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에 다니던 시절에는 도서관 입구에 있는 자판기를 애용했다. 당시에 나는 한 번에 붙고 말리라는 종교적 믿음이 가득했고 열람실에 1등으로 못 들어가면 무척 속상해하는 부류의 예비역이었다. 잠이 늘 부족한 편이었기 때문에, 다크서클을 달고 사는 편이었다. 그런 나에게 카페인은 몇 안 되는 건전한 취미생활이었다.
종류가 몇 가지 되었지만 나는 150원짜리 블랙커피를 주야장천 마셨다. 설탕 커피와 프리마가 들어간 밀크커피는 입에 단맛이 남았기 때문에 블랙커피에 정착하게 되었다. 맛이라고 해봐야 쓴맛밖에 없었지만, 피곤함을 몰아내기 위해서 매일 몇 잔의 커피를 뽑아먹던 시절이었다.
엉덩이로 공부를 하는 것으로 치면, 전국적인 순위에 들어갈 것으로 자부했었다. 그래서 초조해지면 안 되는데, 그런데도 불안감은 어느새 몸 한편에 달라붙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고독하게 다리를 떨어도 어떠한 지식도 스며들지 않은 날은 우울하기 그지없었다.
그런 날은 매점에서 담배와 라이터를 사고 커피 한잔을 또 내려서 밖으로 나가곤 했다. 도서관 앞에는 학교의 유구한 역사만큼 오래된 플라타너스 몇 그루가 줄을 지어서 있었다. 나무 그늘은 한여름에도 넓었고, 잎사귀가 흔드는 소리가 들려서 시원하게 느껴졌다. 겨울에는 굵은 기둥이 바람을 막아주는 느낌이었고 나뭇가지 사이로 마른 햇살이 들어왔으므로 비교적 따뜻했다. 그 아래에서 신성한 취미생활을 반복했다.
담배 연기를 한 모금 들이키면 다소 느슨해지는 느낌이 들었고, 블랙커피를 마시면 조여드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 리듬은 머릿속에 틈을 만들어 내는 듯했다. 거기에서 언덕 아래의 도시를 내려보면 사라졌던 자신감이 어느새 조금씩 생겨나곤 했다. 머리도 맑아지고 다시 열람실로 들어갈 작은 용기가 생겼다.
그렇게 카페인의 노예가 된 내가 처음 에스프레소를 마셨던 경험은 대학교 삼학년 무렵이었다. 당시 <커피 프린스 1호점>이라는 드라마가 대히트를 쳤었고 나도 그 드라마를 띄엄띄엄 보았으므로, 그 공간에 대한 로망이 있기는 했다. 하지만, 한잔에 몇천 원씩 하는 커피는 아무래도 아득한 사치처럼 느껴졌기 때문에 좀처럼 실행하기 어려운 소비였다. 그럼에도 나는 어느 날 운명처럼 제대로 된 커피를 만나게 된다.
당시 노량진은 물가가 무척 저렴하기로 유명한 곳이었다. 수능, 공무원 시험, 교원 임용시험의 학원이 즐비한 그 암울한 동네에도 전문 카페가 제법 들어서 있었다. 나는 1주일에 두 번 노량진에서 직강을 들었는데 듣는 날은 점심으로 컵밥, 핫바 등으로 때우는 날이 많았다. 그래서 아이러니하게 밥값이 조금 남기도 했었다. 그 돈으로 순두부찌개 가게 맞은 편에 있는 테이크 아웃 전문점에서 아메리카노보다 500원 싼 1,000원짜리 에스프레소를 처음으로 구매했다.
잔을 받았을 때, 어이가 없었다. 드라마에서 나오던 그런 여유를 느끼고 싶었는데, 양이 너무 적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것을 마시면서 제법 오묘한 경험을 했다. 블랙커피의 직선적인 쓴맛에 익숙해서 그럴까. 신맛 같은 것이 있었고 단맛도 느낄 수가 있었다. 아직 반도 태우지 않은 담배와 텅 빈 종이컵을 보면서 이것 봐라, 했던 기억이 있다.
작은 양에서 오는 허무함과 그만큼 밀도 있게 섭취되는 카페인을 통해서 다소 들뜨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 그 이후로 노량진에 갈 때마다 나는 그 가게 앞에서 구겨진 천 원짜리 한 장을 꺼내놓곤 했다. 그 이후로 십수 년이 지났지만, 나는 여전히 에스프레소를 주로 마신다.
커피에서 상큼한 맛이 나는 것에 대해서 불편해하는 손님이 제법 있다. 실제로 사람은 신맛을 제일 먼저 감지하는 편인데, 그것은 안전과 관련된 미각이기 때문이다. 빵에서 기대하지 않았던 신맛이 나거나, 어제 시킨 치킨에서 신맛이 난다는 것은 부패가 진행되고 있다는 증거다. 이처럼 사람은 본능적으로 신맛을 제일 처음 감지하고 예상하지 못했던 신맛은 다소 경계하는 경향이 있다.
그럼에도, 커피의 신맛(산미)은 제법 자연스러운 결과라는 사실을 기억했으면 좋겠다. 왜냐하면 커피의 원료인 생두는 과일의 씨앗이기 때문이다. 커피 체리의 과육을 제거한 것을 생두라고 부른다. 사과 씨앗을 씹으면 신맛이 나는 것처럼 생두도 그럴 수밖에 없는 출생의 배경이 있다.
물론, 원두 종류에 따라서 과육이 작고 품고 있는 신맛이 적은 경우도 있다. 자판기 커피의 원료가 되는 로부스타종의 경우가 그렇다. 또한, 아라비카종이라고 하더라도 볶음 정도가 강하면 그만큼 물리적 변화와 화학적 변화를 거듭하므로 신맛은 당연히 소멸하게 된다. 통상 로스팅을 대량으로 하는 경우는 가열된 원두를 식히는 과정이 어렵다. 왜냐하면 가열된 원두 하나하나가 열원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의도한 것보다 강하게 로스팅이 진행되는 경우가 많다. 우리가 잘 아는 스타벅스 커피가 스모크한 맛을 가지게 된 배경도 로스팅과 유통을 너무 크게 하기 때문이다.
커피의 신맛을 미워하지 않았으면 한다. 최근에는 새로운 가공방식이 등장해서 신맛의 층위를 더 다양하게 느낄 수도 있다. 원래는 에스메랄다 게이샤 같은 1kg 그램에 몇십 만 원 하는 생두에서만 그런 맛을 명확히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무산소 발효라는 과정이 새롭게 개발되었다. 농장의 자연조건 때문에 키울 수 있는 커피 품종이 제한된 상황에서 가공방식에 관한 연구가 이루어진 것이다.
무산소 발효는 쉽게 말해서 벗겨낸 과육을 버리지 않고, 발효 탱크에 넣어서 함께 숙성시키는 과정을 거치는 것이다. 다만, 호기성환경이 되면 부패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산소가 없는 혐기성 환경을 만들어서 과육의 향미를 생두에 스며들게 하는 공법이다. 녹차가 홍차가 되는 것과 비슷한 것이라 이해하면 좋지 싶다.
이렇게 만들어진 생두를 적절하게 볶는다면, 그리고 절차에 맞게 내린다면 우리가 알던 커피와 전혀 다른 맛의 커피가 완성된다. 그런 커피는 포도의 신선한 단맛을 느낄 수도 있고, 치즈 케이크의 고소한 발효 향이 난다.
쓴맛으로 커피를 배웠다. 단지 피곤을 이기려고 꾸역꾸역 카페인을 섭취하던 날도 있었다. 그러다 우연히 다른 맛도 있다는 것을 느꼈고, 그것 또한 자연스러운 결과라는 것을 배웠다.
도서관에서 커피를 처음 배웠던 시절에는 꿈도 꾸지 않았던 카페를 운영하고 있다. 그럼에도 의외의 맛이 있다. 삶이 꼭 쓰지만은 않다는 낡은 격언과 비슷한 결이다.
작성: 카페인사이드 정인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