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6월 13일. 김대중 대통령은 전쟁 후 역사적인 남북 정상회담을 위해 평양 순안 공항에 도착했다. 그때 나는 지금은 사라진 알래스카 순대라는 함경도 순대집을 촬영 중이었는데 식당 한켠 높다랗게 올려져 있던 작은 TV 화면을 통해 김대중 대통령이 비행기 트랩에 나와 감개무량하게 아래를 굽어 보는 장면부터 예상을 깨고 공항에 나온 김정일 위원장이 박수를 치던 순간까지 생생히 지켜 봤었지. 아마 그 순간은 2002년 월드컵 이탈리아전만큼이나 많은 사람들이 지켜봤고 기억하는 광경이리라 믿어.
그 순간을 장식했던 두 명의 남북 지도자가 모두 세상을 뜨고도 한참이 지난 지금 그날을 떠올리다가 문득 한 이름도 없고 두드러진 업적도 없는, 하지만 많은 것을 남기고 간 한 노인의 사랑 이야기가 떠올라서 옮겨 둔다. 어느 학교든 명물 하나씩은 있을 거다. 내가 나온 고등학교의 명물 가운데 하나는 ‘호수’(?)였어. 졸업앨범에도 ‘가야 호수’라고 등장하는 이 호수는 사실상 웅덩이였고 주요 용도는 밀대걸레 빠는 장소였지만 말이지. 네가 나온 고등학교나 중학교에도 명물은 있었겠지. 오랜 역사의 숙명여고에도 명물 하나가 있었다. 아니 계셨다. 개미아저씨라는 분이었지.
숙명여고의 전속 사진사였다고나 할까 2004년 돌아가실 때까지 근 50여년 간, 숙명여중고의 전속 사진사로 일해 오신 분이었어. 개미 아저씨는 그 별명이었고. 그 별명이 왜 붙었는지는 그 분을 만나 뵌 순간 알 수 있었지. 스칼릿 오하라 저리 가라 할 만큼 가는 허리에 개미 눈을 연상케 하는 큼직한 안경을 쓰시고, 겅중한 키에 긴 팔다리를 휘적이면서 걷는 모습은 영락없는 개미 아저씨였으니까. 개미 아저씨 별명도 수십년 묵은 거였지.
“동창회를 하면 가끔 그때 애(?)들이 와서 그래요. 개미 아저씨 나 할머니 됐다! 손자 봤다!” 아저씨의 얘기였어. 대충 얼마나 오래 계셨는지 짐작이 가겠지?
그분의 작업실은 학교 지하에 있었다. 그곳에 가면 수십 년 간 이 학교에 몸 담았다가 세상으로 나갔던 깻잎머리 여학생들의 사진 수천 수만 장이 수십 개의 박스에 뭉텅이로 담겨 있었어 학교에서 나오는 식대인가를 몽땅 필름값으로 쓰고 컵라면으로만 끼니를 때우기도 했다고 하니 수십 년간 얼마나 많은 필름이 들어갔겠어. 그 사진들은 그대로 하나의 역사였단다. 깻잎 머리에 검은 색 세라복에서 교복 자율화 시대, 다시 교복이 부활되고 그 교복이 몇 차례 바뀌는 수십 년 동안의 역사 말이야.
단정한 매무새에 네모 반듯한 판에 박힌 졸업사진, 기념사진도 엄청나게 많았지만 개미 아저씨는 파파라치 취향도 있었어. 즉 카메라 둘러메고 교내를 누비면서 고무줄 뛰기 넘는 아이들의 가쁜 숨에, 쉬는 시간 엎드려 침 흘리며 자는 학동들의 달콤함에, 자율학습 끝났다고 환호하며 뛰어오르는 토끼같은 점프질에 어김없이 카메라를 들이댔던 거야. 그의 촬영을 따라붙는 와중에 마주친 학생들이 담임 선생님 생일 파티 촬영해 달라고 부탁했을 때 개미 아저씨는 날아오를 듯 기뻐하셨지.
“요즘 애들은 웃음이 적어요. 낙엽 구르는 것만 봐도 웃는 게 요맘때라고 했는데, 옛날보다는 확실히 덜 웃어요. 그런데 이런 자리에선 애들이 잘 웃어. 난 그런 거 찍는 게 좋아.”
담임 선생님은 인기 절정의 총각 선생님이었다 . 교탁 위에는 초코파이와 온갖 과자들로 장식한 케이크가 얹혔고 선생님 오신다~ 하는 신호와 함께 교실 안은 행복한 아수라장으로 변했지. 합창과 환호와 웃음이 뒤범벅이 된 교실에서 아이들은 선생님 흉내를 내며, 노래를 부르며 치맛자락을 날렸다. 어떤 끼 있는 아이는 “비내리는 호남선”을 부르면서 흥을 돋웠고. 개미 아저씨는 그 큰 입을 함지박만하게 벌린 채 셔터 누르기에 여념이 없으셨어.
파티가 끝나고 아이들에게 개미 아저씨에게 하고픈 말을 해 보라고 카메라를 들이밀자 아이들은 벌떼같이 달려들더군. 졸업사진 찍어 달라, 아니 오래 오래 살아서 내 결혼 사진 찍어 달라, 심지어 내 아들 돌 사진을 찍어 달라는 녀석까지 있었는데 그 중 얌전하게 생긴 아이가 조금 쭈뼛쭈뼛하더니 분위기가 색다른 멘트를 하더군. “통일될 때까지 사셔서요, 꼭 북한의 가족들 만나세요.”
그러고보니 개미 아저씨의 말투는 억센 억양을 간직한 휴전선 이북의 말투였어. 가족은 모두 이북에 남아 있다고 했어. 스물 좀 넘어 혈혈단신으로 남하한 이후 새로운 가족을 꾸리지 않은 홀몸으로 숙명여중고의 사진사 개미 아저씨로서만 수십 년을 보냈다고 해. 수만 장의 ‘계집애들’의 사진을 간직하고 있는 그이지만, 당연하게도 가족 사진은 단 한 장도 없었지.
“아무도 없어요. 친척 하나 없고, 사돈의 팔촌도 없어요 남쪽에는…….”
한창 피어나는 사춘기 여학생들의 웃음을 들여다보면서, 누구나 누리는 일상의 기쁨, 가정의 행복을 맛보고 싶지 않았을까? 왜 결혼도 하지 않고 평생을 살았을까 싶어 왜 가정을 꾸리지 않았느냐고 물었을 때 개미 아저씨는 엄청나게 큰 유리알 너머의 눈을 빛내며 말했어.
“체면이 안선다 이거지.”
“체면이요? 웬 체면?”
“남의 집 귀한 딸 데리고 와서, 제대로 살아 보지도 못하고 내버려 두고 왔는데, 내가 새살림 차려 버리면 내 체면이 뭐가 돼요. 난 그렇게 못해요. 미안하다 그거지……”
그분은 총각이 아니라 유부남이었어. 하지만 평생을 홀아비로 살았지. 결혼한 지 1년도 채 안되었을 때 38선을 넘어 남으로 내려왔던 거야. 이미 그의 뇌리에 아내의 얼굴이 제대로 남아 있을지도 의문스러웠지만, 그리고 주름이 종횡으로 가로지른 그의 얼굴을 옛 신혼의 아내가 알아볼 수 있을지도 괜한 궁금이 일었지만, 그는 그 아내에게 미안해서 평생을 혼자 살았다고 해. 소녀 티를 벗어나지 못했을 신혼의 아내. 어쩌면 개미 아저씨는 학생들의 밝은 웃음과 갖가지 풍경을 카메라에 담으면서 그 아내를 떠올렸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더욱 저런 사람을 놔두고 온 내가 무슨 새장가를 가겠는가 자신의 발을 묶었던 게 아닐지.
내가 그분을 만났던 4년 뒤 2004년, 개미 아저씨는 세상을 떠나셨다고 들었어. 전하는 말에 따르면 그분이 학교를 1주일 동안 가까이 나오지 않으셨고 시험 기간 동안이라 그분에 대한 관심을 둘 새가 없었는데 시험이 끝난 뒤에야 개미 아저씨가 세상을 떠나셨음이 알려졌다고 해. 그분의 작업실에 그득하던 수십 년 동안 찍은 수천 장의 사진들은 지금 어디에 있을지 궁금하다. 개미 아저씨는 저승에 갈 때 그 사진들을 통째로 들고 가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내가 먼저 그곳에 있었다면 온 방에 펼쳐 놓고 얘는 당신 얼굴을 닮았었고 얘는 당신 목소리를 쏙 뺐고 이 녀석은 당신 행동거지하고 그대로였고…. 하면서 침을 튀기셨겠고 아직 오지 않았다면 50년간 생이별한 아내를 맞는 설레는 가슴으로 아내 대신 열정을 기울였던 사진들을 꼼꼼히 정리하고 있지 않았을까. 역시 아내에게 보여 주려는 마음으로.
젊어서 아내를 떠나야 했던 책임감으로, 50년 동안 꽃밭에 파묻혀 살면서도 아내의 향기를 잊지 않았던, 갈 수 없는 고향과 만날 수 없는 아내를 그리며 반세기를 지낸 개미 아저씨는 이미 돌아가신지 10년이다. 올해가 10주기가 되겠네. 거의 아무도 기억하지 못할 10주기이고 날짜가 언제인지도 모르겠지만 얼마 함께 하지도 못한 아내를 위해 50년을 수절한 한 남자의 명복을 빈다. 누구를 가슴에 담는 건 쉬운 일이지만 그걸 가슴 밖으로 드러내고 자신의 삶을 규정하는 일은 쉽지 않을 거야. 사랑은 움직이는 거라지만 때로는 움직이지 않는 사랑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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