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호남혐오표현이 문제인가?
호남혐오표현은 ‘…택배’ 등에서 최고조의 수위에 다다른 듯하다. 그런데 단순히 혐오의 정도가 심해서 사람들이 호남혐오표현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왜 그럴까?
두 가지 이유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 정치적으로 이용되고 있는 것에 대한 분노라는 주장이 있다. 즉 호남혐오표현은 보수층이 스스로를 결집시키고 중도층을 ‘진보적인’ 호남인들과 분열시키기 위한 도구로 이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둘째, 호남인들에 대한 실체적인 차별이 강력하고 만연하여 이 차별의 연장으로써 또는 이 차별의 원인으로써 호남혐오표현이 발생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선 ‘정치적인 이용’론에 대해 한마디. 미국에서도 인종차별과 관련하여 비슷한 담론이 있었다. 즉 보수정치세력이 ‘인종문제로 계급문제를 은폐한다’는 것이다. 복지제도의 수혜자들이 흑인(특히 흑인여성)이라는 편견을 확산시켜, 실제 대다수 빈민들은 백인임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복지제도는 자신들이 아니라 흑인들을 위한 것이라는 생각을 갖도록 만들어 결국 반-복지적 투표를 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담론은 이제 세월이 바뀌면서 무용론이 되어가고 있다. 특히 오바마의 당선으로 상징되는 흑인중산층의 약진은 더 이상 “빈민=흑인”이라는 편견을 불식시키고 있고 더 이상 이를 이용한 복지정책에 대한 공격은 유효하지 않게 되었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정치적 이용’론을 무효화시키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했는가? 재미있게도, 미국에서는 혐오표현규제가 없었다. 표현의 자유가 제약될 것으로 우려해서인데, 이와 달리 차별규제는 매우 강력하게 존재하고 집행되었다. 즉 한국에서는 민권법으로 번역되고 있는 Civil Rights Act는 차별금지법이었다.
실제로 1960년대에 만들어진 차별금지법은 고용, 공공서비스에 있어서 인종차별을 철폐하여 흑인들의 사회진출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나는 이 미국의 사례가 교훈을 충분히 준다고 생각한다. 물론 호남인들의 국내 지위는 흑인들의 미국내 지위와 비교도 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호남인들에 대한 차별이 없는 상황에서 호남혐오표현이 발생한다고 보기는 더욱 어렵다.
실제로 우리나라에서 지금 필요한 것은 차별금지법이다. 호남인에 대한 실체적인 차별을 확실히 금지하는 법도 없는데 차별적인 언사부터 금지하는 법을 만든다는 것은 순서가 뒤바뀐 것이다. 국가인권위원회법을 자세히 읽어보면 알겠지만 차별을 금지하는 법조항이 없다. 그냥 차별에 대해서 위원회가 권고를 할 수 있다는 조항만 있다.
위원회가 차별이라며 시정권고한 사안이라고 해서 민사소송을 통해 반드시 손해배상을 받을 수 있는지도 불분명하다. 이렇게 차별 자체가 불법화되지도 않았는데 차별을 부르는 언사를 처벌하겠다고 나서는 것은 법체계에 맞지 않다.
우선 차별이 불법임을 명시한 후에 그러한 불법을 부른다는 이유로 차별적인 언사도 규제할 수 있는 것이다. 지금 차별언사규제만 만들면 도리어 ‘합법적인 행동을 선동하는 말이 뭐가 어때서?’라는 분노만 살 수도 있다.
혐오표현규제의 원형
모든 증오와 멸시가 잘못된 것이 아니다. 자신의 행복과 안녕을 부당하게 앗아간 사람들에 대한 증오와 멸시의 표현은 도리어 건강하다.
증오는 하되 경멸적인 표현을 쓰지는 말라고? 1970년대에 미국에서 월남전 강제징용이 서슬시퍼럴 때 한 사람이 ‘Fuck the Draft’라고 새겨진 옷을 입고 다니자 경찰이 체포했다. 미연방대법원이 무죄판결을 내리면서 다음과 같이 판시했다. 첫째, 표현이라는 것은 정보도 전달하지만 감정도 전달한다. 둘째, 어떤 감정은 반드시 특정한 표현을 해야 전달된다. 셋째 그러므로 어떤 표현이 불쾌하다고 해서 쓰지 말라는 것은 그 감정을 표현하지 말라는 것이고 이는 사상통제이다.
그렇다, 극도의 증오는 극도의 표현을 필요로 한다. 물론 극도의 증오와 멸시를 행위로 발산해서는 안될 것이다. 하지만 증오와 멸시를 가지는 것, 자신의 동료들과 공유하는 것마저 처벌할 수는 없는 것이다. 모든 헌법에 ‘행위의 자유’는 없고 ‘표현의 자유’, ‘양심의 자유’만 있는 것도 이런 이유이다.
그렇다면 언제 증오와 멸시를 규제할 수 있는가? 언사가 물리적 행위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인과관계를 가질 때 비로소 그 물리적 행위에 대한 교사방조로서 처벌할 수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UN시민정치적권리규약 제20조가 혐오표현을 금지할 것을 당사국에게 요구하고 있는데 “모든 혐오표현”이 아니라 “(1) 인종, 국적, 종교에 따른 (2) 차별, 적대행위, 폭력의 선동”에 이르는 혐오주장만을 금지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인종, 국적, 종교를 사유로 인류가 수천년 동안 서로를 학살해 온 경험에 비추어 볼 때, 이를 사유로 하는 표현은 실제 행위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거나 그러한 행위가 일어나고 있다는 표지라고 보는 것이다.
그냥 혐오표현이 아니라 그런 ‘차별, 적대행위, 폭력의 선동’에 이르는 혐오표현만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는 점도 눈여겨봐야 한다. 이것이 ‘혐오표현규제’의 원형이다. 참고로 우리나라는 ‘혐오표현규제’를 제정하지 않음으로써 이 인권협약을 위반하고 있다.
모욕죄는 반인권적
물론 우리나라에는 모욕죄가 있지만 모욕죄는 너무 폭이 넓고 기본적으로 국가가 국민을 ‘모욕’으로부터 보호하겠다는 실현불가능한 목표로 해석 및 적용되고 있다. 자신의 주관적 기대에 걸맞는 평가를 얻지 못한 사람은 항상 모욕에 시달린다. 이성친구에게 차여도 “내가 뭐가 부족해서. . .”라고 씁쓸해한다. 시험 잘 봐서 A 받을 줄 알았는데 C를 받아도 모욕을 느낀다. 일반인에게 ‘서울시장이나 하라’라고 하면 칭찬이겠지만 대통령 출마할 사람에게 같은 말을 하면 모욕적이다.
결국 모욕죄는 주관적 자아가 높을 것으로 보이는 외관 즉 ‘사회적 지위’를 가진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기능하기 쉽다. 특히 우리나라는 모욕“죄” 즉 형사처벌의 형태로 존재하고 이에 따라 검찰이 개입하면서 더욱 공무원이나 권력에 기댈 수 있는 사람들의 무기가 되었다. 이렇다보니 ‘듣보잡’, ‘지는 만원이라도 냈나’ 정도에도 모욕죄 유죄판결이 나오면서 건강한 분노의 표현을 억제하고 있다. ‘
실제로 참여연대 공익법센터가 제기한 헌법소원에서 2013년도에 3인의 재판관이 위헌의견을 냈었다. 반서민적인 모욕죄는 폐지하고 약자를 보호하는 혐오표현규제를 만들어야 한다.
차별금지법으로서의 혐오표현규제: 표현의 자유와의 관계
혐오표현규제를 실체적인 차별을 발생시킬 위험이 있는 언사를 규제하는 형식으로 즉 차별금지법의 일환으로 제정하는 것은 표현의 자유와도 자연스럽게 화합한다. 표현의 자유는 명백하고 임박한 위험이 있다면 제약될 수 있음을 스스로 천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차별금지법의 일반적인 취지상 차별은 강자가 약자를 배제하는 것으로 규정되지만 그런 차별을 막기 위해 약자를 돕는 것까지 차별이라고 규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언어적 괴롭힘도 강자가 약자에 하는 것과 약자가 강자의 괴롭힘에 저항하기 위해 내뱉는 언사들은 똑같이 대우될 수 없다.
극단적인 예로 2차대전 중에 학살당하던 유럽의 유태인들이 ‘아리안족들, 전부 죽어버려’라고 했다고 해서 이를 괴롭힘으로 규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결국 강자가 약자에 대한 차별적인 언사를 하는 경우만 “언어적 괴롭힘”으로 규정될 것이다. 그리고 이는 다시 표현의 자유 원리에 부합한다. 강자의 약자에 대한 차별적 언사는 실제 차별행위로 전화될 가능성이 더욱 높을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강자와 약자를 솜씨 있게 규정하고 강자의 차별적 언사라고 할지라도 차별과 폭력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은지는 별도로 면밀히 심사를 하여야 할 것이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형사처벌을 두어서는 아니될 것이다. 형사처벌은 검찰이 기소를 통해 개시하게 되고 결국 검찰과 강자와의 관계 속에서 강자/약자 구분을 섬세하게 정의하여 성취하려던 약자보호의 이념이 희미해질 것이다.
우리나라에 이미 혐오표현규제가 하나 있긴 하다. 바로 장애인차별금지법 제32조 제3항 ‘누구든지 장애를 이유로 학교, 시설, 직장, 지역사회 등에서 장애인 또는 장애인 관련자에게 . . .모욕감을 주거나 비하를 유발하는 언어적 표현. . .을 하여서는 아니 된다’라는 조항이다. 이를 형사처벌하지는 않지만 그 법을 위반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다. 장애인이 우리 사회에서 겪어왔던 차별의 역사를 고려할 때 장애인에 대한 차별을 유발할 위험이 높은 표현만을 골라서 적용한다면 훌륭한 법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법을 지역차별을 포함한 더욱 여러 영역으로 확산시키면 되는데 그것이 바로 차별금지법이다. 최근 발의되고 있는 차별금지법 조문들을 보면 대부분 “언어적 괴롭힘”을 금지하는 조항들이 있고 이를 어기면 손해배상책임을 지운다. 결국 우리나라의 수많은 약자들에 대한 혐오표현규제를 만들고 싶다면 차별금지법을 통과시켜면 된다.
세월호 피해자 비하발언
자 그럼, ‘퉁퉁 불은 . . .’처럼 세월호 사태에서 보았던 사고피해자 비하발언은 어떻게 할 것인가? 차별금지 사유 중의 하나로 사망을 넣으면 어떨까? 망자는 반론을 제기할 수 없는 절대적 약자이니 약자보호의 차원에서 일리가 있다. 물론 죽은 자에 대한 비하발언을 규제하는 것이 아니라 죽었다는 사실 자체로 차별하는 언사들을 규제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잘 죽었다”는 말이다.
물론 이런 언사들이 망자들에 대한 차별로 이어질지 또는 최소한 이들의 죽음에 대한 경시로 이어질지는 검토가 필요하지만 이런 식의 망자차별금지 조항도 논리적인 난점이 있겠지만 최소한 합리적인 상상의 범위 안에 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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