섹스는 언제나 사회적이다.
사회학자 에바 일루즈는 『사랑은 왜 불안한가』에서 현대사회의 섹스란 무엇인지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러면서 섹스의 세 가지 기능에 대해 강조해서 말한다.
첫째로, 섹스는 ‘자아를 발견하고 깨닫고 실현해가는 마당’이다. 섹스란 단순히 생물학적인 본능과 쾌락의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자아’라는 지극히 정신적인 차원에서 핵심적인 위치에 있는 문제라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우리가 인생에서 거의 최초로, 어쩌면 가장 독립적으로 하는 결정이 ‘누구와 언제’ 섹스할 것인가이다. 학교나 진로, 사는 동네나 친구 등 여러 문제들에서 우리는 부모의 선택권 안에 움직인다. 그러나 누구와 ‘섹스하라’는 결정을 부모가 대신해주는 경우는 거의 없다. 오히려 우리가 누구와 섹스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순간, 그것은 부모에 대한 최초의 벗어남이자 비밀이 된다. 그래서 부모가 사실상 결코 개입할 수 없는 어떤 독립의 영역에 들어서는 것이다.
그밖에도 많은 소설이나 영화에서 ‘섹스’는 사랑의 절정으로 다루어진다. 한 사람의 평생에 걸친 상처나 트라우마, 치유와 관련되기도 한다. 옷을 벗고 몸을 섞는다는 것이 자기의 내면을 보여주고 그것이 받아들여지며, 서로의 가장 깊은 내면을 끌어안는다는 하나의 상징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서로가 서로를 가장 무방비인 상태로 내어놓음으로써 자기 자신이 안전하다는 공간적 상징을 확보하고, 스스로를 정의해나가는 순간에 ‘섹스’가 놓여 있다. 그래서 섹스란 생물학적이지 않고 사회학적이다.
두 번째로, 섹스의 결정적인 기능은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하게 소비를 요구함으로써’ 소비문화를 촉진한다는 점이다. 섹시하기를 원하는 사람, 즉 섹스어필을 하고자 하는 사람은 끝없이 돈을 써야 한다. 섹스를 하기 위해서는 섹시하게 보여야 하며, 그 과정에서 온갖 미용, 운동, 패션, 나아가 지적인 섹시함, 부의 과시, 호텔과 여행 등 천문학적인 소비가 일어난다. 인스타그램 등 최근의 SNS 경향은 더욱 이런 섹스어필에 치중하는 경향을 보이기도 한다. 자기 몸이나 능력을 과시하여 수많은 선택권을 확보하고자 하는 경쟁이 결코 적지 않은 시장을 형성하는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세 번째 차원인데, 그것은 현대적 섹스의 ‘계약관계’이다. 현대적인 만남에서 섹스는 완전히 자율적인 두 사람이 합의 하에 자유롭게 맺는 계약관계이다. 사회학자 엔서니 기든스가 ‘순수한 관계’라고도 지적하는 이 관계의 계약적이라는 특징은 자유로우면서도 동시에 불안하다는 점이다.
나는 상대에게 모든 걸 내어준다는 마음으로 섹스에 들어섰지만, 다음 날 상대는 더 이상 관계를 원하지 않을 수도 있다. 이 계약은 섹스를 하는 그 순간에만 맺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사실상 섹스는 관계마다 새로이 쓰는 계약서와 다르지 않다. 그렇기에 구속이 없고 자유로운 계약의 모습을 띄고 있는 섹스에는 필연적으로 ‘불안’이 동반된다.
그래서 이 ‘불안’을 어떻게 해소할 것인가가 사실 모든 ‘섹스 맺는 관계’의 핵심이기도 하다. 에바 일루즈는 현대의 로맨스 작품을 언급하면서, 이에 대한 현대 소설 혹은 영화의 가장 강렬한 해결책은 ‘낭만적 사랑’이라고 이야기한다. 많은 작품들이 섹스 맺는 관계의 불안을 ‘영원히 변치 않는 절대적이고 낭만적 사랑’으로 해결하려 한다는 것이다.
결국 과거보다 섹스가 자유로워진 시대이고, 섹스가 순수한 자율적인 영역에 들어섰다고는 하지만 최후에 그 자유를 견디지 못한 현대인들은 다시 과거와 같은 ‘영원불멸하는 감정’인 낭만적 사랑’으로부터 그 해결책을 찾으려 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에바 일루즈가 묘사한 사랑의 풍경은 우리 사회의 사랑과도 크게 다르지 않다. 연애란 근본적으로 불안하다. 연애가 깊어질수록, 사랑하는 사람과는 내 인생의 수많은 상처, 고민, 걱정, 꿈, 희망 등을 나누게 된다. 그러면서 나라는 존재에 대해 알아가고, 또 생활이나 삶의 많은 부분들에 대해 확신을 갖고 선택하게 된다. 사람에 따라서는 가장 많은 시간을 쓰며 추억을 쌓고, 그런 추억이 관계를 지탱해주는 힘이 될 거라 믿기도 한다.
또한 그 누구에게도 허락하지 않을 완전한 무방비 상태의 나체를 허락하며, 나의 몸이 ‘거절당할지도 모른다’는 위험을 감수한다. 하지만 아무리 추억을 쌓고, 아무리 자주 연락하고, 아무리 선물과 정성을 다하고, 아무리 자기의 모든 걸 내어주더라도, 이 ‘순수한 계약관계’는 다음 날 끝나버릴 수도 있다.
이런 불안감 때문에 결혼을 서두르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사회에서도 ‘결혼’이라는 제도는 그리 대단한 안전망은 못 된다. 무척 흔해진 이혼의 가장 일반적인 사유가 ‘성격 차이’라는 것만 봐도, 결혼이 얼마나 연약한 계약관계인지가 드러난다.
결국 에바 일루즈가 지적한 대로, 섹스의 불안 혹은 사랑의 불안에서 유일한 해결책은 ‘절대적이고 낭만적인 사랑’인 셈이다. 결국 우리는 사랑에 기댈 수밖에 없다. 그냥 상대가 마치 ‘신’처럼 나에 대한 절대적인 사랑을 변치 않고 지닌다고 믿을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는 것이다. 설령 그게 실제로는 다음 날 끝장나버릴 수도 있는 계약관계라 할지라도 그 안에 있는, 추상적이고 절대적인 사랑을 믿을 수밖에 없다.
물론 다른 선택지도 있다. 그런 불안을 끌어안고 싶지도 않고 그런 믿음에 자신을 내맡기지도 않으면, 사랑도 섹스도 하지 않으면 된다. 실제로 지극히 현대화된 어느 사회들, 가령 일본 사회에서만 하더라도 평생 사랑과 섹스를 하지 않는 사람들의 숫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우리 사회 또한 ‘사랑 혹은 섹스의 위험’을 더 이상 감수하지 않으려는 경향은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어쩌면 우리 시대의 사랑이란, 그렇기에 그 어느 시대보다 종교적이라는 생각도 든다. 믿거나, 믿지 않거나. 보이지 않는 신을 믿듯이 사랑을 믿고 사랑이라는 교회에 들어서거나, 그런 건 믿을 수 없으므로 사랑이라는 교회 밖으로 나가는 것이다. 그렇게 보면 섹스란 언제나 종교적이다. 섹스는 계약관계의 탈을 쓰고 있지만, 결국에는 ‘믿거나 말거나’를 요구한다.
현대적 사랑이 특히 어려운 이유가 있다면, 바로 이처럼 사회적이고도 종교적인 특징 때문일 것이다. 그저 자율적인 이성을 믿으면서 순수한 ‘계약’만을 맺을 수는 없다. 결국 ‘믿고 계약’해야 한다. 그런데 신과 거래를 하고 계약을 하기 시작하면 더 이상 진정한 믿음이라 볼 수 없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사랑의 문제에서 이 믿음과 계약이란 끊임없이 충돌할 수밖에 없기도 한 것이다.
결국 복잡한 사회학적 고찰을 거치더라도, 그 결론이랄 것은 ‘믿음’에 이른다는 점은 역설적이기도 하고 흥미로운 지점이다. 사랑하고자 하는 자는 어쩔 수 없이 믿어야 한다. 믿음 바깥에 있는 건 공허한 계약관계뿐이기 때문이다.
모든 게 계약이 되고 불안이 된 이 시대에는 도리어 더 강렬한 믿음이 요구된다. 불안하고 믿을 게 없는 이런 시대에야말로, 사랑하는 자는 더 한계를 넘듯이 믿음에 의지해야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