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 캐나다 온타리오주는 유급병가 정책 도입을 위한 법안을 발표했다. 유급병가 정책이 코로나19 유행에서 일하는 사람의 건강과 생계뿐 아니라 지역사회 전체를 보호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현재 발표된 정부안에 따르면 온타리오주 노동자들은 아프면 최대 3일, 하루 최대 200달러의 유급병가의 혜택을 받게 된다. 코로나 확진, 증상, 백신 접종 등이 유급병가 사유에 포함된다(관련 기사) .
코로나19 유행이 시작된 작년부터 의사협회, 간호사협회, 노동조합, 시민사회단체는 주 정부를 상대로 유급병가 정책 도입을 강력하게 요구해왔다. 보수당이 집권한 온타리오주 정부의 끈질긴 반대에도 중대한 정책 전환이 가능했던 이유이다.
연방정부 차원의 일시적 코로나19 소득 지원 정책(Canada Recovery Sickness Benefit, CRSB)이 존재하지만 접근성이 높지 않고 지원 규모가 작다는 점이 문제로 지적되어왔다. 그래서 온타리오 각계 전문가와 활동가들은 ‘아프면 쉴 수 있는 권리’가 코로나19 팬데믹 이후에도 살아남도록 제도 개혁을 위한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코로나19 팬데믹이 휩쓸고 간 한국에는 무엇이 남을까?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상병수당·질병유급병가가 모두 제도화되어 있지 않은 나라는 미국과 한국이 유일하다. 유급병가도 소수의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와 공무원만 혜택을 받는다. 사회적 보호를 받지 못하는 거대한 사각지대에 놓여있는 사람들은 상병이 발생해 일할 수 없게 되면 자신과 가족의 생계가 즉각적으로 위협받는 상황이다. 바이러스 감염보다 예상치 못한 건강충격(health shocks)이 발생시키는 고용 불안과 소득 손실이 더 큰 위협이 된다.
게다가 가구의 사회경제적 지위에 따라 건강충격이 고용에 미치는 영향은 차별적이다. 노동시장 지위가 낮은 가구의 생계부양자는 건강충격이 발생하면 기존 일자리에서 노동조건을 조정할 기회가 없기 때문에 불안정 일자리를 전전하며 빈곤의 덫에 빠질 위험이 높다. 반면 고학력, 고소득의 사회경제적 지위가 높은 사람이라면 노동시장에서 조기 은퇴하고 연금으로 건강을 돌보며 남은 여생을 살아갈 선택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건강충격이 고용에 미치는 영향은 배우자에게도 차별적으로 나타날 것이다.
오늘 소개할 논문은 국제학술지 《사회과학과 의학》 2021년 5월호에 게재된 「건강충격과 커플의 노동시장 참여(Health shocks and couples’ labor market participation)」로, 주로 남성이 생계부양자 역할을 하는 전통적인 가족 모델에서, 남성에게 발생한 건강충격이 커플의 노동시장 참여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한 것이다.
이 연구는 유럽의 노화·건강·은퇴 설문조사(Survey of Ageing, Health and Retirement in. Europe; SHARE)의 3차 자료(2008-2009년 수집)와 7차 자료(2017년)를 이용하여 남성의 건강충격에 따른 커플의 고용 형태의 변화를 분석하였다. 분석 대상은 유럽 29개국의 50세 이상 60세 미만 남성 중 이성의 동반자가 있고 심근경색, 뇌졸중, 암이 발생한 총 511명과 그의 동반자이다.
교육 수준이 상대적으로 높은 동반자가 소득이 높거나 가정 내 유일한 생계부양자일 가능성이 높다고 전제하고, 다음 세 가지 가설을 검증하였다.
- 남성이 여성보다 교육 수준이 높은 커플의 경우. 이때 남성은 건강충격이 발생해도 노동시장 참여를 지속하지만, 여성 동반자는 노동시장 참여를 유지하거나 늘릴 가능성이 낮다.
- 여성이 남성보다 교육 수준이 높은 커플의 경우. 이때 남성은 건강충격이 발생하면 노동시장 참여를 줄일 가능성이 높지만, 여성 동반자는 노동시장 참여를 유지하거나 늘릴 가능성이 높다.
- 남녀의 교육 수준이 동등한 저학력 커플과 고학력 커플의 건강충격 이후 노동시장 참여 비교. 저학력 커플이 고학력 커플에 비해 남성이 노동시장 참여를 줄이고 여성 동반자가 노동시장 참여를 유지하거나 늘릴 가능성이 높다. 노동시장 지위가 상대적으로 낮은 저학력 남성은 건강충격으로 노동시장에서 이탈하고, 이때 발생하는 소득 상실을 여성 동반자가 보충해야 하기 때문이다.
연구 결과, 학력이 다른 남녀 커플 모두에서 남성은 건강충격으로 조기 퇴직 가능성이 높아지지만, 여성은 동반자의 건강충격 이전의 고용상태를 그대로 유지하는 경향을 보였다. 건강충격을 겪은 남성은 노동시장 참여를 중단하지만, 여성 동반자가 노동시장 참여를 조정하기는 어렵다는 의미다.
동반자의 건강충격으로 발생한 소득 손실을 메꾸기 위해 노동시장 참여를 갑자기 늘리는 것도, 아픈 배우자를 돌보기 위해 노동시장 참여를 포기하는 것도 쉽지 않다. 가정주부로 한평생을 살아온 여성이라면 노동시장에 갑작스럽게 진입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어려운 일이다. 덧붙여 저자는 유럽국가의 사회안전망이 동반자의 상병으로 인한 소득 손실 효과를 어느 정도 완화하기에 여성이 고용 형태를 갑자기 조정해야 하는 부담을 줄였을 가능성이 있다고 설명한다.
학력이 다른 남녀 커플에서 주목할 만한 차이도 발견되었다. 자신보다 교육 수준이 높은 남성을 동반자로 둔 여성은 건강충격이 발생하면 동반자와 함께 은퇴를 선택하는 경우가 통계적으로 유의하게 높았다. 반면 여성이 비교적 고학력인 경우에는 남성은 은퇴를, 여성은 계속해서 전일제 노동을 선택하는 경우가 통계적으로 유의하게 높았다. 커플 내 경제적 불평등이 건강충격 이후 여성의 노동시장 참여를 결정하는 데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한편, 남녀의 교육 수준이 동등하게 낮은 저학력 커플의 경우 남성에게 건강충격이 발생했을 때 커플 모두 전일제로 계속 일할 가능성은 14.85% 감소한 반면, 남성이 은퇴하고 여성이 전일제로 계속 일할 가능성은 16.4% 증가했다. 저학력 남성의 낮은 노동시장 지위 때문에 건강충격에 대응해 일을 조정할 기회가 없기 때문에 노동시장에서 조기 퇴출당하고, 여성 동반자는 소득 손실을 메꾸기 위해 계속해서 일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남성 동반자의 건강충격으로 외벌이가 된 저소득 커플은 더욱 빈곤해지는 것이다.
반면에 고학력 커플의 경우 남성의 건강충격이 커플의 고용상태 변화에 유의미한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처럼 건강충격은 저학력, 고학력 커플 사이의 불평등을 악화시킨다.
코로나19 유행이 지속되지만 한국에서 ‘아프면 쉴 권리’에 대한 사회적 관심은 여전히 낮다. ‘백신휴가’와 같이 코로나19 유행만 넘기려는 근시안적 정책이 ‘아프면 쉴 권리’를 제도화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아프면 쉴 권리’가 감염병 방역의 강력한 수단인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코로나 이후에도 일하는 사람의 생계와 건강을 보장하는 사회안전망으로 기능하기 위해서는 수단을 넘어서 권리 그 자체로 논의되어야 한다.
아파도 일하는 것을 당연시해온 한국 사회를 비판적으로 성찰하고 국가 차원의 보편적인 상병수당 도입을 더 이상 늦춰서는 안 된다.
원문: 시민건강연구소
서지 정보
- Riekhoff, A.-J., & Vaalavuo, M. (2021). Health shocks and couples’ labor market participation: A turning point or stuck in the trajectory?, Social Science & Medicine, 276, 113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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