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생활 15년 차에 생각보다 많은 입사와 퇴사를 반복했다. (난 아빠처럼 한 회사에서 정년퇴직할 줄 알았는데…) 물론 20대의 직업이 별 탈 없이 정년을 맞이하면 편하겠지만 요즘이 어디 그런 시대인가. 이직으로 연봉을 올리기도 하고, 적성에 맞지 않아 직장을 옮기기도 하고, 사람에 치여서 퇴사하기도 하는 등 이런저런 사유로 인해서 이직 또는 퇴사하는 경우가 정말 많다.
사회 초년생 시절 그리도 어려웠던 ‘입사’가 경력이 쌓이면 그리 어렵지 않은 수준에 도달하기도 하고 여러 상황들로 인해 프로 이직러가 되기도 한다. 그러면서 맞이하는 몇 가지 곤란한 상황이 바로 퇴사 조율과 인수인계 문제가 아닐까 싶다.
미우나 고우나 오래 다녔거나 짧게 다녔거나 어찌 되었든 간에 내가 이곳을 떠날 때 업무에 대해 새로 오는 사람에게 인수인계를 해주고 가는 것은 당연한 절차다. 물론 여러 차례 이직을 했던 나와 남편은 ‘인수인계? 그거 먹는 거야? 그런 거 제대로 받아본 적이 있나?’라는 생각이긴 하지만.
직장인들에게 즐거운 퇴사는 거의 없을 것이다. 모니터에 ‘도비는 자유에요’를 깔아두고 가는 마음 누구나 이해하니까. 그래도 아무리 전 회사가 드럽고 치사해도 퇴사나 이직 시 깔끔한 마무리를 하는 것이 모두에게 좋다고 생각한다. 셰익스피어도 말했다. 끝이 좋으면 다 좋다고.
회사생활도 참 어렵지만 퇴사만큼은 진짜 직장생활의 초고난도 부분이 아닐까 싶다. 멘탈이 너덜너덜한 상태인데 퇴사조차 맘대로 진행이 안 되는 상황에 처하면 진짜 지구를 떠나고 싶은 마음이 드니까. 직장 구하는 것도 어려웠는데 나가는 것도 이렇게나 어렵다니.
전에 오래 다닌 회사를 퇴사할 때는 이미 몸과 마음이 만신창이었는데 그래도 마무리를 잘해야 한다는 생각에 그동안 함께 지냈던 사람들과 인사하다가 저녁 8시에 집으로 출발했던 기억이 난다. 인사를 다니면서 너무 힘들어서 그냥 회사 다시 다닌다고 할까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까. 그렇게 입·퇴사를 반복하면서 약간의 인수인계 팁 같은 것을 느꼈다.
1. 전임자들이 인수인계라도 해주면 그 사람은 천사다. 똥만 안 싸놔도 어디냐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엉망인 경우가 많으므로. 거의 극한상황에서 비상탈출식으로 퇴사하기 때문에 업무 마무리나 인수인계에 대한 의지가 별로 없다. 때려치우는 마당에 뭐가 보이겠는가…
2. 문서를 잘 쓰는 전임자를 만나는 것은 행운이다. 전임자를 직접 만나지 못할 경우 문서로 인수인계서를 전달받게 되는데 정리의 왕들이 쓴 인수인계서는 진짜 신이 주신 선물이다. 원페이퍼 인수인계 자료 받아본 적 있는가? 아마 그 사람은 퇴사 시 책임 면피하려고 대충 쓰고 나간 게 분명했다. 그나마도 없는 경우도 있고…
3. 황당하고 당황스러운 상황일지라도 전임자를 욕해서 나를 나아 보이게 하려는 생각은 접어두는 것이 좋다. 아무리 그 사람이 치를 떨며 회사에서 나갔다고 한들 회사 사람들은 그 사람을 나보다 오래 봤으니까. 어쨌든 인수인계를 한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퇴사할 때까지 최선을 다한 것이다. 그리고 상 빌런이 아닌 이상 기존 직원들은 전임자를 욕하는 나를 이상하게 생각할 확률이 훨씬 높다. 괜히 얕은수 쓰다가 도매금으로 넘어가지 말고 그냥 묵묵히 실력으로 인정받는 게 나은 방법일 것 같다.
4. 입사하고 일 잘 모르겠다고 전임자를 볶으면 차단당한다. 이미 인수인계를 받았다면 전임자에게 연락을 최소화하는 것이 맞다. 앞에도 말했지만 그냥 떠나는 사람들이 태반이고 엉망인 인수인계서 던져주는 경우도 많다. 그리고 대부분은 퇴사하고 다른 곳의 직원이 되어 정신없이 바쁜 상태고. 새로운 곳에 적응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매우 힘든 일이다.
팀장이나 부장이 전임자 전화번호를 주면서 물어보라는 경우가 있는데 절대 전화하지 마시라… 안 받거나 받아도 좋은 소리 못 듣거나 둘 중 하나다. 어떤 이들은 퇴사하고 번호도 바꾸는 현실이니까. 번호는 안 바꿨다면 한 번 정도는 받아줄 테니 질문 리스트를 미리 써서 한 번에 다 질문하고 다시는 연락하지 않는 것이 좋다.
나 역시 전임자한테 연락할 일이 생기면 등줄기에 식은땀이 난다. 가급적이면 내가 최대한 해보고 그래도 안 되면 연락을 해보긴 하는데 대부분 ‘니가 알아서 하세요’ 같은 반응이었다. 그래서 그냥 전임자는 없는 사람이다 생각하는 게 낫다.
4번의 경우 때문에 이번에 엄청 스트레스를 받았었다. 계획에 없던 이직이 성사되는 바람에 최근 직장을 옮겼는데 인수인계 시간이 빠듯해서 이직을 하고 나서 후임이 구해졌다. 전 직장에서는 사람 뽑히면 인수인계를 잠깐이라도 해달라고 요청했고 기분이 상해서 퇴사한 게 아니라서 여건이 되면 그러마 하고 있었다.
전 직장에 입사했을 때 환상의 컴퓨터를 보았다. 인수인계를 위한 폴더 정리가 기가 막히게 잘 되어있었던 것. 인수인계 문서도 훌륭했다. 최초 작성자는 5년 전쯤 일했던 직원이었고 그분은 아마도 문서의 신이었던 것 같다. 누가 봐도, 누가 와도 일을 할 수 있게끔 폴더와 인수인계서를 정리해두었고 그대로 계속 사람만 바뀌어 왔던 것. 반면 새로 옮겨온 곳은 한숨 나오는 상태였지만 뭘 어쩌겠는가. 내가 옮겨온 것을…
문제는 전 직장 인수인계에서 벌어졌다. 현 직장에서 반나절 짬이 나는 상황이라 전 직장에 찾아가서 인수인계를 해줬다. 이것저것 알려주다 보니 시간이 한참 지났고, 워낙 잘 정리된 자료들이 있으므로 ‘컴퓨터에 다 들어있으니 검색해서 파일 보고 하시면 돼요.’라고 알려줬다. 나도 그렇게 일했었으니까. 신입도 아니고 경력자라는데 별일 없겠지 했는데 별일이 있었다.
전 직장 관리자분이 내 번호를 그분에게 줬고, 카톡이 오기 시작한 것. 그런데 이게 업무를 묻는 것이면 모르겠는데 정말 황당한 질문이 밤낮도 없고 주말 연락까지…. 후임자의 카톡 알림만 떠도 스트레스로 머리가 지끈거릴 지경이었다.
팀 분들 계약직이에요? 정규직이에요? 여기 정규직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해요? 식사 시간은 몇 시에요? 밥 먹고 늦게 복귀해도 돼요? 그 업무 하시는 분은 여자예요 남자예요?
등등… 남은 사람들에게 전임자가 톡 씹더라 얘기 나오게 하기 싫었던 나는 저 기가 막히는 질문에 인내심을 갖고 대답을 했다. 왜 그랬을까… 첫 번째의 저 얼토당토않은 질문이 왔을 때 차단했어야 했는데. 갓 입사해놓고 다른 사람의 정규직 여부가 왜 궁금하지?
이게 화근이 될 줄이야. 아무 때나 오는 저런 카톡에 신경질이 머리끝까지 나서 예민해진 상태의 나를 보고 남편은 제발 그 카톡 차단하라고 난리가 났다. 좋게좋게 ‘부장님한테 물어보세요. 인수인계서 보세요’를 몇 번 말했는데도 계속 톡이 오는 데다가 더 열 받는 것은 대답해준 것을 또 묻는 것이었다. 인수인계해 주는 동안 멍하니 듣고만 있더니 대충 듣고 나한테 매번 연락해서 물어볼 심산이었나보다.
그리고 거래처를 묻는 톡에 나의 인내심은 바닥이 났다. 당신 신입이냐고, 이제 좀 알아서 좀 하라고 퍼부었다. 나도 지금 일하느라 바쁜데 언제까지 질문할 거냐고. 그랬더니 그분 왈.
귀찮으세요? (헐) 일하시는지 몰랐어요. 전 여태 전임자들이랑은 연락하며 잘 지내는데요?
퇴사한 지 2주가 지났는데도 전 직장에 가서 목 터져라 인수인계를 직접 해줬는데 계속 후임자에게 연락이 오면 귀찮은 게 아니라 싫은 게 맞고, ‘직장 옮겼는데 와줘서 고맙다’고 몇 명이나 나한테 말하고 가는 걸 옆에서 보고는 내가 일하는지 몰랐다는 말에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그리고 저 말은 만약 쉬는 중이면 질문에 계속 대답해야 한다는 건가? 말도 안 된다. 그럴 거면 뭐 하러 퇴사하나? 그냥 다니고 말지.
더 이상 말 섞어봐야 나만 ‘귀찮아서 인수인계 안 해주는 인간’이 될 것 같았다(이미 됐을 거다). 대체 그분과 잘 지낸다는 전임자들이 궁금할 지경이었다. 퇴사하며 인수인계해 준 사람과 잘 지내는 케이스가 얼마나 있을까.
갑작스런 나의 이직으로 전 직장에 업무 딜레이가 안 생겼으면 해서 열심히 인수인계 해주는 호의를 보였는데 엉뚱한 사람이 권리를 주장하고 나선 꼴이었다. 그분의 태도는 자신이 더 이상 업무에 대한 질문을 안 할 수 있을 때까지 내가 꼬박꼬박 대답을 해줘야만 한다는 것처럼 보였다.
난 그곳을 이미 퇴사했고 난 그 사람의 사수가 아닌데. 퇴사자가 죄인도 아니고 언제까지 인수인계 지옥에 있어야 하는 건지. 인수인계가 이런 것이라면 아무도 퇴사 못 할 것 같다.
이번 일로 크게 깨달았다. 어차피 퇴사자는 뭘 어떻게 해도 욕을 먹을 테니 할 것만 딱 해주고 연락을 잘라야 한다는 것. 어느 카페에 후임 전화 한 번 받으면 헬게이트 열린다는 경고가 괜히 있는 것이 아니었다. 정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질문 내용을 정리해서 이메일로 보내라고 하는 것이 가장 나을 것 같다. 그럼 적어도 본인이 필요할 때마다 실시간 카톡으로 날아오진 않을 테니.
질러놓고 나니 남편이 어차피 욕먹을 거 그냥 처음부터 차단하지 뭐 하러 질질 끌다 쓸데없는 말을 하냐며 타박을 줬다. 그러게. 나 아직 프로이직러는 아닌가 봐…
원문: 당근쥬스의 브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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