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afal Niveshak이 기고한 「The 43rd Lesson」을 번역한 글입니다.
비샬은 세월이 흐르면서 ‘업보의 법칙’을 믿게 되었다. 사실, 그의 인생에서 아주 일찍 배운 가장 중요한 교훈 중 하나였다.
1988년 12월의 어느 추운 밤이었다. 비샬은 10살이었고, 인도 데라둔에 있는 기숙학교에서 공부하고 있었다. 친한 친구 한 명이 몸이 좋지 않았다. 기숙사에서는 밤 8시 이후 물을 마시지 못하게 되어 있었다. 그날 밤 친구는 한 잔도 아니라 두 잔의 물을 마셨고, 사감에게 들켰다.
사감은 벌을 내렸다. 친구를 밤새, 담요도 없이 바닥에 앉혀 놓은 것이다. 비샬은 사감의 명령을 어기고 친구를 도울 생각도 못 했다. 너무 무서웠고, 스스로가 무기력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다음 날 아침 청소부가 열이 펄펄 끓어 쓰러진 친구를 발견했다. 교장 선생님에게 이 소식이 알려졌고, 일주일 후 사감은 학교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약 2년 후, 비샬은 뉴턴의 제3법칙을 읽게 되었다. 모든 작용에는 동등한 반작용이 있다는 게 핵심 원리였다. 그가 ‘업보의 법칙’을 이해한 것은 훨씬 후다. 하지만 그가 몸소 경험했던 것은 1988년 12월이었다.
업보(Karma)는 ‘무엇을 하다, 무엇을 만들다’라는 의미의 어근 ‘kri’에서 나온 산스크리트어다. 개인의 의도와 행동(원인)이 미래의 그에게 영향(결과)을 미친다는 인과관계의 원칙을 말한다. 좋은 의도와 선행은 좋은 업보를 쌓는다. 나쁜 의도와 악행은 나쁜 업보를 쌓는다.
일반적인 인식과 달리, 업보는 운명이 아니다. 타고난 손금에 따라 삶을 살아간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내 행동이 앞으로의 운명을 결정한다는 아름다운 개념이다.
우리의 삶이 밭이라면, 업보는 씨앗이다. 우리는 정확히 뿌린 대로 거둔다. 불교에서는 선한 업보를 쌓는 데 세 가지 방법이 있다고 가르친다. 바른 생각, 바른말, 그리고 바른 행동이다. 이 셋을 꾸준히 실천하게 되면 남은 일생 동안 지속될 습관이 만들어지게 된다.
힌두교에서는 시간을 원으로 본다. 사물은 시간 안에서 계속 순환한다. 업보는 중력의 법칙처럼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적용되는 법칙이다. 업보의 법칙은 한 사람이 행한 모든 것과 받은 모든 것에 대한 책임을 강조한다. 이 모든 것은 우리의 욕망에서 시작해서 우리의 행동으로 끝났다. 그에 따른 업보는 때로는 즉시, 때로는 시차를 두고 우리에게도 되돌아온다.
잠언 26장 27절은 이렇게 말한다.
구렁을 파는 자는 제가 그곳에 빠지고, 돌을 굴리는 자는 제가 그것에 치인다.
세계에서 5번째로 8천 미터 이상의 봉우리 14좌를 모두 오른 산악인 에드 비에스터스는 자서전에서 업보의 법칙에 대해 언급한다.
신이나 특정 종교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지만, 저는 업보를 믿습니다. 돌고 도는 것은 돌고 도는 법입니다. 여러분이 삶을 살아가는 방식, 여러분이 다른 사람들을 대하는 방식이 결국 여러분 자신에게 그대로 돌아올 것입니다. 저는 흔히 ‘업보 국립 은행’이라고 합니다. 여러분이 곤경에 처한 누군가를 구하기 위해 손을 내밀면, 그 선행이 이 은행에 적립됩니다. 언젠가 여러분이 도움이 필요할 때, 적립된 선행이 필요할 수도 있습니다.
온 세상은 그저 업보의 원리에 의해 돌아간다. 우리의 모든 반응은 이전 우리의 행동이 메아리로 돌아온 것이다. 인생은 부메랑과 같다. 베푼 대로 받게 된다. 업보는 절대로 주소를 잊지 않는다. 비샬은 몇 차례의 업보를 겪은 후, 그 교훈을 마음과 행동에 깊이 새겼다.
인생은 부메랑과 같다. 베푼 대로 받게 된다.
원문: 피우스의 책도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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