한다. 혼밥은 당장 편할지 몰라도 결국 내 인생을 파먹는 자해에 가깝게 느껴진다.
간혹 당근마켓 ‘동네 생활’에 밥 친구 구하는 글이 올라온다. 혼밥에 매몰되어 있을 때는 한심한 족속들이라며 혀를 찼지만, 지금은 조금 부끄러워진다. 이성을 꿰어내려는 수작이라 하더라도 그들은 <무한도전>과 밥을 먹는 나보다 자기 서사에 충실한 사람으로 느껴진다. 나는 너무 적응해버렸다. 어두운 화면에 쩝쩝대는 내 얼굴이 비쳐도 이제는 그러려니 한다.
오래된 혼밥러로서 후배 혼밥러에게 당부하건데, 혼밥에 익숙해지는 것을 경계하시길. 익숙함과 포기는 생각보다 가깝다. ‘혼자’는 그 자체로 무중력 상태라서 관성의 법칙이 잔인하리만치 과학적으로 적용된다. 오늘 아침에는 10시에 오픈하는 동네 중국집에서 짬뽕을 먹었고, 늦은 점심에는 편의점 샌드위치를 먹었다. 아마 퇴근길 내 손에는 치킨 봉지가 들려 있을 것이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실패다. 확실한 연패다. 나는 고독사를 맞이하게 될까. 내 빈방에서는 벌레들의 파티가 벌어질 것이다. 그래도 시끌벅적할 것이다. ‘무한, 도전!’하며.
원문: 하루오의 브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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