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군대가 전쟁에서 참패한 일은 역사에 허다하지만 (솔직히 이긴 적보다는 진 적이 많을 듯) 그 중에서도 참혹함과 어이없음이 하늘을 찌르고 땅을 울리는 몇 건의 패전이 있어. 얼마 전 얘기했던 임진왜란 때 용인 전투나 병자호란 때의 쌍령 전투가 되겠지.
그런데 용인 전투나 쌍령 전투는 머리 수는 많았지만 제대로 훈련받지 않은 군대가 실수연발을 거듭하며 괴멸해 간 전투라면 오늘 얘기할 칠천량 해전은 좀 달라. 그때까지 연전연승을 달리던 당대 최강의 함대가 단 한 번의 싸움으로 재기불능의 타격을 입고 붕괴돼 버린 일대 참사였으니까. 비유가 될지 모르겠다만 이번 월드컵에서 독일에게 7대 1로 깨진 브라질이 겪은 충격의 1만배 정도라면 될까.
칠천량의 지휘관은 우리가 잘 아는 원균이었어. 이순신이라는 찬연한 빛 옆의 볼품없는 그림자로 역사 속에 남은 그는 왜 패장이 되었을까. 물론 이순신에 비하면 태양과 반딧불 정도의 역량 차이가 있는 사람이었지만 그것만으로 패전의 이유를 주워섬길 수는 없지.
조선 수군은 우선 시스템상으로 일본 수군을 앞서는 강군이었어. 배로 배를 들이받고 보병이 상대방 배로 건너가 육박전을 치르고 배를 빼앗는 방식이 동서양 모두에서 일반적이던 시절 조선 수군은 함포 사격으로 원거리의 적을 들이부수는 전투 방식에 익숙한 부대였어. 통제사 하나 바뀌었다고 그렇게 송두리째 무너져 내릴 군대는 아니었다고.
이순신을 죽어라 까며 자리를 잡은 원균
원균은 이순신과 사이가 좋지 않았어. 이순신은 원균을 극도로 혐오했고 원균도 이순신에 대해 이를 갈았지. 그래서 원균을 다른 지역으로 보내 둘을 떼 놨는데 원균은 끝내 자신이 밀려난 바다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않았어. 쓸데없는 호승심(好勝心)을 지닌 사람들이 큰일을 망치는 걸 우리는 종종 보지. 정작 신경 써야 할 일은 따로 있는데 자신이 맛본 패배에만 집착하고 자신을 누른 상대에 대한 강박에 사로잡히는 건 우리 주변에도 많이 보는 일이잖아. 육군을 지휘하면서도 그는 줄기차게 상소를 올린다. “저 같으면 이렇게 할 겁니다.” “아 우리도 대군을 동원해서 결판을 내야 해요.” “아 미치겠습니다. 저 같으면 벌써 부산포를 들이쳤습니다..” 대충 이런 식이었지.
이순신의 가장 큰 강점은 전투할 곳을 스스로 택하고 가능한 아군이 유리한 상황에서 작전을 펼치는 신중함이었어. 그는 한산도의 조선 수군이 버티고 있는 것만으로 적의 목구멍에는 돌이 박혀 있는 결과라고 봤고 욕심을 부려 적의 본거지 부산포 공격을 하는 건 바람직하지 못할 뿐 아니라 기껏 박아 놓은 돌멩이를 빼 주는 결과라고 여겼지. 하지만 조선 조정은 부산포 공격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어. 그 심리는 이거야. “어떻게 되겠지.”
“조선 수군은 강한데. 임진년 이후 한 번도 진 적이 없는데. 맘 먹고 부산포를 쓸어버리면 일본군은 독 안에 든 쥐가 될 텐데. 수군이 좀 해 주면 좋을 텐데 왜 안될까? 어떻게 되지 않을까?” 이 의문은 의심이 된다. “분명히 될 것 같은데 왜 안 된다고만 하지? 가토 기요마사가 건너온다는데 왜 못 잡았지? 안된다고만 하는 이순신이 비겁한 거 아냐?”
희망은 기대로 변하고 기대는 욕심이 되고 욕심은 의심을 낳는다. 그리고 그 의심에 힘(권력)이 개입되면 팩트가 된다.
자신의 졸렬함을 만회라도 하듯 선조는 이순신을 못잡아먹어 안달했고 임금의 의심은 그대로 이순신의 죄가 돼 버려. “이순신은 조정을 속였으니 무군지죄(無君之罪)요. 적을 좇아 치지 않았으니, 나라를 저버린 죄(負國之罪)다.” 당연히 후임은 “할 수 있습니다!”를 부르짖던 원균이 되지.
옛날 이야기 속에서만 그런 게 아니라 회사에서도 그렇고 학교에서도 이런 일은 흔히 일어난다고 생각해. 현상유지도 어려운 환경에서 ‘획기적인 전환’을 위해 뭔가를 시도하는 건 좋은데 그게 획기적으로 망하는 일임을 누군가 반대할 때 반대자가 되레 무위도식자나 의지박약아로 찍히고 결국은 물을 먹는. 그리고 그 후임자가 돌격대장이 되는 일.
자신도 알고 있는 최악의 수를 던진 원균
하지만 원균도 바보는 아니었기 때문에 한산도에서 부산 앞바다로 항진하는 일이 얼마나 무망한 일인가를 곧 깨달아. 부하 장수들이 사색이 돼서 말리는 것은 둘째로 하고라도 자기가 보기에도 부산 앞바다까지 나가고 돌아올 때 물 한 번 맘 놓고 떠먹거나 배를 대고 쉴 데가 없는 거야. 하지만 조정은 계속 부산으로 나아가라고 성화였지.
원균은 결국 부산 앞바다로 출동하게 된다. 이때 출동한 함대는 원양 항해는 어렵지만 육지 연안의 해전에서는 가히 세계 최강의 함대였다고 해도 하자가 없을 거야. 하지만 원균도 눈치가 있지, 대놓고 부산으로 가지는 않고 시늉보다는 조금 더 하다가 함대를 물렸는데 이게 도원수 권율에게 걸린다. “여기 이 상소를 보시오. 부산까지 너끈히 갈 수 있다고 한 게 어디 사는 누구요. 여기 원균하고 당신은 동명이인이오?” 급기야 권율은 곤장을 쳐 버린다. 합참의장이 해군 참모총장 볼기짝을 때린 셈이지.
여기서 원균이 “소인 참으로 미련했습니다. 그게 될 일이 아니었소. 도원수 영감. 소인은 벌을 받아도 좋지만 이건 다 망하는 길입니다.” 이렇게 말하며 머리를 땅에 찧었다면 그건 그에게나 나라에게나 병사들에게나 도움이 됐을 일이지만 원균은 역시 찌질이였어. 분노와 오기 속에 전 함대에 부산으로 항진하라는 명령을 내린 거야.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마찬가지다!”
적과 싸울 때보다도 우리 편과 싸울 때에 더 용기가 필요한 법이지. 원균은 그렇지 못했어. 이순신은 광해군이 와서 불러도 못 갈 때는 못 간다고 했었는데 말이야 “가라는 데 어쩌냐? 가자.” 리더의 무책임은 그 자체로 위험하고 리더의 오기는 자기 편의 목을 겨누는 살기가 되는 법이야. (좀 청와대에 전해 줄 방법이 없을까)
부산으로 나아가다가 일본군 수송 선단을 발견하고설랑 다짜고짜 돌격했지만 수송선단을 제대로 잡지도 못하고 대마도 근처까지 흘러 들어가. 이게 무슨 일이냐 배를 돌렸지만 파도는 높고 병사들은 지치고 여러 배들이 풍랑에 밀려 실종되는 악전고투 끝에 오늘날 거가대교가 놓인 가덕도까지 후퇴하는데 이곳에는 일본군이 대기하고 있었지. 수백 명의 병사들이 내려 물을 긷고 나무를 베는데 갑자기 일본군이 덮쳐. 원균은 그 수백명의 병사들을 두고 도망친다. 그리고는 마의 칠천량으로 조선 함대가 집결하게 되지.
잘못을 인정하지 않다 파국을 낳은 원균
이즈음 이순신은 이상한 꿈을 꿨다고 난중일기에 기록돼 있어. “꿈에 원공과 한 자리에서 만났는데, 내가 원공 윗자리에 앉아서 음식상을 받자 원공이 즐거운 빛을 보이는 것 같았다.” 임진년 이래 앙숙이었고 이순신 자신도 흉악하다고 여겼고 자신을 파직시키는데 주요한 공을 세웠던 원균이 갑자기 자신이 상석에 앉았는데도 기분 좋은 모습을 보이다니 하도 이상해서 적어 놨겠지. 이게 웬 개꿈인가 하면서. 하지만 어쩌면 그건 원균의 뜻이 꿈에 실렸는지도 몰라. 술에 취해 배 위에 드러누워서 원균이 “이순신 당신이 옳았소!” 하고 탄식하고 있었을지도 모르니까.
용감할 때 용감해야 하는 건 더할 나위 없는 미덕이지만 물러설 때 서슴없이 물러설 줄 아는 것 또한 꽤 큰 덕목이야. 우리가 살아가면서도 그렇잖냐. 근데 원균은 후자에서도 큰 결함을 지니고 있었어. 이미 실패한 작전이고 병력을 조금이라도 더 온전히 보전해서 본영으로 후퇴해야 하는 것이 지상과제였지만 그는 그조차 하지 않은 거야. 그는 이렇게 말한다.
“하늘이 순리를 돕지 않아 어찌하겠소. 이제 오늘 마음을 다하여 나라 위해 목숨을 바칠 뿐이오.” 아마 회의에 참석했던 장수들 전부 속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었을 거다. “하늘이 뭘 안 도와? 니가 니 자신을 버려 놓고!!!” 경상우수사 배설이 어떻게든 후퇴해서 다음 기약을 하자고 하자 원균은 엄숙하게 말한다. “그저 죽을 뿐. 당신은 너무 말이 많소.”
그럼 싸울 준비라도 하든가. 조선군은 지쳐서 잠에 떨어졌고 일본군 특공대가 함대 사이를 몰래 휘젓고 다녀도 모를 정도로 무방비 상태에 빠진다. 일본군은 이 불쌍한 함대를 세 겹으로 둘러쌌고 마침내 지난 6년 동안 피눈물나게 당했던 한을 푼다. 도도 다카도라, 와키자카 야스하루, 가토 요시아키. 다 이순신에게 당했던 사람들이었지. 이게 칠천량 해전의 전말.
정리해 보자. 주관적 역량에 대한 정확한 인식 없는 ‘획기적’ 방안은 대개 파국적 방안일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못하고 미적미적할 때 파국은 시작된다. 파국의 헬게이트의 문은리더의 자포자기와 오기의 사이에서 열리며 최후의 아둔함은 자신의 퇴로마저도 막아버리는 것으로 귀결된다.
칠천량에서 이순신이 피땀흘려 모은 세계 최강급의 조선 함대는 하룻밤에 불쏘시개가 됐다. 그리고 희망은 의외로 비겁한 사람들로부터 살아남았다. 상황 끝이라고 직감한 경상 우수사 배설의 함대는 일찌감치 전장에서 빠졌고 그 배들이 이순신이 올리는 비장한 상소 “아직도 신에게는 열 두 척의 배가 있사옵니다.”의 열 두 척이 되는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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