맬콤 글래드웰의 저서 <아웃라이어>를 통해 전세계 대중들에게 각인된 일명 ‘1만 시간의 법칙’이란 여러 방식으로 표현되지만, 가장 근원에 가까운 주장은 “무엇인가에 대해 전문가가 되려면 1만 시간을 그것에 투자해야 한다”로 정리될 수가 있다. 최근 뉴욕 타임즈에서 이 주장이 틀렸을지도 모른다는 연구결과를 기사화하면서 많은 갑론을박이 있었다.
그러나 그 논쟁을 가만히 살펴보면, 사람들은 이 법칙에 대해 잘못된, 혹은 피상적인 이해를 하고 있으며 거기에 대한 반론을 이해하는 방식 역시 조금 왜곡된 면이 있는 편이다. 그래서 그 논쟁의 근원으로 돌아가 이야기를 좀 진행해 보고자 한다.
연습량이 유일한 시금석이다
1993년, 스웨덴 출신의 앤더스 에릭슨(K.Anders Ericsson) 미국 콜로라도대 연구원과 독일 막스플랑크 연구소의 랄프 크람페(Ralph Th. Krampe), 클레멘스 테쉬뢰머(Clemens Tesch-Römer) 연구원이 심리학평론(Psychological Review)에 “전문역량 습득에 의도적 연습의 역할(The role of deliberate practice in the acquisition of expert performance)”이라는 논문 하나를 싣는다.
그리고 이 논문은 심리학계의 해묵은 미완의 떡밥인 재능과 연습의 문제에 대한 주목할 만한 연구결과로서 무려 4400건에 이르는 다른 논문에서의 인용이 이루어진다.
이 논문의 내용을 간단히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이 연구팀은 20살 전후의 독일 서베를린 뮤직 아카데미의 바이올린 전공 학생들을 세 종류로 나누어 교수들에게 추천을 받았다. 우리나라로 치면 한예종 바이올린 전공학생을 가지고 연구를 한 것이다. 그들은 등급을 “세계적 프로 연주자가 될 사람(Best Student)”, “우수한 학생(Good Student)”, “그냥 공립학교 선생이나 될 사람(Teacher)”으로 셋으로 나누었다.
기준은 연습 실력에 기반한 교수들의 평가였다. 5세 전후부터 바이올린을 잡은, 기타 생물학적 차이가 별로 없는 이 집단을 놓고 얼마나 연습을 했는지 조사를 해 본 결과, 첫번째 – 그러니까 아주 우수한 집단은 시간이 갈수록 연주시간을 늘린 끝에 베를린 뮤직 아카데미에 입학하는 시점에는 산술적으로 연습시간이 1만 시간에 달해 있었고, 그냥 우수한 학생들은 약 7~8천 시간, 평범한 학생들은 약 3~4천시간을 연습했다는 결론을 얻었다.
보강 연구 등을 통해 피아노를 포함한 여러 분야를 대상으로도 이런 조사를 해 보니, 비슷한 패턴이 검출되었다. 계량적으로 연구해본 결과, 이 세 집단의 연주 실력의 차이에서 약 80%가 그들이 연습했다고 주장한 시간의 차이로 설명 가능하다는 결론을 얻었다. 또한 누구도 연습량에 비례하지 않는, 즉 실력이 연습량에 비해 좋다든가, 혹은 반대의 상황에 처해있지 않았다.
에릭슨 연구팀은 그래서 결론을 내렸다. 어떤 기예에서 ‘대가'(해당 집단에서 월등히 뛰어난 사람)가 되기 위해서는 최소 1만 시간의 연습이 필요하다. 연습량이 곧 퍼포먼스의 가장 큰 결정 요인이라고.
‘아웃라이어’, 성과, 연습
말콤 글래드웰은 <아웃라이어>에서 이 에릭슨의 주장을 간단하게 “1만 시간을 연습하면 전문가가 된다”는 이론으로 설명했다. 에릭슨의 연구에서는 Best Student에 해당하는 집단을 ‘아웃라이어’라고 정의하고, 여기에 자신의 결론을 보탠다. “이렇게 누구나 1만 시간을 노력하면 두각을 드러낼 수 있는데, 환경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구조와 환경이 많은 것을 결정하게 되는 것”이라는 식의, 1만 시간이라는 허들에 투자가 가능한지 아닌지를 통한 환경결정론을 제시한 것이다.
그러나 에릭슨은 글래드웰을 두고 자신의 주장을 올바르게 번역하지 않았다는 투로 비판했다. 즉 이 둘 사이에는 사실 미묘한 차이가 있다. 에릭슨은 선천적 재능을 거의 인정하지 않으며 그에게 1만 시간은 그저 압도적 퍼포먼스를 내기 위해 필요한 시간인 것이고, 글래드웰의 1만 시간은 존재하는 선천적 재능을 퍼포먼스로 정제하고 전환하기 위해 필요한 시간인 것이다. 그가 예로 든 비틀즈는 그에게 있어 천재적 재능의 결정체다. 글래드웰은 그렇기에 BBC와의 인터뷰에서 “나 역시 그에게 완전히 동의하지 않는다”고 언급했다고 볼 수 있다.
이 에릭슨의 기념비적인 연구는 당연히 학계에서 엄청난 화제가 되었다. 에릭슨의 논문은 4천번이 넘게 다른 논문에서 인용되었고, 실제로 지능(Intelligence)지에서는 17개나 되는, 반박 논문과 에릭슨의 재반박, 재재반박 등을 한꺼번에 실은 특집을 낸 적도 있을 정도. 최근 화제가 된, 뉴욕 타임즈나 BBC에서도 다룬 연구는 그 연장선상에 해당한다.
Brooke N. Mcnamara, David Z. Hambrick, Frederick L. Oswald가 주도해 미국 미시건대, 라이스대, 사우스일리노이대, 영국 브루넬대, 호주 에디스코완대 3개국 5개 대학에서 음악과 체스 실력에 관한 88개의 논문을 메타 분석을 해 본 결과, 에릭슨의 주장이 들어맞지 않았던 것이다. 그들의 논문 <음악, 게임, 스포츠, 교육, 경력에서의 의도적 연습과 기량 Deliberate Practice and Performance in Music, Games, Sports, Education, and Professions>에서 그들이 음악, 스포츠, 체스 등에서 1만 시간의 법칙 – 즉 연습량과 퍼포먼스 간의 상관관계를 분석해 보니, 분야에 따라서 조금씩 달랐지만 설명이 되는 부분이 고작 30%에도 미치지 못했고, 심지어 학업의 경우 무려 4%라는 어처구니없는 결과가 도출되었다.
그 이전에도 에릭슨의 연구에 대한 반론은 제기되었다. 아르헨티나 체스 선수들을 조사한 페르낭 고베(Fernand Gobet), 기예르모 캄피텔리(Guillermo Campitelli)의 2007년 연구가 대표적이다. 104명의 선수 중, 어떤 사람은 최상급의 기량을 갖추는 데 2년밖에 걸리지 않았지만, 무려 26년이 걸린 선수들도 존재했으며, 심지어 평생을 연습했음에도 최상급에 도달하지 못한 경우도 적지 않았다.
원 논문의 연구자인 앤더스 에릭슨은 뉴욕 타임즈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이미 반박을 준비하고 있다고 밝혔으며, 그들의 반론에 대해 ‘연습'(Practice)의 정의를 지적했다. 저 3명이 주도한 연구에서 그들이 정의한 연습은 ‘일’이나 ‘유희’ 등을 포함한, 그 분야에서 뭔가를 한 모든 시간을 포함하는 것이며, 자신의 연구에서 연습은 그런 일이나 유희를 제외하고 교사와의 1:1 교습과 같은 철저하게 자신이 잘못된 부분에 대해서 피드백을 받을 수 있는 것을 연습으로 정의했다는 것이다.
의도적인 연습과 선천적 재능
여기서, 앞서 언급한 에릭슨의 논문 제목을 잠깐 다시 살펴보자. 연습(Practice)앞에 뭔가가 붙어 있다. Deliberate(의도적,고의적,신중한). 에릭슨이 정의하는 의도적 연습(Deliberate Practice)이란 일(Work)이 아니며, 놀이(Play)도 아니다. 그것은 이를테면, 고도로 신중하게 계획된 수련을 말한다. 단순히 직장에서 해당 분야에 종사한다? 내가 주말에 첼로를 잡고 뭔가 연주해 본다? 그런 건 연습이 아니라는 것이다.
첫번째로 자신의 약점을 없애고 기량을 높이기 위한 목적으로만 학습하고, 자신을 연마하는 것이며, 두번째는 그런 목적을 위해 자신이 하는 노력의 방향과 성과를 다시 피드백해 줄 수 있는 자신보다 앞선 사람, 그러니까 멘토로도 부를 수 있고 교수라고도 부를 수 있는 사람이 존재해 끊임없이 그 고도로 구조화된 기예의 스트레칭 과정을 검토하고 교정해 나갈 수 있어야 비로소 에릭슨이 말하는 ‘의도적 연습’이고, 그 과정의 누적이 이루어지면 원래 선천적 재능이 낮더라도 충분히 어느 순간 평균을 훨씬 웃도는 ‘Best Student’이자 프로(전문가)가 될 수 있다는 주장(정확히 말하면 선천적 재능이 퍼포먼스를 결정하지 않으며 사실상 선천적 재능은 없는 것 같다)이다.
에릭슨은 BBC와의 인터뷰에서 글래드웰의 요약과는 다른 지점을 이 개념을 얘기하면서 다시 언급한다. 글래드웰은 이 ‘의도적 연습’이라는 개념을 전혀 언급하지 않았으며 연습에도 ‘질’이 있다는 것이다. 자신의 연구에 따르면, 최고의 뮤지션들은 “실질적으로 더 적은” 연습시간을 축적했다고 그는 주장한다. 여기서 말한 연습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낑낑거리는 연습(Practice)인 거고, 최고의 뮤지션이 실질적으로 더 적은 연습시간을 축적하고도 더 높은 기량을 내보이는 것은 그들의 의도적인 연습 시간이 다른 집단을 넘어서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요약해 보면, ‘1만 시간의 법칙’을 둘러싼 대립은 실제로는 일반적인 대중이 상상하는 것과 다른 범주에 있다. 그들의 대립은 완전한 의미의 배타적이고 선천적 재능이 존재하고 그것이 퍼포먼스를 결정짓느냐에 관련된 것이지, 개인이 심산유곡에서 틀어박혀서 죽을 둥 살둥 노력하면 초인이 될 수 있는지 어쩐지에 관한 것이 아니다.
개인이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기량의 발현에 있어서 어떠한 형태로 무슨 짓을 하더라도 절대로 천재에 근접할 수 없게 만드는 천재만의 선천적 재능이 존재하는가? 돈을 쓰든, 엄청난 스승을 불러오든, 무슨 짓이든 하면 개인과 천재간의 퍼포먼스의 차이를 없앨 수 있는 지 아닌지에 관한 논쟁인 것이다. 수단의 현실성 따위는 부차적인 문제다. 이는 심리학적이고 뇌과학적인 연구지, 사회학적이거나 경제학적인 연구가 아니다.
오히려 에릭슨의 의도적 연습이라는 개념은 개인에게 엄청난 희생을 요구할 뿐만 아니라(1만 시간은 하루 8시간에 주말을 쉰다고 가정하면 3~4년에 이르는 엄청난 시간이며 이 시간을 전부 일도 하지 말고, 즐기지도 말고 ‘수련’에 써야 한다고 생각해 보라), 피드백을 매우 중요시여기는 개념이다.
남에게 피드백을 받으려면 일반적으로 부를 교사에게 이전해야 하며, 반대로 말하면 에릭슨의 의도적 연습은 ‘돈으로 쳐바르면’ 나도 천재적 기량을 보여줄 수 있을 것이라는 개념이기도 하다. 이를 인정한다면, 재능을 뛰어넘는 범재의 노력같은 그림이 아니라 사회적 요건이 개인의 퍼포먼스를 극단적으로 좌지우지할 수 있다는 당혹스러운 결론이 등장하게 된다.
또한 포브스의 지적처럼, 1만 시간의 법칙이 틀린 것이 맞다는 가정 하에서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싹수가 없는 분야를 빨리 정리하고 자신이 잘 할 수 있는 분야를 빨리 찾아내는, 즉 적성을 탐색하는 것이 된다. 최근의 반론을 주도한 햄브릭 교수의 말처럼 “개인의 능력을 치밀하고 공정하게 평가할 수 있다면, 굳이 엄청난 시간과 노력을 쏟아도 두각을 나타내지 못할 분야에서 뒹굴고 있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또한 햄브릭의 연구에 따르면 ‘어린 시점에 분야를 접할 수록’ 성과가 좋았으니, 이 과정은 빨리 이루어져야 한다(적성의 탐색이 고등학교 막판에나 급조되어 이루어지는 한국의 교육과는 상극이다).
가난한 천재와 부유한 범재
1만 시간의 법칙은 기본적으로 실력을 객관적으로 측정 가능한 분야에서 보여지는, 퍼포먼스가 독보적인 수준에 오르는 데 있어서 걸리는 시간을 패턴화한 결과다. 그러나 범위를 좀 확장해 생각했을 때, 사람들이 생존 경쟁에서 마주하게 되는 대부분의 상황에서 ‘1만 시간’의 순도높은 의도적 연습이 가져다 줄 수 있는 성과와 가장 유사한 것은 바로 행정고시 합격이다.
현행 행정고시 일반직에서 합격자들의 평균 수험기간은 3.5~4년이며, 고시생의 일과를 생각했을 때 이는 약 1만에서 1.5만시간을 의미한다. 실제로 행정고시에 합격한다는 것은 충분히 ‘아웃라이어’의 범주에 들어감을 생각하면, 1만 시간의 법칙은 확실히 일반적인 사람의 생존 경쟁에서도 나름대로의 의미를 가질 수는 있다.
그러나 반대로 이만한 기간을 집중할 수 있는 곳에서 자리를 잡고, 책을 사 보고, 인터넷 강의를 듣거나 학원에 가고, 끊임없이 강의와 모의고사, 첨삭으로 피드백을 받는데 걸리는 시간과 돈을 생각하면, ‘1만 시간의 법칙’이라는 것이 얼마나 만만치 않은 것인지도 깨달을 수밖에 없다.
우리가 1만 시간의 법칙을 인정한다는 것은 역으로 말하면 1만 시간의 의도적 연습을 위한 인내뿐만 아니라 경제적 자원이 존재해야만 성과를 얻을 수 있음을 의미하며, 어떤 면에서는 천재를 인정하지 않는 대신 일반적으로 빈자는 ‘아웃라이어’가 될 수 없다는 결론 또한 얻을 수 있다.
상대평가와 환경의 안배
현실에서 마주하게 되는 많은 개인의 노력은 ‘상대평가’의 생존자가 되기 위함이며, 나 혼자서 1만 시간을 의도적으로 연습하면 일반적으로 경쟁에서의 승리를 어느 정도 보장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1만 시간의 법칙은 어디까지나 절대적 기술의 숙련이 축적되는 과정을 의미하지, 경쟁에서의 승리를 의미하는 단어가 아니다.
글래드웰조차 1만 시간의 노력을 위한 환경적 요건의 중요성을 언급하고 있음에도 그 법칙은 자주 상대적 경쟁의 승리를 위한 단어로서, “너 지금 1만 시간은 노력해 보고 말하는 거야?” 라는 식의 자기계발적인 프로파간다로 소모되고는 한다. 구태여 한국만이 아니며, 1만 시간의 법칙은 태동한 그 순간부터 그런 식으로 재생산되어 왔다.
그러나 1만 시간의 법칙을 둘러싼 논쟁은 결국 부로 재능을 얼마만큼 성과의 영역에서 대체 가능한지를 의미한다. 나는 1만 시간의 법칙에 동의하지 않지만, 바이올린의 코드를 모르는 사람이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 정도는 안다. 기질과 지식의 결합이 기량이 되는데는 시간이 필요하며, 글래드웰이 <아웃라이어>에서 언급했듯 그 법칙은 개인의 노력부족을 탓하기 위한 사회적 프로파간다로서가 아닌, ‘1만 시간’이 아니더라도 일정한 시간과 ‘피드백’에 액세스하기 위한 환경을 가능한 다수에게 마련해 주는 것이 신이 뿌린 가능성을 키우는 데 있어 필수 불가결하다는, 더욱 사회적인 부의 분배와 평등에 가까운 논점을 우리에게 던지고 있는 것이다.
원문: 잉간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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