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와 영원 Progress and Eternity
프라다의 철학을 짧게 함축하면 이와 같다. 끊임없이 소재와 디자인을 진보시키고 진보된 수준을 영원히 유지하려는 집념. 프라다 CEO 미우치아 프라다의 철학이 고스란히 브랜드에 녹아있다. 덕분에 프라다는 특유의 세련미를 뽐내며 수많은 고객층을 보유하고 있다. 그렇다면 미우치아 프라다는 어떤 계기로 진보와 영원이라는 철학을 가지게 된 것일까? 그리고 프라다의 어떤 부분에서 이 철학이 적용되고 있는 것일까?
1913년 마리오 프라다(Mario Prada)가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프라다를 창립했다. 그는 뛰어난 가죽 가방 및 다양한 액세서리 제품을 만들었는데, 1919년 이탈리아 사보이아(Savoia) 왕실에 납품할 정도로 품질을 인정받았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이후 세계 2차 대전이 발발하면서 프라다는 쇠퇴의 길을 걸었다. 지속되는 전쟁으로 경제 심리가 위축되어 매출은 급감했고, 제품의 원재료를 구하는 길도 막혔다. 마리오 프라다의 두 딸이 가업을 물려받았으나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이탈리아 전역에 매장 하나만 운영할 정도로 재정 상황은 점점 나빠졌다. 그러나 1978년 창립자 손녀 ‘미우치아 프라다(Miuccia Prada)’가 프라다를 인수하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몇 년에 걸친 브랜드 리뉴얼을 통해 프라다는 급성장했다. 이 시기 미우치아가 단행한 선택을 이해하기 위해선 먼저 그녀를 알아야 한다.
미우치아 프라다는 독특한 이력이 있다. 바로 정치학을 전공했다는 것이다. 진보 성향이었던 그녀는 박사학위까지 취득해 이탈리아 공산당에서 활동하기도 했다. 특히 여성 인권에 관심이 많았는데 성숙한 페미니스트를 자처하며 시위를 주도하거나 참여했다. 이런 정치 성향을 가지게 된 것은 국가의 사회 분위기와 집안 환경의 영향이 컸다.
당시 이탈리아는 부패가 만연했다. 정경유착은 물론이고 당에 유리한 정책이 최우선으로 여겨지면서 국민들은 고통 속으로 밀려났다. 여성 인권도 존중받지 못했다. 기득권층은 여성들이 일을 하거나 사회에 목소리를 내는 것을 부정적으로 봤다. 그녀의 할아버지 마리오 프라다도 마찬가지였다. 프라다는 여성들이 활동할 수 없는 기업이었다. 그래서 프라다를 자기 아들에게 물려주려 했으나 아들이 원하지 않아서 할 수 없이 경영권을 딸들에게 넘긴 것이었다.
답답한 자국 정부와 가족 내 남녀 차별을 보고 자란 미우치아는 세상이 발전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다. 무너지는 현실이 한 차원 더 진보하고, 진보로 얻은 훌륭한 결실은 영원히 지속되길 바랐다. 그렇게 ‘진보와 영원’은 그녀의 철학으로 자리 잡았고 프라다를 운영하면서 브랜드 곳곳에 자연스럽게 적용됐다.
포코노 나일론의 탄생
미우치아 프라다는 패션 전공자 못지않은 디자인 감각이 있었다. 패션을 전공하지 않아서 오히려 자유로운 사고가 가능했다. 틀에 갇혀있지 않는 상상력으로 1979년 그녀는 프라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결과물을 만들었다. 그것이 ‘포코노 나일론(Pocono Nylon)’이다.
당시 경쟁 브랜드 대부분은 가죽으로 만든 가방을 출시했다. 이에 미우치아는 의문을 품었다.
- 관리도 어려운 가죽을 굳이 고집하는 이유가 뭐지?
- 가죽보다 튼튼하고 가볍고 관리하기 쉬운 소재는 없을까?
- 오래 사용할 수 있을 만큼 형태 보존력이 좋은 소재는 무엇일까?
그녀는 제품의 ‘진보와 영원’을 위해 다양한 소재를 찾아다녔다. 그렇게 해서 발견한 것이 나일론이었다. 미우치아는 할아버지가 쓰셨던 가방 보호 천을 보고 영감을 얻었다. 마리오 프라다는 여행을 다닐 때 나일론 천으로 가방을 감싸 보호했다. 나일론은 굉장히 질긴 섬유다. 내구성이 뛰어나고 오염물이 묻어도 쉽게 세탁 가능하다. 방수까지 되니 관리에 용이하다.
모두 가죽을 사용할 때 그녀는 진보된 시선으로 나일론을 활용해 가방을 만들었다. 완성된 나일론 가방의 존재는 독보적이었다. 가죽 못지않게 멋스러웠다. 가벼워서 여성들이 사용하기 좋았다. 튼튼해서 소비자들이 오랫동안 프라다 제품과 함께 할 수 있었다. 이는 프라다의 철학이 고객과 긴 세월 동안 존재한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이후 프라다는 명품 브랜드로서 입지를 단단히 다졌다. 가방 외에도 다른 액세서리와 의류에 동일한 소재를 활용하면서 시장의 호응을 얻었다. 세련된 검정 포코노 나일론은 브랜드를 대표하는 시그니처로 자리 잡았다.
사피아노 가죽
프라다의 두 번째 시그니처 소재는 사피아노 가죽(Saffiano Leather)이다. 표면에 격자무늬를 찍어 왁스 혹은 PVC 등으로 코팅한 가죽이다. 그래서 일반적인 가죽보다 단단하고 외부 오염에 강하다. 미우치아는 가죽도 포기할 수 없었다. 아무리 나일론이 좋아도 가죽 특유의 느낌까지 흉내 낼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탈리아의 질 좋은 사피아노 가죽을 가방과 여러 액세서리에 적용했다.
사실 사피아노 가죽은 프라다에서 1913년부터 사용했으나 주목받지 못했다. 가죽 본연의 느낌을 전달하지 않고 인위적인 가공으로 눈속임을 한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러나 미우치아는 사피아노 가죽의 가능성을 알아봤다. 가죽 가공을 정밀하게 하면 일반 가죽보다 월등한 우위를 가질 것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포기하지 않고 뛰어난 공방을 찾아다녔다. 그녀는 공방과 협력해 사피아노 코팅 소재 및 제작 기술 등을 발전시켰다.
이러한 노력 끝에 두 번째 시그니처 ‘사피아노 라인업’이 완성됐다. 프라다 사피아노 가죽 제품은 일반 가죽 제품보다 스크래치에 강하고 물이 닿아도 잘 젖지 않는다. 나일론처럼 형태가 오래 유지되어서 구매하면 장기간 사용할 수 있다. 특히 한국에서는 사피아노 지갑이 인기가 많다. 깔끔하면서도 내구성이 훌륭해 선물하기에 좋은 아이템으로 늘 거론된다.
지금은 다양한 브랜드에서도 사용할 만큼 보편화된 소재이다. 하지만 오랜 시간 꾸준하게 사피아노 가죽을 발전시키며 제품에 적용한 브랜드는 프라다가 유일하다. 포코노 나일론에 이어서 미우치아 프라다는 또 한 번 ‘진보와 영원’을 적용했다. 가죽을 진보시킴으로써 고객들이 프라다를 오랫동안 소유할 수 있도록 힘썼다.
패션에서 소재는 중요한 요소이다. 디자인이 훌륭해도 소재가 뒷받침해주지 못하면 가치가 떨어진다. 미우치아 프라다는 자기 철학을 표현할 수 있는 존재를 소재라고 판단했다. 그 결과 포코노 나일론과 사피아노 가죽이 세상에 등장했고 사람들은 프라다의 철학을 더 오래 간직할 수 있게 됐다.
폰다지오네 프라다
미우치네 프라다와 그녀의 배우자는 예술을 사랑한다. 특정 작가들의 작품을 모을 정도로 예술에 대한 애정이 높다. 1993년 두 부부와 자주 왕래했던 예술가 지인이 이런 제안을 했다.
당신들이 사용하지 않는 의류 창고를 작품 전시회 용도로 쓰는 건 어떻습니까?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프라다는 예술가들과 함께 문화 재단, ‘폰다지오네 프라다(Fondazione Prada)’를 운영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현대 미술 위주로 전시를 했지만, 점차 건축, 문학, 영화, 음악, 철학, 과학, 정치 등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과 협업하며 공간을 구성했다. 예술가들을 직접 발굴해 그들이 작품을 전시할 수 있도록 돕기도 하고, 언사를 초청해 시민들과 소통하는 강연도 주기적으로 진행했다.
한 패션 잡지 인터뷰에서 미우치네 프라다는 이런 이야기를 했다.
Q. 문화 재단을 운영할 만큼 예술을 각별히 여기는 듯하다. 이유가 있나?
A. 예술은 인간의 아이디어를 극적으로 표현하는 수단이다. 그 아이디어로 인간은 영감을 얻고 세상을 발전시킨다. 영감을 얻은 자아와 발전된 세상은 오랜 시간 유지되며, 다시 예술의 아름다운 아이디어를 만든다. 이것은 반복된다. 예술이야말로 진보와 영원을 담고 있다. 프라다가 지향하는 철학과 부합하다.
집에 돌아와 맥주를 마시며 본 영화 한 편이, 카페에 앉아 무심코 들었던 음악 한 곡이, 도서관에서 빌려 읽은 소설책 한 권이 인생에 큰 울림을 줄 때가 있다. 낯선 감정을 마주해 지나온 세월을 되돌아보거나, 반짝이는 아이디어가 떠올라 내일부터 새로운 삶을 사는 사람들도 있다.
예술가들은 섬세한 시선으로 대중과 세상에 유의미한 영향을 끼친다. 우리는 그 영향으로 더 나아진 세상을 마주하고, 그 세상 속에서 누리는 풍요가 오랫동안 이어지기를 희망한다. 프라다의 브랜드 정체성과 예술은 결이 맞다. 그들에게 예술은 ‘진보와 영원’이란 철학을 사람들에게 깊게 전달할 수 있는 매개체이다.
미우치아 프라다는 남다른 접근으로 프라다의 진보를 이끌어 왔다. 진보로 이룬 변화가 지속될 수 있도록 했다. 그것이 그녀가 오래전부터 추구해온 ‘진보와 영원’ 정신이다. 프라다는 지금도 끊임없이 발전하고 사람들의 마음속에 영원히 존재하고자 노력한다. 그런 의미에서 프라다는 소장할 만한 브랜드라고 생각한다.
취향에 따라 프라다를 싫어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제품은 한 세기 이상 지켜진 브랜드 철학을 품고 있다. 그 가치는 무시할 수 없으며, 객관적으로 봐도 충분히 매력적이다. 현재보다 더 나은 내일을, 더 나은 내일이 오래 지속되기를 바라는 프라다의 철학. 이 메시지가 마음을 울렸다면 당신에게 프라다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브랜드일 것이다.
원문: 코지오의 브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