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꼬꼬마가 접했던 ‘정치경제학’의 무시무시한 정체
대학에 입학하고 처음 가입한 동아리는 ‘정치경제학회’였다. 갓 대학에 입학한 새내기들이 그렇듯 ‘정치경제학’을 알고 가입한 건 아니었다. 나를 비롯한 대부분의 동기들은 이렇게 생각했다.
정치학도 배우고 경제학도 배우는… 좋은 곳 아냐?
아니었다. 엄혹한 반공주의가 지배하던 시절 ‘정치경제학’은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을 일컫는 위장된 이름이었다. 물론 그 역시도 ‘정치경제학’에 대한 정확한 설명이라고는 할 수는 없다(정확히 말해 ‘정치경제학’은 아담 스미스에서 시작해 리카도 등으로 이어지는, 정치와 경제의 상관성에 주목한 학문적 경향을 이른다. 『자본론』은 ‘정치경제학 비판’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어쨌거나 내가 가입한 동아리는 ‘마르크스주의 정치경제학’을 공부하겠다고 만들어진 곳이었는데 그렇다고 새내기들에게 곧바로 『자본론』을 읽히지는 않았다. 우리는 일종의 ‘교양 과목’처럼 노동, 여성, 사회, 언론, 교육 분야에 대한 진보적 사회과학 도서를 읽고 공부했다.
2학년이 되어서야 “그래도 우리가 정치경제학회인데 정치경제학을 공부해야 하지 않을까?” 같은 생각을 하며 따로 공부 모임을 꾸렸다. 하지만 그때도 『자본론』을 읽지는 않았다. 우리에게 『자본론』은 히말라야 봉우리 같은 것이었고, 그래서 우리를 봉우리로 안내해 줄 ‘셰르파’ 같은 존재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문제는 지금과는 다르게 『자본론』 입문서가 많지 않았다는 것. 하지만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대표적인 책으로는 『자본론』을 번역한 서울대학교 김수행 교수가 쓴 『알기 쉬운 정치경제학』이 있었다. 그러나 제목과는 달리, 하나도 알기 쉽지 않았다.
왜 이런 제목을 붙였을까, 심각하게 고민하며 꾸역꾸역 그 책을 떼고 마침내 주홍빛 표지에 마르크스의 얼굴이 정면에 박혀 있는 비봉출판사 편 『자본론』을 영접했다. 지금 그 책을 다시 꺼내 보니 <제 1편 상품과 화폐> 편만 잔뜩 밑줄과 필기 내용이 적혀 있고 책장을 넘길수록 새 책처럼 깔끔하다. 문득 이 책과 비슷한 운명을 앞서 걸었던 책 한권이 생각난다. 수학의 정석. 그 책도 ‘집합’ 부분만 새까맣고 나머지 뒷부분은 『자본론』처럼 깔끔했다. 그 부분만 따로 떼어다 새 책으로 속여 팔아도 될 만큼.
대학에 입학한 이후 마르크스주의는 나날이 그 힘과 영향력을 상실해갔지만, 어찌 된 일인지 『자본론』에 대한 친절한 해설서는 꾸준히 출간되었다. 그건 현실 마르크스주의의 몰락과 무관하게, 『자본론』의 통찰이 여전히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를 이해하는 데 유효하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일정한 비율로 존재한다는 걸 의미하는 것일 테다.
실제로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 이후 미국에서 마르크스주의와 『자본론』 열풍이 불고 있다는 뉴스가 잊을 만하면 전해진다. 『자본론』이 예전에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선동하는 위험하고 불온한 책으로 여겨졌다면, 지금은 우리 시대 자본주의의 구조를 과학적으로 인식하는 데 도움을 주는 책으로 각광받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고전이 그렇듯 『자본론』 역시 선뜻 구매해 읽어 내려갈 마음이 생기지는 않는다. 그래도 요새는 꽤 괜찮은 『자본론』 입문서를 쉽게 접할 수 있다. 데이비드 하비가 쓴 『데이비드 하비의 <자본> 강의』(창비)와 현재 12권까지 나온 고병권의 ‘북클럽 자본 시리즈’(천년의 상상)는 그 대표적인 책들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두꺼운 벽돌을 연상시키는 데이비드 하비의 책과 12권이라는 볼륨에 먼저 압도당하는 고병권의 작업이 부담스러운 독자라면 시라이 사토시의 책 『삶의 무기가 되는 자본론』에서부터 시작해보는 건 어떨까.
이 책은 1977년생 젊은 사상가가 『자본론』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독자들을 위해 쓴 책이다.『자본론』의 전체적 얼개에 대한 총체적인 개괄도, 『자본론』의 다양한 세목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과 해설도 아니다. 이 책은 그런 ‘전문적인’ 논의를 기대하는 독자가 아니라 “『자본론』이라는 책이 있다는데 한 번 읽어나 볼까?” 같은 생각을 하는 독자들을 타깃으로 하고 있다.
재미도, 교양도 아닌 ‘살기 위해서’ 자본론이 필요한 시대
왜 어떤 책은 끝까지 읽고, 왜 어떤 책은 중도에서 포기하게 될까. ‘재미’ 때문이다. 재미있는 책은 끝까지 읽고 재미없는 책은 중간에서 관두게 된다. 더없이 간명해 보이지만, 그렇다고 ‘재미’가 뭔지 물으면 답하기 쉽지 않다.
『자본론』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입문서의 역할은 딱 봐도 딱딱하고 재미없어 보이는, 그래서 좀처럼 손에 잡을 것 같지 않은 책이 나름 얼마나 ‘재미’있는 것인지를 독자에게 설득하는 데 있다. 그렇다면 시라이 사토시가 우리에게 빠져들길 권하는 『자본론』의 재미와 매력은 무엇일까?
『자본론』이 대단한 것은 국제경제나 글로벌 자본주의의 발전 등 스케일이 큰 이야기를 다루는 동시에, 상사가 짜증을 내는 이유 같은 우리 생활과 밀접한 이야기도 빼놓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이 책은 사실 그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다는 점도 보여준다. 다시 말해 『자본론』은 사회를 내적으로 일관된 구조를 지닌 하나의 기구로 제시한다. 이것이 『자본론』의 뛰어난 점이다. (중략)
왜 매일 갑갑한 정장 차림으로 콩나물시루 같은 지하철을 타고 회사에 가야 할까? 『자본론』은 그 의문에 답을 제시한다. 『자본론』은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직면하는 부조리와 고통이 어떤 메커니즘을 통해 필연적인 것으로 자리 잡는지 분명하게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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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뛰어나고 매력적인 책이라면 읽지 않을 수 없다. 시라이 사토시는 『자본론』이 우리의 일상을 움직이지만 뚜렷하게 눈에 보이지는 않는 구조적인 힘의 핵심을 알려준다고 말한다. 우리가 구조의 핵심적인 힘을 알아야 하는 이유는, 단지 모르는 것을 알았을 때 생기는 어떤 지적인 쾌감 때문이 아니다.
그는 단도직입적으로 우리가 “생존하기 위해서” 그 앎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이 말은 언뜻 이상하게 들린다. 왜냐하면 『자본론』을 읽지 않고도, 자본주의의 구조적인 작동 원리에 대해 구체적으로 인식하지 않고도 우리는 삶을 살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말 그런 걸까? 어쩌면 오늘날 노동자들은 나날이 힘겨워지는 현실을 살아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죽어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실제로 많은 노동자들이 위험한 일터에서 목숨을 잃고 있으며, 육체적인 안전이 보장된 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조차 우울증을 비롯한 각종 심리적인 곤경에 빠지고 있다. 시라이 사토시는 우리의 생명과 안전을 위협하는 자본주의의 구조를 인식함으로써 거기서 벗어나거나 대들어서 구조를 바꿀 계기를 마련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이 책은 크게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상품에 대한 분석과 가치론에 대한 분석을 비롯해 『자본론』의 핵심적 내용을 알기 쉽게 풀이하는 것이 하나라면, 다른 하나는 이를 신자유주의 비판 및 계급투쟁을 통한 극복의 실천과 연결 짓는 것이다.
자본주의란 쉽게 말해 “상품에 의한 상품 생산”이 사회적 물질대사의 기본을 이루는 사회를 뜻한다. 알다시피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거의 모든 것이 상품화된다. 계곡에 흐르는 물은 상품이 아니지만, 그 물을 페트병에 담아 가격표를 붙이면 상품이 된다. 초등학생 때 수업이 끝나면 운동장으로 달려가 축구를 하던 행위는 전혀 상품과 무관했지만 어린이 축구단에 소속되어 전문강사의 지도를 받으며 공을 차는 행위는 상품이 된다.
신자유주의는 이렇듯 기존에는 상품으로 취급되지 않았던 영역조차 시장화해서 이윤추구의 대상으로 삼는다. 이는 단지 상품이 아니었던 것이 상품으로 탈바꿈한다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시라이 사토시가 데이비드 하비의 주장을 빌려 주장하는바, 신자유주의는 1%에 해당하는 극소수의 사람이 나머지 99%의 부를 강탈하는 거꾸로 된 계급투쟁이기 때문이다.
기계화와 자동화의 미래에 대한 분석도 눈여겨볼 부분이다. 얼마 전 롯데리아 키오스크 앞에서 망연자실한 노인의 이야기가 기사화된 적이 있다. 실제로 대형마트에도 무인계산기가 확산되고 있다. 사람이 아니라 로봇이 서빙하는 레스토랑도 선보인 바 있다.
이와 같은 자동화와 기계화는 인간의 수고를 덜어줌으로써 노동에 지친 인간의 삶을 윤택하게 만들어 줄 것 같지만, 현실은 꼭 그렇지 않다. 관련해 저자는 자본론의 다음 구절을 인용한다.
기계는 잉여가치를 생산하기 위한 수단이다.
즉, 기계는 인간의 노동이 아니라 자본의 잉여가치를 위한 것이기 때문에 기계를 도입한다 해도 인간의 노동시간은 결코 줄지 않는다는 것이다. 성능 좋은 컴퓨터와 스마트폰의 개발이 인간의 노동시간을 줄이기는커녕 퇴근한 후에도 노동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게 만들었다는 저자의 비판은 우리의 경험과도 부합한다.
시라이 사토시는 기계를 통한 혁신이 곧바로 추격자들에 의해 한계에 부딪히게 마련이라고 말한다. 이를 통해 혁신은 곧 무의미한 달리기처럼 그 안에서 인간을 소진시킨다. 이런 현상은 노동자뿐 아니라 자본가들도 늘 경험하는 것이다.
어쩌면 『자본론』은 노동자가 아니라 자본가가 읽었을 때 더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책인지도 모른다. 『자본론』을 통해 맑스가 분석하고자 하는 자본주의의 속성은 임노동자의 노동 경험은 물론이고 ‘자본의 인격적 화신’인 자본가들에게도 뼈저리게 와 닿는 면이 크기 때문이다. 노동자의 입장에서 더욱 무서운 건 『자본론』을 빨갱이 사상이라고 무시하는 무지한 자본가가 아니라 『자본론』을 열 번쯤 통독한 자본가인지도 모른다.
이미 우리의 삶 속에 ‘계급투쟁’이 들어온 이유
앞서 설명했듯 『삶의 무기가 되는 자본론』의 한 축은 계급투쟁을 통한 신자유주의 극복이라는 실천방안을 구성하는 데 있다. 이름만 들어도 무시무시한 ‘계급투쟁’을 지금, 우리가 어떻게 실행할 수 있을까?
하지만 너무 빨리 겁먹을 필요는 없다. 무엇보다 무시무시한 ‘계급투쟁’은 우리의 선택 이전에 이미 지금 이 순간에도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계급투쟁은 쉽게 말해 노동자와 자본가 사이에서, 혹은 못 가진 자와 가진 자 사이에서 벌어지는 게임이다. 이 게임은 완전한 제로섬은 아니지만 기술은 혁신하니까, 거의 제로섬에 가까워서, 이윤율은 경향적으로 저하하니까, 승패가 확연하게 나뉘어진다.
그런데 서구복지국가의 해체 이후 신자유주의 시대로 접어들면서 많이 가진 자와 덜 가진 사 사이의 간극, 즉 양극화가 심해지고 있다. 이는 한국의 경우만이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관찰되는 경향이다. 덜 가진 자와 노동하는 자에게 돌아가야 할 몫이 소수의 가진 자와 자본가들의 수중에 집중되는 오늘의 현실 속에서, 그 정당한 몫을 요구하는 것이 다름 아닌 ‘계급투쟁’이다.
시라이 사토시는 이 책에서 ‘능력’에 따른 분배가 아닌 ‘필요’에 의한 분배를 요구함으로써 새로운 ‘계급 투쟁’을 실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전 세계를 휩쓸고 있는 ‘능력주의’에 대한 비판과 맥락이 닿아 있다(‘능력주의’의 폐해를 강조한 대표적인 책으로는 마이클 센델의 『공정하다는 착각』이 있다). 저자에 따르면 “노동자로서의 가치를 놓이기 위해 능력을 갈고닦아야 한다는 인식”은 “노동력의 사용가치”를 높이는 일일 뿐 인간의 권리와는 무관하다.
만약 능력이 있는, 다시 말해 자본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높은 사용가치를 지닌 노동능력을 지닌’ 사람만이 제대로 살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동의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그런 사람은 단지 “신자유주의의 가치관에 젖어 생각까지 자본에 종속당한 상태”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능력’이 아니라 ‘필요’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만, 이는 결론에서 제시되는 하나의 방향일 뿐 그것을 실현할 구체적인 방략에 대해서는 말을 아끼고 있다.
물론 그것은 한 사람의 아이디어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닐 것이다. 이미 제시된 수많은 아이디어를 교차적으로 검증해가는 가운데에서 새로운 ‘계급투쟁’의 구체적 실천방안이 도출될 것이다. 특히 최근 ‘필요’의 측면을 강조하는 논의의 선두주자는 ‘기본소득론’이다. 그러나 ‘기본소득론’은 『자본론』과 맑스주의 정치경제학의 입론과 배치되는 것으로 자주 비판받는 이론이기도 하다.
이토록 이질적인 두 개의 체계가 ‘필요’에 의해서 실천이라는 새로운 지대 위에서 함께할 수 있을까? 그 고민 또한 이 책을 읽으며 맛볼 ‘지적 즐거움’ 중 큰 부분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