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아침부터 유튜브 알고리즘이 안내하는 동영상 하나를 들으며 출근했고, 중간 짬을 내서 인터넷 신문기사를 클릭했다. 또한 요즘 직장에서 진행하는 프로젝트가 계획단계여서, 대부분의 시간을 필요한 관련 자료들(다수가 논문)를 검색하고 선별해 정리하고 주장과 근거를 만들어나가는 일을 한다.
이렇게 종일 습관적으로 많은 정보를 무차별적으로 받아들이던 어느 날, 경종을 울리는 책 한 권을 만났고 이로 인해 많은 질문을 떠올렸다. 내가 보는 기사와 동영상, 자료들은 모두 믿을 만한가? 허위 정보나 잘못된 정보는 없을까? 우리 주변의 많은 정보 중 과연 진짜 믿을 만한 정보가 몇 퍼센트나 될까?
정보 과잉의 시대에 우리는 하루에도 많은 선택적 혹은 비선택적 정보들에 둘러싸여 살아간다. 하지만 수많은 정보들이 모두 신뢰할만하지는 않다. 오히려 대부분이 의도적으로 지어낸 또는 실수로 양산된 헛소리이자 잘못된 정보일 수 있다. 우리가 이런 거짓된 정보를 사실이라 믿었을 때 초래하는 결과는 꽤 심각할 수 있다.
내 프로젝트가 산으로 갈 수도 있고, 내 자산이 잘못된 투자로 새어나갈 수 있으며, 건강에 좋지 않은 습관과 식품을 섭취해 병을 오히려 키울 수 있고, 내 자녀를 잘못된 교육관으로 양육할 수도 있다. 내가 믿는 정보들이 정말 신뢰할만한지, 한번쯤은 의심해보고 점검해봐야 한다.
『똑똑하게 생존하기』의 저자 칼 벅스트롬과 제빈 웨스트는 우리 주변의 수많은 잘못된 정보들을 ‘헛소리’로 치부하며 ‘특정한 사안에 관해 사람들을 호도함으로써 우리 세계를 오염시키고 정보에 대한 신뢰를 무너뜨린다’고 했다. 또한 요즘의 헛소리들은 의심스러운 주장을 숫자, 그림, 통계, 데이터 그래픽으로 표현해 오히려 더 그럴듯하게 보이기 때문에 더욱 엄격하고 정확하게 보이지만 실상은 허상이다.
실제로 세상에는 우리의 판단력을 흐리는 그럴듯한 헛소리들이 난무한다. 이 세상에는 왜 이렇게 헛소리들이 많은 걸까? 헛소리를 알아보고 그 속에서 현명하게 살아갈 방법은 무엇일까? 헛소리를 분별하지 못하는 게 우리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과연 잘못된 정보가 모두 헛소리이며 도움이 전혀 안되는 것일까?
헛소리 정보의 실체: 오묘한 속임수
먼저 헛소리는 의도 자체를 따져봐야 한다. 만약 고의적으로 속여 자신의 이득을 취하고자 한다면, 즉 사실이 아닌 말을 해서 상대방이 잘못된 결론을 내리도록 의도적으로 유도해 사람들은 호도하고자 한다면, 이는 질 나쁜 헛소리일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의도적이지 않은 잘못된 정보들 또한 헛소리의 범주에 속하며 이 또한 사람들에게 알게 모르게 피해를 끼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인간이 언어를 사용하는 방식은 오해의 소지를 만들어낼 수 있는데, 문자 그대로의 뜻이 아닌 함의적 표현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나쁘지 않다’는 표현은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그 어디쯤의 애매모호함으로 듣는 사람이 가늠하기 힘든 화자의 심리상태를 상상하게끔 만든다. 헛소리는 이러한 문자적의미와 함의를 이용해 교묘하게 책임을 회피하기도 한다.
물론 함의적 표현을 포함하는 복잡한 언어의 체계가 인간의 지식과 체계의 발달에 중요한 역할을 해온 것은 사실이지만, 『똑똑하게 생존하기』의 저자들은 이러한 언어적 표현이 현대의 의사소통에 거짓과 속임수로서 오용될 수 있는 점을 경계한다. 상품을 팔고 이익을 내고자 하는 등의 특정한 목적이 있을 때 헛소리는 더욱 악용될 수 있다.
거짓말은 날아가고, 진실은 절뚝거리며 그 뒤를 따라간다.
- 조너선 스위프트
헛소리를 반박하는 데 필요한 에너지의 양은 그런 헛소리를 생산하는 데 필요한 에너지보다 몇십 배나 많다.
- 알베르토 브란돌리니의 브란돌리니의 법칙 중
헛소리를 양산하는 것은 쉽고, 빨리 퍼지며, 반면에 진실을 밝히려는 행위는 훨씬 어렵고, 더 설득력있는 논리적 타당성과 근거를 필요로한다. 따라서 한번 믿게된 헛소리를 되돌리기에는 몇 배 혹은 몇십 배의 노력이 필요하다. 사람들은 어찌나 남들에 대해 말하는 것을 좋아하는지, 사내에 어떤 남녀사원이 썸을 타는듯한 기류가 포착되거나 사회적으로 인지도 있는 사람들의 가십들은 마치 〈이웃집 토토로〉의 ‘숯 검댕이(まっくろくろすけ)’처럼 재빠르게 퍼져나간다.
소문은 사실일 수도 아닐 수도 있지만, 상대적으로 진실이 밝혀지거나 잊히는 건 오랜 시간이 걸린다. 또한 사람들은 자극적인 소문과 헛소리들에 주목하지만, 사실 소문의 진실여부에는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는다. 진실을 밝히는 힘든 과정들은 쏟은 에너지에 비해 그럴듯한 성과도 보장받지 못하기 때문에 대부분의 헛소리에 대한 진실은 저 너머에 고요히 잠들어 있는 경우가 많다.
기술과 인터넷이 발달하면서 취급되는 정보의 종류와 양, 공유방식, 검색방식이 완전히 달라졌다. 이제 원하는 어떤 정보라도 비교적 쉽게 얻을수 있게된 반면, 정보의 질과 신뢰성만큼은 장담할 수 없게 되었다. 이전에는 정제된 정보를 뉴스, 신문, 잡지, 책, 지상파 방송 등의 매스미디어가 엄선해 제공했던 반면, 오늘날에는 수많은 소셜미디어를 통해 누구나 정보를 만들어내고 공유한다. 그야말로 정보의 출처는 다양해지고 종류와 양도 많아져 ‘정보 취급의 진입장벽’이 낮아졌고, 그만큼 정보의 신뢰성 또한 하락했다.
정보 공유 비용이 급격히 떨어지면 우리가 이용할 수 있는 정보의 성격과 사람들이 정보와 상호작용하는 방법 모두가 바뀐다.
- 데 스트라타
새롭고 다양한 의사소통 수단이 발명된 덕에 그런 수단이 없었다면 의견을 청할 일이 없었을 많은 이들에게 목소리와 청중이 생겼다. 하지만 사실 이들이 공적인 문제에 보탤 수 있는 건 언어적 배설물 밖에 없다.
- 닐 포스트먼
최초의 금속활자를 만들어낸 구텐베르크의 인쇄혁명은 ‘문자언어의 민주화’라는 점에서 인류에 많은 부분에 이익을 가져다주었다. 하지만 오늘날의 자극적이고 광기 어린 대중매체, 기사, 오락적이고 무차별적 정보들은 정보의 신뢰를 오히려 떨어뜨린다. 따라서 이러한 시대에는 믿을만한 좋은 정보들을 선별하고 취사선택해 균형감 있게 얻는 개인의 능력을 필요로 한다. 그렇지 않으면 별로 중요하지 않고 편파적이며, 피상적인 정보들이 우리를 압도해 진실에서 멀어지게 하기 쉽다.
오보, 역정보, 가짜뉴스들
예전에는 출판 과정에 드는 비용과 활자로 인쇄된 출판물을 공유할 수 있는 방법이 제한적이었다. 하지만 인터넷은 전 세계적인 정보의 민주화를 선사해주었다. 인터넷은 정보의 생산, 공유, 소비의 방식을 바꿨다. 이는 우리의 생활방식과 사고방식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오늘날 정보의 접근은 쉽지만, 신뢰성 있는 정보를 얻기 어려운 이유가 뭘까?
나는 아직 서점 가는 것을 좋아하고 종이책을 선호하지만, 좋아하는 책을 방구석에서 언제든 인터넷으로 검색해서 구입할 수 있고, 전자책을 이용하기도 한다. 어렸을 때는 세상 돌아가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아버지의 말씀을 따라 아침마다 커다란 신문을 넘겨가며 헤드라인만 훝거나 저녁 TV의 KBS 9시뉴스를 기다려 시청하곤 했다. 요즘은 신문을 구독하지도 티비를 보지도 않지만, 손쉽게 언제든 인터넷 뉴스기사를 클릭한다.
세상은 이름 모를 낯선 이들의 목소리로 가득 차있다. 우리는 그들이 누군지도 모른다. 그들이 쓴 글이 우리가 상업적 매스컴에서 기대하는 정확성에 주의를 기울인 경우는 드물다.
- 칼 벅스트롬, 제빈 웨스트, 『똑똑하게 생존하기』 中
예전에 내가 접했던 신문과 TV 지상파 방송에서 방영하던 뉴스와 인터넷 뉴스는 헤드라인부터가 좀 다르다. 이는 인터넷 뉴스는 클릭수로 광고 수익을 얻는 이유가 강력하게 작용한다.
인터넷 뉴스나 정보들은 정확한 정보보다는 사람들을 사로잡을만한 자극적이고 호기심을 유발하는 헤드라인이 더 중요하다. 누구나 세밀하고 지루한 분석보다는 영양가는 없어도 재미있는 헤드라인을 클릭하게끔 하는 유혹에 넘어가기 쉽다. 이러한 ‘클릭 중심의 미디어’는 선정주의적이고 허위적이며 중요하지 않은 피상적 정보들을 자극적으로 양산하는데 익숙해져 왔다.
더 큰 문제는 인터넷의 알고리즘이 편파적이고 이념적인 생각에 고립되도록 하는데 한몫 한다는 점이다. 이전에 언론사의 당파적 성향을 띤 편향적 뉴스가 이념 분열을 심화했다면, 인터넷 알고리즘은 이를 악화시킨다. 알고리즘은 우리가 보고 싶고 관심 있어 하는 게시물과 기사를 제공해주어 다른 관점을 읽을 기회를 줄인다.
물론 원하는 관련 정보를 찾아주어 내 시간을 효율적으로 운용하게 해주는 장점도 있다. 하지만 소셜미디어의 알고리즘은 철저하게 소비자가 관심 있고 보고 싶어 하는 흥미진진한 콘텐츠를 제공해 플랫폼에서 꾸준하게 활동하도록 유도하기 위해 고안된 상업적 전략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함께 모여 있으면 그들의 사고방식이 돌고 돌면서 그들이 지지하는 신념과 믿음이 증폭되고 강화된다. 결국 이러한 반향실 효과에 갇힌 사람들은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게 되며 진실과는 유리된다. 이는 일종의 확증편향으로 작용해 SNS에서의 가짜뉴스가 영향력을 갖게 하거나 정치적 극단주의를 부를 수 있고, 경제시장에 패닉을 부른다. 확증편향은 균형감 있는 사고를 하지 못하게 해 성장과 발전의 가장 큰 적이 될 수 있다.
최근에 50대의 초등학교 교사이자 주부이신 집사님과 이야기를 나누던 중 요즘 들어 유튜브에 빠지셨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수업이 온라인 비대면으로 바뀌면서 평생 안 써보던 줌과 같은 프로그램을 사용하자니 어려움이 많아 유튜브 영상을 통해 배우면 쉽다는 말에 검색해서 활용해봤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유튜브에 관심 있는 약초 캐는 방법이나 산장 마을에서 살기 등을 검색했는데 자꾸 비슷한 영상이 추천되어 요즘 유튜브 시청 시간이 늘었다고 한다. 자기 주변의 50–60대 친구들 역시 부쩍 유튜브를 사용하는 빈도가 늘었다고 한다. 생각해보니 우리 아버지도 요즘은 뉴스와 건강 관련 정보를 듣고자 저녁마다 티비가 아닌 유튜브를 틀어 놓으신다.
이렇듯 소셜미디어는 이미 우리 생활 전반을 지배하고 있다. 대화를 나누던 50대 집사님이 최근 화장품을 하나 구입했는데, 관련 광고가 계속 떠서 ‘이 화장품이 정말 유명한가 보다’ 생각했는데 알고리즘의 관련 정보 추천 기능이 있다는 걸 이제 알았다고 한다. 소셜미디어의 알고리즘은 계속해서 무언가를 판매하고 소비하게끔 한다. 그 속의 정보들이 믿을만한지, 편파적인 정보들만 편향되게 보고 듣게 하지는 않는지 개인이 엄격히 판단해야 할 문제이다.
상관관계 vs. 인과관계
사회적 현상을 다루거나 과학적 분석 결과를 제시할 때 가장 많이 사용되는 것이 ‘인과관계’이다. 가령 A가 증가/감소하는 것이 B의 증가/감소에 영향을 미쳤다, A가 증가/감소 했기 때문에 B가 증가/감소했다’등의 관계성을 제시하는 것이다. 여기서 가장 착각하기 쉽고 속임수로 둔갑하기 쉬운 개념이 등장한다. 상관관계를 인과관계로 착각하는 것이다.
처음 상관관계와 인과관계를 배울 때 교수님께서 제시해주신 지문에 ‘어떤 시에 교회가 많을수록 성범죄가 증가한다’는 예시를 보았다. 우리는 곧장 교회와 성범죄의 연관성을 찾기 시작했다. ‘범죄가 많아져서 사죄하고자 교회가 많이 생긴 건 아닌가?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겉으로는 착한 척 위선적인 모습을 보이고 뒤에서 범죄를 저지르기 쉽다는 걸까?’
이는 물론 상관관계를 인과관계로 잘못 보고한 과학적 오류였다. 어떤 시에 교회가 많이 건축된 이유는 거주 인구가 많기 때문이었고, 이에 따라 범죄도 상대적으로 많이 일어난 것뿐이었다.
아래 그래프에서도 마찬가지로 자폐증이 증가하는 것과 유기농 식품 판매량은 서로의 원인과 결과를 제공하는 것이 아님에도 깊은 연관성이 있어 보인다. 더군다나 제시된 r값이 0.7이상이면 강한 양적 선형관계를 나타내므로 r=0.9971은 분명 어떤 강한 연관성을 보여주는 것 같다.
하지만 제3의 요인으로 인한 증가추세가 우연히 겹칠 수 있고, 상관관계는 인과관계가 아님을 분명하게 알 필요가 있다. 이러한 경우 통계적 보완법으로 유의미한 상관관계를 보이는 변수들이 정말 인과관계가 있는지 알아보기 위한 회귀분석 등을 시행한다. 하지만 회귀분석의 경우에도 제3의 교란변수(성별, 나이 등)에 따라 결과가 달라질 수 있음을 알고 다각도로 분석하고 맥락에 따라 결과를 바로 해석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
더불어 ‘데이터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라는 시각은 철저히 위험한 발상이다. 우리는 흔히 말은 주관적이고, 직감, 느낌, 표현성을 나타내는 반면, 숫자는 객관적이고, 정밀성, 과학적 접근법을 나타낸다고 믿는다. 하지만 숫자 또한 적절한 문맥에 배치되지 않거나 공정한 비교로 제시되지 않았을 때는 헛소리에 불과함을 인지해야 한다.
우리가 정말 경계해야 할 헛소리들은 말과 글뿐 아니라 데이터와 숫자도 포함된다. 이를 인지하는 것과 아닌 것의 차이는 보는 것의 정답과 오답을 가려내고 깊이와 시각을 달리할 수 있는 큰 차이를 불러온다. 시각화된 데이터의 단위, 수치, 맥락를 꼼꼼히 살펴보는 습관을 갖자.
우발적이든 고의적이든
과학의 훌륭한 점은 수정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한때는 절대적이라 믿었던 천동설도 지동설이 진실임이 밝혀지자 믿음이 무너졌고, 뉴턴의 모든 물체에 똑같은 지구의 끌어당기는 힘이 작용한다는 중력의 법칙도 아인슈타인의 특수 상대성이론으로 부정되었다. 모든 주장은 언제든지 이의 제기가 가능하고, 모든 사실이나 모델은 증거 앞에서 뒤집힐 수 있다는 것이 과학의 정설이다.
과학은 비교적 객관적 사실들의 주장과 근거를 기반으로 하기에 타당성 있고 논리적이라고 생각되지만, 이 또한 사람이 하는 일이라 얼마든지 실수와 오류가 개입될 수 있다. 또한 학문적 성과와 명성을 얻고자 하는 의도 혹은 어떤 악의적 목표를 갖은 연구자들에 의해 과학이 오용되는 경우도 있다. 이때 발표된 결과는 데이터를 조작해 실제와 다른 결과는 숨기고 원하는 결과만 부각하는 등의 오묘한 속임수이다.
또한 정확함과 공정함이 기본인 과학자들이 데이터 핸들링이나 통계적 분석 과정에서의 크고 작은 실수를 ‘괜찮겠지’ 하며 눈감아 넘어가기도 한다. 이런 경우에서 과학도 더 이상 과학이 아니며 하나의 헛소리가 될 수 있다.
과학자들은 또한 탐구를 업으로 삼은 사람이기에 과학적 호기심과 지식의 진정한 목적만 추구할 수는 없다. 즉 과학을 업으로 삼은 만큼 과학을 통해 실리를 추구하는 면도 있게 마련이다. 연구를 하기 위해서는 과제를 따서 지원비를 획득해야만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실적이 필요하고, 실적을 위해서는 저명한 저널들에 논문을 게재하는 것이 필요하다.
또한 실적은 꼬리표처럼 따라다니며 그 사람의 능력과 진행하는 연구의 가치를 대변한다. 과학자들은 사람들의 인정과 평가를 받을 수 있으므로 어떻게든 저명한 저널에 논문을 게재하고자 노력한다. 따라서 저명한 저널에서 선호하는 주제로 연구를 하거나, 사실이 아닌 연구결과(예를 들어 유의한 결과가 아님에도 데이터를 조작해 유의한 결과로 속이는 행위)로 저널과 사람들을 교묘하게 속이기도 하는 비양심적인 연구자도 있기 마련이다.
저널지는 구독료를 내는 사람뿐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논문을 무료로 다운받을 수 있는 ‘오픈 액세스(OPEN ACCESS)’라는 옵션을 두어 저자들에게 돈을 받고 약간은 쉽게 논문을 실어주기도 한다. 『똑똑하게 생존하기』의 저자는 오픈 액세스를 돈만 주면 출판을 허용하는 저널지에서 쓰는 옵션이라 비하했지만, 괜찮은 저널에서도 저자들의 논문게재가 승인된 후에 이 옵션을 선택하게끔 하기도 한다.
오픈 액세스는 구독료를 내지 않은 사람들이 논문을 다운받아 볼 수 있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내 논문을 보고 인용도 많이 될 거라는 기대로 재정적인 지원만 뒷받침된다면 연구자들이 선호하는 옵션이기도 하다. 물론 실제로 상위권의 저명한 저널들은 이런 옵션이 없기도 하다. 힘들게 과제를 따서 많은 돈을 들여 연구하고 쉽지 않은 과정과 시간을 들여 얻은 소중한 연구결과를 좋은 저널에 싣고 많은 사람이 봐주었음 하는 연구자의 마음은 당연한 것일 수 있다.
하지만 출판시장과 다르게 연구자들의 많은 기회비용과 에너지를 갈아 넣은 논문을 게재하는 데 또 비용이 들어가고(의학저널 분야에서 논문 게재료는 대략 200–500만 원), 논문이 아무리 유명해져도 저자에게 남는 게 어떤 경제적 보상이 아닌 논문 인용지수뿐인 건 상당히 안타까운 현실이다. 거짓 결과를 편법으로 쉽게 게재하려는 연구자와 말도 안 되는 게재료를 청구하는 악덕 저널지만 제외하면, 오픈 액세스는 저널지와 연구자에게 유용한 옵션이다.
측정치가 목적이 되면 올바른 측정은 불가능하다.
- 이릴린 스트래선, 『굿하트의 법칙』
연구자는 기본적인 투명한 양심과 성실한 소양을 지니고 이 세상을 발전시키는 데 학문적 탐구로써 이바지한다는 직업적 소명감과 자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다행스럽게도 나와 함께 일하는 연구 책임자는 기본적인 소양이 상당히 양심적이고 성실하신 편이다. 연구결과에 대한 실수나 오류가 발견되면 바로잡고자 하고 속임수나 허위로 결과를 발표하는 법이 없다. 대신 호기심이 아주 출중하셔서 데이터를 다각도로 접근하고 분석해 해석하는 것에 도가 텄다.
연구원 초기 시절부터 이 분에게 일을 배우며 연구자로서의 자질과 호기심을 물려받아, 다각도로 접근하고 더 깊게 파고들고 한 가지 현상에 여러가지 질문을 던지며, 무엇보다 양심적이고 투명하게 데이터를 다루고자 하는 마음가짐을 배웠다. 다른 논문이나 특허를 쓰는 기술이나 성과보다 더 큰 자산을 물려받은 것에 감사함을 느낀다.
사실 이 책을 읽으며 가슴이 뜨끔했던 적이 몇 번 있다. 아무래도 좋은 결과를 내야 좋은 실적으로 이어진다는 생각에 피험자를 질적으로 평가하는 평가지에 실험군에게 좀 더 좋은 점수를 주었던 경험이 떠오르기도 했다. 이번을 계기로 헛소리와 비양심적 논쟁 위에 과학의 오용이라는 겉치레를 덧씌우는 부끄러운 연구자가 되지 않겠다고 다시 한번 다짐해본다.
헛소리 판별 능력
한 사람이 살아가며 얼마나 잘못된 헛소리들을 접하게 될까? 세상에 완벽하고 절대적인 것이 없듯, 주변에 쉽게 보이는 많은 정보들이 모두 완전할 수 없고 비딱할 수도 있다. 헛소리의 정체가 사람을 호도하려는 나쁜 의도를 지녔다면 말살해버려야 함이 마땅하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대는 특히나 의도적으로 실질적 피해를 끼치는 헛소리들이 난무하는 시스템들로 가득하며, 이는 우리의 삶이 잘못된 방향으로 흘러가도록 유도하고, 가치관과 살아가는 방식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경계해야 한다. 좋은 소식은, 그렇기에 정보 과잉의 시대에 정보를 현명하게 활용할 수 있는 능력은 빛을 발한다. 우리에게 수준 있고 정제된 정보들을 선별해 다룰 수 있는 지혜가 있다면 이 시대는 그야말로 천국이다.
또한 세상 모든 것에 정답이 없듯 어떤 현상에 대한 옳고 그름을 따지는 이분법적 발상 자체가 어쩌면 불가능할지 모른다. 지금 헛소리였던 것이 진실이 될 수도 있고 그 반대가 될 수도 있게 마련이다. 객관성과 정확성을 추구하는 과학분야에서도 계속해서 실수를 개선하고 수정하고 또 발전한다. 따라서 우리의 삶은 계속해서 더 나은 방향으로 내딛는 발걸음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그런 여정에서 언제라도 의도적이거나 비의도적으로 잘못된 정보들을 받아들일 수 있고, 또한 전달하는 입장에 처할 것이다. 이때마다 좀 더 넓은 시야와 비판적이고 균형 잡힌 사고를 통해 정보를 판별하고 분석하는 습관을 장착하자. 이를 통해 우리는 한 단계 더 도약할 수 있는 내공과 힘을 기를 수 있다. 명심하고 습관화하자. 앞으로 이 시대에 필수적인 ‘헛소리 판별능력’은 우리의 ‘찐내공’으로 자리 잡을 것이다.
원문: Dandelion의 브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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