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말은 참 실천하기 어렵습니다. 어떤 중요한 일이 뭔가에 의해 틀어지면 그 원인을 제공한 대상을 증오하게 되기 쉽습니다. 그 대상이 사람이라면 인간으로서 존중해야 한다는 문제가 있죠.
하지만, 그 대상이 사람이 아니더라도 증오는 문제가 됩니다. 우선 그 대상이 걸리는 대부분의 일에 대해서, 그 문제의 중요한 원인이 아닌, 악감정이 남아 있는 그 대상을 비난하고 욕하게 되어, 결국 진짜 원인을 찾지 못하게 됩니다. 또 하나는, 그 대상이 쓸모가 있다고 하더라도 증오가 있어서 그걸 쓰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한국의 좌파, 진보가 주류경제학을 대하는 태도에서 그런 경향이 나타납니다. 신자유주의가 전세계 여러 나라에서 정책적으로 실패하고 불평등을 부추긴 것은 사실이죠. 그래서 신자유주의의 주무기였던 주류경제학은 가진 자들의 이익에 봉사하는 학문이라고 생각하고, 더 나아가 자본주의와 시장경제 자체에 대해 증오를 갖고 공격하는 모습이 보입니다.
이런 성향은 박노자 교수의 글에서 두드러집니다. 그가 글에서 ‘학피아’의 존재를 지적한 건 수긍이 가지만, 이 글은 시장주의와 주류경제학에 대한 분노가 가득합니다. 과연 뭐가 문제일까요?
신자유주의는 경제이론이 아니고, 경제학자들은 모든 정책별로 충돌한다
우선 신자유주의는 경제이론이 아닙니다. 국가를 운영하는 정책기조로서 시장의 힘 강조, 규제완화, 감세 등등을 내세우는 이념 혹은 철학에 가깝습니다. 경제이론에서 이러한 시각차는 크게 보면 통화정책에 있어, 시장주의를 강조하는 새고전파와 정부개입을 강조하는 뉴케인지언의 차이로 나타납니다.
하지만 예전과 같은 극단적인 상호 충돌은 없고 방법론적 교류가 이어지면서 그 경계가 예전보다는 희미해졌고, 새고전파의 요람이자 신자유주의의 본산이라 불리던 시카고 학파도 많은 다양한 학자들이 유입되면서 더 이상 시장의 자유만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스웨덴 노벨상 선정위원회의 퍼 스트롬버그 교수가 인정한 바 있습니다.
더 나아가, 신자유주의 사고 안에서 통화정책은 한 가지 부분일 뿐이며, 경제학자들은 정책별로 다른 입장을 취하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예는 최저임금제입니다. 미국에서는 얼마 전 최저임금제를 놓고 주류경제학자들 사이에 서로 성명서를 내고 논쟁이 붙었는데, 최저임금제를 올려야 한다는 쪽의 학자들이 더 무게감이 높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단순히 600명 이상이라는 숫자 뿐 아니라, 하버드, MIT, 버클리 등 미국 유수의 학교 교수들도 많고 노벨상 수상자도 많고, 특히 최저임금제를 적극적으로 연구하는 학자들, 노동경제학의 최전선에 있는 학자들이 많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21세기 자본론이라는 도발적인 이름의 책을 내면서 전세계의 주목을 받은 토마스 피케티 역시, 비판적인 주류경제학자로 보는 것이 더 적합합니다. 그가 발표한 다수의 논문들이 이미 주류경제학 안의 탑 저널에 게재되었고, 그와 많은 연구를 함께 진행한 Emmanuel Saez 역시 출신은 프랑스이지만 버클리에서 교수를 맡고 있으며 40세 미만의 젊은 경제학자들 중 제일 뛰어난 학자에게 시상하는 존 베이츠 클락 메달을 수상했습니다.
역사적으로 주류경제학 안에서 서로 다른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존재했었고 그들은 원수처럼 지낸 적도 많았습니다. 피케티의 주류경제학 비판은 그런 주류경제학 내의 논쟁, 그리고 주류경제학이 논쟁을 통해서 발전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예라고 하겠습니다. 자, 주류경제학은 신자유주의와 다릅니다. 신자유주의는 주류경제학 이론이 아니며, 주류경제학을 베이스로 하는 연구들은 정책에 있어서는 제각각 다른 의견을 갖습니다.
주류경제학을 지나치게 무시하는 진보 세력
정책적으로 신자유주의의 기조를 제일 잘 보여주는 것은 미국 공화당이었고, 신자유주의적 정책은 레이건 정부 때는 괜찮았지만 조지 부시 시절에 그 문제점이 수도 없이 나오면서, 이제는 ‘신자유주의’라는 말을 꺼내기가 쉽지 않게 되었습니다.
스스로를 신자유주의자라고 하는 사람이 거의 없으며, 그래서 (적어도 한국에서는) 신자유주의라는 단어는 자본주의 경제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자본주의 경제 == 신자유주의’ 라고 하면서 자본주의 경제 자체를 멸시하는 의미로 자주 쓰이고 있습니다. 위에 링크한 박노자 교수의 글에서는 아예 대놓고 ‘주류경제학 == 신자유주의’가 되었죠. 최저임금제 상승을 주장한 600명의 경제학자들이 모두 신자유주의자일까요? 최저임금제를 올려야 한다고 주장하면 종북이라고 말하는 사람들과 마찬가지가 되는 것입니다.
한국 좌파의 경우 시장 경제의 힘을 지나치게 적대시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공인인증서와 같은 불필요한 규제들은 분명히 존재합니다. 그리고 시장의 힘, 사적 이익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힘을 무시하는 정책이 역효과를 가져 온다는 것은 주류경제학자들이 꾸준히 증명해 왔습니다.
무상 의료와 같은 지나친 복지는 경제 발전에 악영향을 충분히 미칠 수 있습니다. 성장과 평등, 불평등을 심화시키는 정책은 무조건 나쁠까요? 비록 어떤 정책으로 1%에게 부가 집중된다 하더라도, 최빈층의 복지 수준이 높아진다면 그 정책은 좋은 정책입니다. 안타깝게도, 주류 경제학자들 중에서 기업과 가진 자들을 위해 봉사하는 사람들도 존재하지만, 다른 많은 사람들이 경제 시스템을 연구하고 최종적으로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박노자 교수의 글은 단정적으로 최대 다수를 비판하여 모두들 적으로 돌리는 문제점을 답습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주류경제학의 범위는 생각 이상으로 넓다
다음은 비주류경제학에 대해서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이전 글에서 본 것처럼, 주류경제학은 위에서 말한 것처럼 세상의 대부분의 문제들을 다룰 수 있고 다양한 사고를 포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때문에 비주류경제학이 설 위치가 없는 것입니다.
주류경제학에 의해 시장주의적 경향이 상아탑을 독점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다만 그 방법론과 가정의 차이 때문에 서로 말이 잘 안 통하니까 교수 채용이 더딜 뿐입니다. 한국에 한정해서 예를 들면, 기본적으로 비주류경제학의 ‘포스트 케인지언’과 주류경제학의 뉴케인지언은 완전히 다르며, ‘정치경제학’도 비주류에서는 마르크스를 지칭하지만 주류경제학에서는 선거를 비롯한 정치 현상의 경제적 분석을 말합니다.
비주류경제학에 대한 주류경제학의 시선은 ‘적대’하기보다는, 다른 학문 취급하여 그저 관심이 없거나, 가끔 한 번 이야기를 듣는 정도로 보입니다. 미국은 물론이고 유럽 대다수의 학교들도 미국 경제학계와 활발하게 교수들이 움직이고 학문적으로 교류하고 있어, 유럽 경제학도 비주류경제학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장하준 교수가 있는 케임브리지 대학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비주류경제학자도 학문 연구자로서 생각해야지, 그들에게 신자유주의에 오염된 주류경제학에 맞서는 투쟁자 이미지를 덧씌우는 것은 잘못된 일입니다.
장하준 교수는 인터뷰 등을 통해 삼성그룹이 잘못한 일이 많고 국민의 희생을 통해 성장했다고 전제하면서도, 삼성그룹의 경제적 가치를 강조하고 이건희 회장의 업적을 인정합니다. 그리고 삼성그룹의 경제적 가치를 강조하여, 주주자본주의에 반대하고, 재벌의 지배 구조를 국가가 개입해서라도 보호하자고 주장합니다.
재벌과 적대적이어서 그가 한국에 임용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머릿속에 혼란이 온다면, 이는 신자유주의와 재벌 중심주의를 혼돈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두 개념은 관계가 없고 오히려 서로 반대에 가까우며, 장하준 교수는 신자유주의에 비판적이지만 재벌 소유구조 자체는 지지하는 학자입니다.
즉 이번 정권의 본질적인 문제가 신자유주의가 아닌 것입니다. 신자유주의적 규제 완화가 이번 정권에서도 있었고 그것이 사회 안전망에 악영향을 끼친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세계화와 맞물려 시작된 신자유주의적 정책에 대해서는 김대중, 노무현 정권도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반면, 새누리당 정권에서 이어진 4대강 사업을 비롯한 대규모 토목 사업, 외환 개입, 요즘 이야기되는 과감한 재정 정책은 작은 정부를 지향하는 신자유주의와는 아주 다릅니다. 그리고 방송에 대한 규제나 공권력 강화, 권위주의 등은 민주주의에 역행하는 문제이지 신자유주의의 문제가 아닙니다. 인간의 가치보다 돈의 가치를 중시한다? 그건 그냥 ‘악’이지 신자유주의 논리와 상관없습니다.
‘신자유주의’는 ‘종북’과 같은 딱지 붙이기
그런데 좌파에서는 주류경제학은 시장주의자, 시장주의자라면 모든 걸 시장에 맡기자는 사람, 심지어는 더 나아가 사람보다 돈이 먼저인 사람 취급하는 경우도 봤습니다. 주류경제학자들은 다들 불의와 범죄에 찌든 사람들일까요?
결론적으로 ‘신자유주의’라는 단어는 ‘종북’이라는 단어와 그 단어의 ‘지위’가 비슷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반대파에서 상대방을 사회와 인류의 적으로 규정할 때 쓰는 말이고, 상대방을 모욕하는 말입니다. 좌파 중에서 실제로 종북이 존재할 것이고, 주류 경제학자들 중에서도 박노자의 지적에 해당되는 사람, 신자유주의에 가까운 사람, 사리사욕을 위해 연구하는 사람도 있겠죠. 그렇다고 해서 그들을 싸잡아 비난하는 것은 당신이 ‘그 그룹’에 속한다는 이유로 당신과 대화할 생각이 없다는 것이고. 민주적인 토론은 기대하기 어려워집니다.
그래서 박노자의 글에는 좌파의 문제점이 잘 나타나 있는 것입니다. 박노자는 인문학의 현실도피 문제를 지적했지만, 오히려 좌파의 문제는 현실대립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문제의 근원을 파악하기보다는 평소에 적대적인 대상을 공격하여, 문제 해결에 노력하는 사람들까지 적으로 돌려 버리고 토론마저 거부하는 것입니다.
자본주의는 공산주의/사회주의와의 대결에서 승리했고 여러 국가들이 ‘복지병’을 앓으면서 시장의 힘은 증명되었습니다. 게다가 수많은 사람들에게 당장 먹고 사는 경제 문제는 아주 중요합니다. 좌파의 계급적 투쟁 논리는 이 모든 것에 적대적인 모습을 많이 보입니다. 반대편에 있는 사람들을 수구 꼴통이라고 부르기 민망할 정도 꽉 막힌 사람들도 보입니다. 그래서 현 정부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에 있어서 좌파의 논리는 많은 사람들을 껴안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박노자의 글 전체를 내가 비판하는 것은 아닙니다. 한국 사회에서 우파라고 불리는 세력이 많은 문제를 일으켰기에 그런 주장이 나오고 그런 문제제기가 나오는 것도 사실입니다. 교내에 맥도날드가 들어오는 것이야 이상할 게 없지만, 기업이 학교를 장악하면서 나타나는 문제는 존재합니다. 또 학자로서 현실 문제에 뛰어들어야 하는 것도 맞습니다. 그리고 학피아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무엇이 진정한 문제인가에 대해서는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민주주의와 정의의 관점에서 생각하는 것이 맞다고 봅니다.
끝으로 씁쓸한 이슈 하나를 붙입니다. 주류 경제학계는 최근 피케티가 제기한 불평등 문제로 시끄러운데, 보수 성향의 Financial Times가 이에 대한 반론을 제기했습니다. 처음에는 그 반론이 설득력이 있었지만 피케티의 재반론으로 다시 반박되었습니다. 문제는 이 재반론이 그렇게 이슈가 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대표적인 뉴케인지언 학자이자 파워 블로거인 그레고리 맨큐는, Financial Times의 반박만 자기 블로그에 올리고 피케티의 재반론은 블로그에 올리지도 않았습니다. 뉴케인지언은 학문적으로는 통화정책에 있어서 정부의 개입을 지지하지만 맨큐는 부시 정부의 감세 정책을 지지했고 신자유주의와 관련이 깊은 인물입니다.
폴 크루그먼은 피케티가 재반박을 올렸을 때 이런 일이 일어날 거라고 예언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현실 때문에, ‘학피아’라는 지적 자체는 결코 가볍게 받아넘길 수 없죠. 그래도 주류경제학 내에서 많은 사람들이 좋은 쪽으로 노력하고 있음을 기억해 주셨으면 합니다.
바르게 세상보기 – 중도.정의.보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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