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신앙에는 ‘이성과 논리’를 이용하여 증명해 내거나 설명할 수 없는 ‘체험적’인 요소와 ‘신비적’인 요소가 분명히 있다. 보통 교회용어로 ‘하나님과의 인격적 만남’이라고 지칭하는 ‘개인적 회심’을 경험하고, ‘기도의 응답’을 통해 ‘하나님의 실존’을 체험하기도 한다. (비기독교인이 그런 체험을 심리적인 착각이나 합리화라고 비난하더라도 어차피 개인의 체험의 영역이니 논쟁은 무의미하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이 원시적인 기복신앙과 다른 점은 그런 사사로운 체험이나 자신의 욕망을 투사한 ‘바람’과 ‘기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객관적으로 실존하는 신의 음성, 즉 ‘계시’(Revelation)가 ‘성경’을 통해 지금도 신앙인들에게 임하고 있고, 그 계시를 통한 교제와 소통이 가능하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 정통과 이단을 구분하는 기준도 신의 계시인 ‘성경’의 교리적, 신학적 해석의 범주가 정통적인 해석에서 벗어나는냐, 그렇지 않느냐로 ‘정통과 이단’을 구분한다. ‘체험의 영역’으로만 기준을 세우면 ‘정통과 이단’은 구분할 길이 모호해진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현대 기독교인들의 보편적인 모습과 ‘계시’를 중시하는 이성적인 기독교의 원리가운데 뭔가 어울리지 않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이상하게도 주변에 신앙이 독실하다고 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 ‘계시 의존적’이라기 보다 ‘체험적’이며, ‘합리적’이라기 보다 ‘맹목적’이고, ‘지성적’이라기보다 ‘반지성주의적’인 모습을 많이 보인다.
원래 계시의 중요성을 인정한다면 계시를 분별하는 ‘합리적인 이성’을 그렇게 무시할 수는 없지 않을까? 게다가 성경구절을 외우는 것은 잘하지만 성경을 읽다가 이해가 안가거나 난해한 구절에 대한 설명을 요구하면 대부분 이런 대답이 돌아온다.
‘그건 네가 믿음이 없어서 그래! 일단 믿어봐. 믿으면 다 이해가 가!’
게다가 성경에 대해 그리 해박하게 잘아는 것도 아니다. 그저 문자적으로만 성경을 달달 외우고 있거나, 중요한 구절들을 주제별로 암송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요즘 젊은 기독교인들은 사실 이 정도의 성경암송조차 못하는 사람이 태반이다.
종교마다 비슷한 양상을 보이는 부분이 있지만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미덕으로 추앙받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순종’이다. 그것도 ‘지성’이 차단된 ‘순종’
그래서 교회는 ‘성경’에 관한 것이든, ‘교리와 신학’에 관한 것이든, ‘교회의 문화와 제도’에 관한 것이든 어떤 질문도 용납되지 않는 문화가 있다. 조금이라도 꼬치 꼬치 캐묻거나 따져 물으면 바로 ‘불온한 신앙’을 갖고있는 신자로 찍히거나 귀찮은 존재로 여겨지곤 한다. 아니면 ‘교회를 흔드는 불순한’사람으로 찍혀서 요주의인물이 되고만다.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의 소통과 교제를 믿고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소통)’하는 것을 믿는다고 ‘사도신경’을 매주마다 외우는 교회가 가장 소통하기 어려운 ‘불통’의 문화가 있다는 것이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난 이런 교회와 기독교 문화의 원인에 뿌리깊은 ‘반지성주의’가 있다고 생각한다.
배타적 교리와 이론으로 똘똘뭉친 반지성주의?
재밌는건 한국 개신교는 어느 종교랑 비교해봐도 압도적일 만큼, 교리와 말씀, 지성의 활용을 강조한다는 것이다. 근데 왜 이렇게 되었을까?
그것은 교회에서 요구하는 지성과 이성의 활용이 철저히 일방적이며, ‘회의’와 ‘의문’을 용납하지 않고,다른 해석이 용납되지 않는 단 하나의 해석만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절대적인 진리’가 훼손된다고 믿기때문이 아닐까? 그런데 문제는 그들이 주장하고 가르치는 일방적인 진리, 의문과 질문을 허락하지 않는 절대적 교리’라는 것이 도리어 다른 어떤 경험이나 가치보다 ‘(검열된) 이성’의 능력을 과신하는 모순된 태도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기독교의 ‘반지성주의’는 지독한 ‘이성주의에 대한 맹신’에서 비롯되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성’은 양쪽 눈을 가리우고 한쪽 방향의 트랙만을 달리게 통제하는 경주마와 같지 않다. 일단 인간의 ‘이성’은 제대로 작동되기 시작하면 모든 것을 ‘회의’의 영역에서 처음부터 검토하고 과연 내가 지금까지 듣고 배운 것이 그러한가를 알아보도록 작동한다. 마치 베뢰아 사람이 그러했던 것처럼
‘베뢰아의 유대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의 유대 사람들보다 더 고상한 사람들이어서, 아주 기꺼이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것이 사실인지 알아보려고,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였다.’ [사도행전 17:11]
그러나 일반적으로 대다수 교회에서는 ‘이성’의 이러한 자유로운 작동을 통제하는 것부터 가르친다. 잘못된 방향으로 이성이 흘러가면 ‘위험해진다’는 명목으로.
만일 정말로 그토록 위험하다고 여긴다면, ‘왜 위험한지’를 합리적으로 설명해서 납득시키면 그나마 나을텐데, 사실 그렇게 가르치는 목사나 교사, 리더들 조차 그들이 소위 ‘위험하다고 여기는’ 그 방향의 사상이나 신학, 교리적인 얼개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어서 왜 위험한지 설명을 제대로 못한다. 그래서 마치 ‘나노미터’(nm) 만큼의 얄팍하고 피상적인 몇가지 단어와 개념만으로 아주 쉽게 ‘적과 아군’, 또는 신앙적으로 ‘안전한 것과 위험한 것’을 구분짓는다. 그래서 그런 교회 문화에서 유독 많이 들리는 말이 ‘위험하다’라는 표현이다.
그 책을 읽으면 신앙적으로 위험해.
그 노래를 들으면 신앙적으로 위험해.
그 드라마를 보면 신앙적으로 위험해.
그 영화를 보면 신앙적으로 위험해… 등등
내가 보기엔 자신의 얄팍한 이론과 경험의 잣대로 ‘하나님을 재단’하는 그들이 가장 위험해 보인다. 기독교신앙이 진짜 진리라면 당신의 그런 허술하고 어설픈 보호는 필요없지 않을까?
질문을 허락하지 않는 교회
신앙에 있어 이성과 교리의 역할이 그토록 중요하다고 가르치는 보수적인 교회와 신학교 출신들이 이런 문화를 계속해서 계승하며 퍼뜨려 나가고 있다. 그리고 이런 문화는 얼마간 먹혀들어간다. 특히 신앙이 어릴때나 어려운 개념을 이해하지 못하는 초신자일때는 너무나 명쾌하고 단순한 교리와 가르침이 더욱 매력적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그리고 상당히 많은 신자들은 신앙연차가 오래되어도 ‘그 수준’에 만족하며 머무른다. 성경도 안읽거나(또는 아무런 주석이나 해설없이 성경만 읽거나), 또는 신앙서적을 거의 안읽기 때문에 아무런 불편함이 없다. 교회 셀모임이나 팀모임에서 하는 GBS(Group Bible Study)? GBS를 제대로 깊이 있게 가르치는 리더나 간사가 몇명이나 될까?
대부분은 GBS는 양념이고 한주간의 삶을 나누자는 명목으로 서로의 일상적인 신변잡기나 기도제목을 나누고 끝나고 만다. 극소수의 리더와 간사들은 열심히 준비하기도 하지만, 문제는 너무 진지하게 열심히 준비해서 학구적으로 접근하면 팀원들이 또 지루해하고 듣지 않는다.
그런 ‘피상적 앎’의 상태에 머무는 것으로 만족하는 교인들이 상당수이기에 한국교회와 교인들이 대체로 맹목적 반지성주의에 물든 것이겠지만, 다 그런 것은 아니다. 머리가 점점 커지고, 신앙이 자라고 신앙생활의 경험이 풍부해지면서, 근본적으로 ‘성경과 하나님’에 대해 깊이있게 알아가고 싶어하는 교인들 또한 적지 않다. 그리고 그들은 대부분 교회 안에서 자신들의 ‘배움의 열정’을 충분히 채워줄 수 없음을 매번 체험하고 절망해 간다.
그러면서 목사들과 교인들 몰래 숨어서 이른바 불온서적(?)에 해당하는 ‘자끄 엘륄’이나 ‘톰 라이트’의 책등을 읽어가며 희열과 쾌감을 느끼며, 그 필요를 채워줄 수 없는 교회와 목사에 절망하다 결국 떠나간다. 가나안 교인(교회를 안나가거나 이교회 저교회 떠돌며 방황하는 교인)들이 점점 많아지는 현상의 이면에는 이런 뿌리깊은 교회의 반지성주의 문화가 한 원인이지 않을까?
이런 뿌리깊은 기독교(개신교) 문화를 정면으로 거스려 좋은 반응을 얻고 있는 목회자가 한 명 있다. 최근 탁월한 기독교 변증서의 저자로 각광받고 있는 ‘티모시 켈러’ 목사다. 티모시 켈러 목사는 상당히 보수적 입장의 신학과 신앙을 가지고 있지만, 불가지론자와 회의론자들의 질문을 있는 모습 그대로 수용하고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설득하고 소통하는 데 탁월한 목회자다. 실제 티모시 켈러 목사는 미국 기독교의 가장 큰 문제로 ‘우리의 신앙이 소통에 실패한 점’을 들고 있다.
티모시 켈러 목사는 설교나 강연에서 교회와 기독교에 대한 여러 의문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허심탄회한 질문, 통상적으로 목회자들이 매우 곤란해하는 정치적인 이슈를 비롯한 각종 질문들을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다루면서 열린 태도로 그들의 질문에 적극적으로 대답하고 있다.
물론, 아무나 이런 일을 할 수는 없을테고, 상당한 신앙적, 지적 훈련과 언변이 받쳐줘야 하는 것이라 일반화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티모시 켈러 목사가 불가지론자, 신앙적 회의론자, 호기심을 가지고 신앙을 가지려고 하는 초신자에 이르기까지 모든 부류의 사람들의 솔직한 질문과 궁금증을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들이고 최대한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소통하려고 하는 태도와 노력만큼은 소통부재와 일방적 반지성주의가 판을 치는 한국 교회가 배울 수 있는 점이라 생각한다.
신앙에 침투한 반지성주의가 위험한 진짜 이유
보수적 기독교에 헌신된 교인들은 자신이 반지성주의라고 하면 기분나빠하며 인정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프란시스 쉐퍼’나 ‘C.S 루이스’같은 작가가 쓴 기독교 변증서나 ‘창조과학회’같은 단체의 자료들을 활용하면서 ‘성경이 말하는 세계관’이 역사적으로나 과학적으로 맞다는 것을 논리적으로 설명하려는 사람 또한 적지 않으니까.
그러나 신앙을 이성으로 설명해내려는 기독교 변증이 신앙에 있어서 바람직한 이성의 활용의 전부라고 생각하는 편견은 논외로 하더라도 기독교의 뿌리깊은 반지성주의가 위험한 진짜 이유는 따로 있다.
바로 기독교 신앙안에 침투한 반지성주의는 인간의 마음 속 뿌리깊은 욕망과 탐욕을 견제하는 기능을 상실하게 한다는 것이다. 인간의 마음 속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그리 단순하거나 간단하지 않다. 게다가 우리의 마음은 우리 자신을 아주 쉽게 기만하곤 한다. 그래서 성경에서도 이렇게 말하고 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예레미야 17:9]
그럼, 이런 거짓되고, 기만당하기 쉽고, 부패하기 쉬운 마음을 견제하는 역할에 가장 중요한 인간의 성품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스스로를 성찰하고 돌아보며 깊이 사유할 수 있는 인간의 이성(지성)이다. 죄의 욕망 자체는 ‘성령의 능력’으로만 다스릴수 있다고 하더라도 여러가지 종교적 동기로 교묘하게 포장된 욕망의 불순함을 알아채는데는 예민하게 훈련된 지성이 반드시 필요하다.
기독교인들은 이성의 활용가능성을 자신의 신앙을 변증하거나 전파하는데 주로 사용하려 하지만, 진짜 이성이 중요하게 작동되어야 할 곳은 내부적으로는 ‘인간의 마음’ 속 전쟁터다. 그리고 외부적으로는 그런 욕망이 구체적으로 작동하고 발현되는 현실 속의 시스템과 여러 문제들을 파악하고 대안을 제시할 때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기독교 신앙에 있어 이성은 그런 부패한 인간의 마음과 욕망을 견제하기는 커녕 신앙의 이름으로 ‘포장’하고 ‘합리화’하는 데 잘못 활용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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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이름을 가장한 ‘우상’ 섬기기
아이러니한 사실 중 한가지는 기독교는 인간의 죄성에 기반한 죄악된 문화의 위험성을 그 어떤 종교보다 중요하게 생각하고 때론 지나칠 만큼 과잉반응하는 종교라는 것이다. 그런 기독교가 이상하게 기독교인과 교회 내부에서 벌어지는 부패한 욕망의 노골적인 발현과 합리화에 있어서는 그 어떤 종교보다 관대할 뿐 아니라, 신앙으로 포장하는데 능수능란하다.
아무리 유명한 스타가수라지만 일개 가수의 공연을 허락하면 마치 온 나라가 일거에 타락한 문화에 물들고 오염될 것 처럼 극렬히 반대하는 운동이 어찌나 극성스러웠나.
해외언론에까지 소개된 기독교인들의 ‘레이디 가가 공연 반대 기도회’모습과 사회 각계 각층에서 그토록 비판과 비난을 해도 개의치 않고 수천억원을 지어 완공한 ‘사랑의 교회’ 건축에는 별 문제의식을 못느끼는 기독교인들의 상반된 모습은 ‘간접적인’ 문화의 영향력에 있어서는 ‘결벽증’에 가까울 정도로 요란하게 그 위험을 강조한다. 동시에 본인들 스스로 종교적으로 포장된 ‘직접적인’ 욕망의 해악에 대해서는 극히 둔감하거나 관대한 기독교의 분열적인 이중 잣대를 극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날 것 그대로의 탐욕과 속물적 욕망은 웬만큼 닳고 닳은 사람이 아니라면 노골적으로 추구하는 것을 부끄러워 하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종교적으로 포장된’ 욕망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 욕망을 추구하는데 아무런 거리낄 것이 없어진다. 게다가 그런 욕망을 추구해서 성공한다면 ‘간증’을 통해 그런 욕망을 더욱 더 확장해서 퍼뜨리며, 그 사람의 신앙적 명예는 더욱 더 높아만 간다.
모두 그런 것은 아니지만 그래서 때때로 ‘간증집회’는 신앙을 통해 ‘경이로운 가시적 욕망을 실현’했다는 것을 자랑하는 자리가 되곤 한다. 그렇게해서 교회는 현대인들의 부와 성공, 탐욕의 욕망을 ‘하나님의 은혜’로 정교하게 포장해서 교인들을 끌어모은다. 사실, 이런 현상은 현대에 들어 나타난 독특한 현상이 아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가장한 우상 섬기기’는 출애굽기에도 기록이 있을만큼 오래되고 반복된 변절의 역사다.
‘모든 백성이 저희 귀에 단 금고리들을 빼서, 아론에게 가져 왔다. 아론이 그들에게서 그것들을 받아 녹여서, 그 녹인 금을 거푸집에 부어 송아지 상을 만드니, 그들이 외쳤다. “이스라엘아! 이 신이 너희를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낸 너희의 신이다.” 아론은 이것을 보고서 그 신상 앞에 제단을 쌓고 “내일 주님의 절기를 지킵시다” 하고 선포하였다.’ [출애굽기 32:3~5]
어디서부터 돌이켜야 할까?
기독교 반지성주의의 원인은 결국 신학과 교리의 패쇄성과 교인들의 지적인 무책임이 가장 큰 것 같다. 한국 개신교는 세계에서 유래가 없을 정도로 많은 교단과 교파가 있고 교단 소속 신학교가 있다. 자기가 소속된 교회가 어느 교단인지 교회를 다니는 교인들조차 모를 정도로 많은 교단과 교파는 결국 성경을 해석하는 신학적 해석의 차이와 교단내의 다양한 정치적 이해관계가 얽혀서 만들어낸 한국만의 독특한 현상이다.
‘우리가 유일한 구원의 복음, 생명의 진리를 믿는다’는 사실이 ‘우리의 해석만이 옳고 바르다’라는 오만이나 독선과 동일한 의미는 아닐 것이다. 게다가 신앙은 인간의 이성만으로 완벽히 설명될 수 없는 신비의 영역이 있기에 더욱 신에 대한 경외감을 갖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교단 소속 신학교들은 자신들의 신학적 지향성을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학문적 교류를 하지 않거나, 서슴없이 ‘이단’이라고 정죄하는 문화가 있다. 일부 목사와 신학생들은 ‘렉시오 디비나’(영적 독서)를 강조한 ‘유진 피터슨’과, 영혼멸절설을 주장한 ‘존 스토트’, 새로운 관점의 칭의론을 제기한 ‘톰 라이트’를 가차없이 ‘이단’이고 ‘위험한 사상’이라고 단정지으며 성도들로 하여금 그들의 책을 못읽게 막는다.
복음의 가장 핵심적인 뼈대가 되는 전통을 벗어나지 않는다면 인간의 이성의 한계를 인정하고 다양한 신학적 이론과 교리의 교류를 인정하는 문화가 필요하다. 아마 신학계나 신학교가 그런 문화였다면 개신교가 이토록 소통이 불가능하고 반지성주의에 물들진 않았을 것이다. 결국 신학적으로 열린 태도가 의미하는 바는 우리도 다 알 수 없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그 신비에 대한 겸손과 경외심을 의미하는 것이고, 그런 태도만 가졌어도 ‘자신만이 진리를 독점하고 있다’는 옹졸하고 배타적인 기독교 문화는 사라졌을 것이다.
그리고 기독교가 반지성주의에 물든 데에는 교인들의 책임도 적지 않다. 교인들은 자신들이 마땅히 성경을 깊이 알아가고, 하나님에 대해 깊이 알아가야 하는 책임을 목회자에게 떠넘겨서 ‘목회자에 대한 맹목적 순종과 의지’로 치환하고, 목사님 말만 잘들으면 성경에 대해, 하나님에 대해 굳이 깊이 알아갈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무책임한 태도 또한 기독교의 반지성주의를 부추겼다. 그러면서 목회자의 권위는 더욱 하나님의 권위에 맞먹을 정도로 커져만 갔고, 교인들의 무지는 강화되어갔다.
결국 신앙은 ‘하나님과 나 사이의 개인적인 믿음’이며 그 믿음을 굳건히 하는 데에는 ‘빡센 기도생활’만 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계시’된 성경과 지금까지 이어져온 유구한 신학과 교리를 바르고 깊게 알아가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다. 초등학생도 아니고 언제까지 목사님 탓, 교회문화 탓만 할 것인가? 자기 스스로 일정한 시간을 투자해서 성경도 많이 읽고, 좋은 신앙서적도 다양하게 읽어나가려는 최소한의 노력은 목사도 대신해 줄수 없는 자기만의 책임이다.
신앙과 조화된 이성의 힘
신앙과 조화된 이성은 많은 장점과 유익이 있지만 나는 크게 세가지를 말하고 싶다.
첫째, 가뜩이나 욕망을 자극하고 유혹하는 시대, 조금만 방심하면 커져만 가는 자신의 부패하고 거짓된 욕망을 견제하는 것에 이성은 강력한 역할을 한다. 특히 독서와 일기가 도움이 된다.
둘째, 패쇄적인 종교적 편견에 갇혀서 교회 밖 사람들과는 대화와 소통이 불가능한 사람이 아니라 좀더 너그럽고 열린태도로 다양한 종교, 다양한 배경을 갖고 있는 사람들을 이해하고 소통할 수 있는 기독교인이 되게 해준다.
셋째, 우리가 살고있는 이 사회의 부조리한 구조적 문제를 파악하고 그 원인을 분석해서 사회 시스템을 건강하게 할 수 있는 기독교적 대안을 만들어낼 수 있다.
보수적인 기독교인들은 대개 ‘개인주의적’ 관점으로만 세상을 본다. 그래서 세상의 모든 문제를 ‘나만 잘하면 결국 해결된다’라는 순진한 생각을 갖고 있다. 그래서 자기 삶의 테두리를 벗어난 사회와 조직의 문제, 시스템의 문제를 볼 수 있는 안목이 없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 사회는 그렇게 단순하게 움직이지 않는다. 그래서 조직이론도 배워야 하고, 정치적인 안목과 교섭능력도 길러야 한다. 그리고 결국 이 모든 것을 통합해서 ‘하나님의 가치’를 추구하는 공동체와 조직, 나라를 만들어가는데 힘써야 한다. 다른 말로 이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어가는 것이다.
우리가 살고있는 이 사회는 기독교인조차 노골적인 탐욕과 욕망의 노예가 되어 온갖 불미스런 사건으로 뉴스의 주인공이 되어가고 있다. 우리가 살고있는 대한민국이 OECD국가중에서 세대별 자살률이 가장 높고, 청소년 행복지수가 꼴지이며, 대다수 국민들이 행복하지 않은 것은 결국 모두가 다 ‘욕망의 노예’가 되어 살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한 사회가 잘못된 가치관과 편견에 사로잡혀 모두 다 잘못된 길을 걸어가고 있을 때, 단호히 넓은 길이 아닌 좁은 길로 걸어가며, 대안적인 삶을 제시하고 전혀 다른 세상을 꿈꿀수 있는 것은 결국 신앙과 조화된 이성의 힘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신앙과 조화된 날카로운 이성으로 절망의 시대를 변화시키려는 아름다운 꿈을 꾸었던 한 사람의 감동적인 연설문을 소개한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언젠가 이 나라가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났다는 것을 자명한 진실로 받아들이고, 그 진정한 의미를 신조로 살아가게 되는 날이 솟아오리라는 꿈입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언젠가는 조지아의 붉은 언덕 위에 옛 노예의 후손들과 옛주인의 후손들이 형제애의 식탁에 함께 둘러앉는 날이 오리라는 꿈입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언젠가는 불의의 열기에, 억압의 열기에 신음하는 저 미시시피주 마저도, 자유와 평등의 오아시스로 변할 것이라는 꿈입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나의 네 아이들이 피부색이 아니라 인격에 따라 평가받는 그런 나라에 살게 되는 날이 오리라는 꿈입니다.
오늘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언젠가는 사악한 인종주의가 판을 치고, 주지사가 늘상 연방 정부의 조처를 가로막을수 있다느니, 연방법의 실시를 거부한다는 말만 반복하는 저 아래 앨라배마주가, 바로 그 앨라배마 주가 언젠가 변하여, 흑인 소년 흑인 소녀들이 어린 백인 소년 백인 소녀들과 손을 잡고 형제자매로서 함께 걸어갈 수 있게 되는 꿈입니다.
오늘 저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어느 날 모든 계곡이 높이 솟아오르고, 모든 언덕과 산은 낮아지며, 거친 곳은 평평해지고, 굽은 곳은 곧게 펴지고, 하느님의 영광이 나타나 모든 사람들이 함께 그 광경을 지켜보는 꿈입니다. (이사야 42:15~16)’
-1963년 8월 28일,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워싱턴 D.C. 연설 중에서-
그는 암살당했지만 결국 그의 꿈은 이루어졌다.
이렇게 신앙과 조화된 이성은 개인신앙의 영역을 넘어 세상을 더 나은 세상으로 바꿀 수 있다.
‘이성’은 어쩌면 기독교인이 이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어가는데 해결해야 할 복잡한 문제와 장애들을 극복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신앙의 미덕’일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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