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그 폭력적인 말
속담에 이런 말이 있지 않나. “모난 돌이 정 맞는다”고. 그러니까 이 말은 튀거나 나대면 정을 맞을 수도 있으니 알아서 처신 잘하라는 뜻이다. 우리 사회는 유독 남들과 좀 다른 사람에게 인내심이 없다. 그래서 우리는 미움받고 싶지 않고, 괜한 눈총을 받고 싶지 않아서, 별난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기 싫어 부단히 눈치를 본다.
정작 좋아하는 게 뭔지 생각하지 못하게 되고 남들의 생각과 내 의견이 좀 달라도 웃어넘기는 게 편했다. 그때마다 반짝거리던 내 모습이 조금씩 갈리고 마모되는지도 모르고.
당시 나는 동유럽을 몇 개월간 홀로 배낭여행을 하던 중이었다. 우연히 만난 친구들과 저녁을 먹을 겸 ‘골드 피쉬’라는 이름의 바로 향했다. 골드 피쉬를 기억하는 이유는 영화 〈해리 포터(Harry Potter)〉 시리즈 속 다이애건 앨리로 향하는 비밀의 문이 있을 것 같은 신비로운 분위기 때문도 있지만, 그보다는 내가 나라는 사람에 대해 아는 게 없다는 뼈아픈 자기 성찰을 하게 만든 곳이라 그렇다.
그날따라 유독 독특한 색채를 발산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집트 출신의 평화주의자로 종교 갈등에 관심이 많은 액티비스트 모하메드, 분쟁 지역을 여행하면서 참상을 알리고 《뉴욕 타임스(The New York Times)》 등에 기고하는 대니얼, 예술적인 영감으로 가득한 보스니아 출신의 파티마.
그들은 정말이지, 자기 자신에 대한 확신이 넘쳐 보였다. 확고한 정치적 신념이 있었고 이를 표현하는 데 거침이 없었다. 의견이 다르면 우아하게 서로를 존중하면서도 무작정 동의하지도 않았다. 더불어 문학이든 음악이든 아니면 이 한 잔의 술이든 자신이 좋아하는 것의 기준도 확실했다. 그들의 열정적인 대화의 한가운데 섞여 있으니 마치 원테이크 영화 속에라도 들어온 기분이었다. 때마침 배경도 유럽이지 않은가.
그러던 중 대니얼이 내게 “그래서 좋아하는 음악 장르는 뭐냐”는 질문을 불쑥 던졌다. 나는 머쓱하게 “주간 차트 Top 40”라고 말하고는 입이 말라 오렌지 캄파리를 한 모금 털어 넣었다. 그들은 내 말에 “너 유머 감각이 장난 아니네” 하며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웃음이라도 줬으니 됐다며 스스로를 위로했다.
계속되는 그들의 대화에 집중하지 못하고 벽에 있는 격자무늬 개수나 세면서 속으로 생각했다. 내가 이렇게 재미없는 인간이었다니. 딱히 좋아하는 것 없이 물 흐르듯 살았다니. 사수하고 싶은 소중한 신념도 없고, 누군가 내 말에 조금이라도 반박하면 심장이 빨라지면서 스스로를 의심했다. 평생을 함께했으면서도 나는 여전히 내가 누군지 몰랐다.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시작은 아마 학창 시절부터였을 것이다. 또래 집단에게 쟤는 좀 특이한 애라는 낙인이 찍히는 게 두려워 별나다고 지적받았던 내 특성들을 감추고 지냈다. 획일적이고 꽉 막힌 학교 분위기도 한몫했다. 아침 일곱 시부터 밤 11시까지 학교에 남아 오로지 정답을 맞히기 위한 공부를 했다. 선생님의 의견에 반대하는 건 상상할 수도 없었고, 때때로 학생들을 길들이겠다는 명목 아래 선생님들은 폭력을 행사하기도 했다. 그렇게 나는 내 개성과 특색을 사포로 갈아 평평하고 고르게 하며 점차 납작해져 갔다. 정해진 시스템을 의심하지 않는 성실한 사람, 똑같은 틀로 찍어 대량 생산한 공장형 인간처럼.
의견을 적극적으로 피력하기보다 최대한 남들에게 묻어가는 게 쉬웠다. 새삼스럽게 내가 누군지, 아니 그보다는 내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탐구하기 시작했다. 확고한 취향과 주관을 갖는 것은 어지러운 세상에 단단하게 뿌리내리기 위한 선행 조건이다. 우리가 외부의 시선과 말에 흔들리는 것은 자기를 잘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A를 좋아하는지 B를 좋아하는지 나조차 헷갈리는 상태에서 누군가 “너는 A를 좋아하잖아”라고 말하면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것이다. 세상은 그런 방식으로 우리를 간단히 흔든다.
나만의 취향과 주관을 개발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할까? 경험상 몸으로 때우는 것 외에는 딱히 답이 없다. 배스킨라빈스에서 내 입맛에 맞는 아이스크림을 찾으려면 맛보기 스푼으로 몇 번이고 직접 먹어보는 수밖에 없는 것처럼.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시작하기도 전에 지레짐작하지 않는 마음가짐을 가지는 것이다. 뜻밖의 시도에서 의외의 것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르니까.
내 경우에도 웨이트 트레이닝을 하기 전에는 고문 기구처럼 보이는 운동 기구 때문에 거리감이 느껴졌는데, 일단 시도해봤더니 생각보다 재능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지금은 주 3회씩 내 몸무게보다 무거운 중량으로 스쿼트를 한다. 보기에 별로 맛없어 보였던 터키식 디저트 바클라바는 내 인생 디저트로 등극했다. 그런 작디작은 경험들이 쌓인 덕분에 일단 하고 보는 경험주의자로 살게 됐다. 경험을 확장할 방법은 다음과 같다.
- 카페나 레스토랑에서 신메뉴를 먹어본다. 맛있으면 인생 음식으로 삼으면 되고, 맛없으면 그저 친구들에게 들려줄 재미난 에피소드 하나 생긴 셈 치자. 새로운 경험에 웬만하면 yes를 해보자.
- 나와 정반대의 문화권에서 자란 사람과 깊은 대화를 나눠본다. 내가 당연하게 생각했던 것들이 실은 당연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귀중한 경험을 할 수 있다. 그만큼 내 세계는 확장될 것이고, 새로운 것에 대한 면역력이 생겨 한층 말랑말랑한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이다.
- 외국에서 한 달 이상 거주해본다. 여행자로 잠깐 방문하는 것과 이방인으로 직접 살아보는 것은 차이가 크다. 모국에서 지닌 사회적 지위, 보호막, 가족이나 친구 없이 홀로 살다 보면 본연의 내 모습이 더욱 투명하게 보인다.
- 한 분야의 오타쿠가 돼본다. 특정 장르나 분야에 대해 언급하면 주변 사람 모두가 당신을 떠올릴 만큼 열정을 가져보자. 이를테면 18–19세기 영국을 배경으로 한 고전 영화를 전부 보거나, 로마 공화정 시대의 역사를 탐구해보거나, 벨기에 맥주에 흠뻑 빠지거나, 베트남 남부 지역 음식을 만들어보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자연스레 자신만의 캐릭터를 구축해나갈 수 있을 것이다. 매력적인 사람이 되는 건 덤이다.
- 가끔 안 하던 짓을 해본다. 거창한 일일 필요는 없다. 퇴근길에 색다른 길을 걸어보거나 일상의 루틴을 바꿔보는 것, 평소 들어본 적 없던 장르의 음악을 들어보는 것, 집 안의 가구 배치를 바꾸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 스스로에게 질문을 해본다. 내 의견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사실은 타인으로부터 주입된 의견은 아닌가? 누군가가 스쳐 지나가듯이 한 말을 사실 확인도 없이 그대로 믿어버린 적은 없는가? 자기 신념에 한 발짝 물러서서 질문해보자.
- 나는 무엇이든 될 수 있음을 인정해본다. ‘웨이트 트레이닝을 열심히 하면서 머리가 아플 정도로 달달한 터키식 디저트를 좋아하는 사람.’ 이 문장이 모순적으로 들리는 이유는 사회가 규정한 이미지에 부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운동을 열심히 하는 사람은 케일 주스만 갈아먹고 철저하게 식단 관리를 한다는 이미지가 있지만, 사회가 규정한 것들을 무시하고 뻔뻔하고 당당하게 나로 살아가 보자.
어쩌면 이는 깊숙한 곳에 숨어 있는 나 스스로를 발견하는 것보다, 주체적으로 나 자신을 만들어가는 과정인지도 모르겠다. 규정할 수 없는 애매모호한 사람이 되려고 한다. 사회가 만들어낸 컬러 차트에 들어맞지 않는 디테일한 개인이. 그리고 아마 그 과정에서 ‘쟤 왜 저래’라는 타인의 따가운 시선을 받겠지만 되도록 개의치 않으려고 한다. 남들의 의견이라는 실체도 없고 보이지도 않는 것을 신경 쓰기엔 인생은 너무나 짧으니까.
원문: 최지미의 브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