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홀로 덴마크 ‘오덴세’로 여행을 떠났던 적이 있었다. ‘오덴세’는 안데르센의 도시라는 것 외에 아는 정보도 없고 혼자 떠나 심심하기도 해서 ‘에어비앤비’ 플랫폼을 통해 어떤 할머니네 집에 숙박하게 되었다. 할머니는 아시아에서 건너온 나를 진심으로 대해주셨고 우리는 매일 저녁을 함께하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도서관 사서로 근무하시는 할머니는 본인이 일하는 도서관에 나를 데려가 모두에게 소개해주었다. 덕분에 덴마크 ‘오덴세 도서관’이 어떠한 프로그램으로 운영되는지, 어떤 책이 가장 인기가 많은지 알 수 있었다. ‘도서관에 디자인적 요소를 접목하면 이렇게 훌륭한 공간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구나!’라는 걸 사서 할머니를 통해 배웠다.
동그랗고 커다란 조명 아래 편안한 의자에 걸터앉아 예쁜 책을 둘러보는 시간이 편안해 어느 순간부터는 할머니와 같이 출근을 하게 되었다. 서로 같이 출근을 하며 차 안에서 ‘도서관 업무는 만족스러운지’라는 면접용 질문부터 시작해서 ‘덴마크는 세금을 많이 내서 짜증 난다’까지 수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당시 나의 여행 키워드는 ‘덴마크의 디자인’이었다. 북유럽 디자인은 한국에서도 꽤 선풍적인 유행을 끌고 있어 한때 예술의 전당에서는 ‘덴마크 디자인’이라는 이름의 전시까지 열릴 정도였다. 깔끔하면서 질리지 않은 북유럽 스타일의 디자인에 매료되어 여행을 간다면 어떻게 이런 발상을 할 수 있었는지 그 배경을 찾아보고 싶었다.
물론 책에서, 박물관에서 듣고 배울 수 있는 지식들은 유용했다. 일본인들의 디자인 철학에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도 몰랐던 내용이었고 특정 디자인에 국한되는 게 아니라 가구나 조명 등 생활 전반에 걸쳐 디자인 요소가 적용되고 있다는 사례도 책을 통해 충분히 살펴볼 수 있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덴마크 사람들이 디자인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 수 있었던 건 박제된 지식보단 덴마크 사람들의 ‘말 한마디’였다.
우리에겐 일상이 디자인이야. 이렇게 친구와 요구르트를 먹는 순간도 아름다워야 해. 그러니 촛불을 켜자고!
할머니는 ‘디자인’이라는 화두를 꺼내자 그저 웃으면서 일상생활을 보여주셨다. ‘왜 디자인이 뛰어날 수밖에 없는지’ 직접 컵에 커피를 따라 주시면서 10년 동안 이 컵을 사용했지만 질리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하셨다. 그저 예쁘기만 한 건 덴마크 디자인이 아니라며 이유 있는 철학이 오랫동안 변치 않는 아름다움을 만든다고 할머니의 생각을 담담하게 말씀하셨다.
오랫동안 지속 가능한 디자인에 대해 생각해보며 집에 있는 가구를 살펴보니 화려하지 않지만 기능에 충실하면서 균형이 잡혀있어 질리지 않는 매력이 느껴진다. 심지어 가위, 의자, 촛등, 야구르트 패키지마저도 담백하면서 기능에 충실한 멋이 느껴진다.
할머니의 말 한마디는 그 어떤 지식보다 강력했고 오랫동안 인상에 남았다. 현재를 느끼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그 자체로도 의미 있고 소중하다. 그런 의미에서 시중에 나와 있는 제품이나 서비스를 기획할 때 관련된 무언가를 경험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특히 중요하게 들을 필요가 있다. 그들의 이야기는 책에 적힌 내용보다 훨씬 사실적이고 시의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획을 할 땐 반드시 사람들을 직접 만나 인터뷰를 한다. 시중에 나와 있는 제품과 서비스에 무엇을 필요로 하고 불편해하는지 직접 경험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의미를 생각한다. 말과 행동은 적혀진 글보단 정제되지 않은 데이터라 진짜배기 속마음을 제대로 확인할 수 있다. 글과 사진, 영상은 잘 차려진 양복이라면 두 얼굴을 마주 보고 하는 대화는 편안한 츄리닝이다. 자유롭게 내가 원하는 질문을 하고 진짜배기 속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인터뷰가 필요하다고 하지만, 항상 사람들의 숨겨진 속마음을 엿볼 수 있는 건 아니다. 대화하는 나 자신의 마음을 해제하고 진솔한 마음이 전달되었을 때 비로소 상대방의 생각을 전해 들을 수 있다. 상대방에게 거리를 두고 나올 수 있는 이야기는 한정적이다. 책에서 수집할 수 있을 정도의 대화가 오간다면 굳이 시간을 들여 인터뷰하는 의미가 사라진다. 그러니 상황에 따라 나의 생각을 먼저 드러내고 관심을 보일 필요가 있다.
이렇게 인터뷰를 할 때마다 어떻게 인터뷰를 하고 대화를 하냐에 따라 문제의 접근이나 서비스의 해결방식이 달라질 수 있는 문제이기에 여행 중 대화를 할 때마다 내가 갖추어야 할 ‘태도’에 대한 고민을 늘 하게 된다. 만나는 사람이 나이가 적든 많든 직업이 무엇이든 상관없이 내가 정한 키워드를 경험하고 조금이라도 아는 부분이 있다면 누구라도 생각을 들어볼 수 있다는 태도로 시작을 해본다. 아무것도 모를 것이라고 선을 긋도 시작하지 않고 일단 상대방에게 화두를 던져보는 식으로 대화를 이어가는 식이다.
예를 들어 ‘힐링’이라는 트렌드에 대해 기획 거리를 찾을 땐 라오스 찜질방에 앉아서도 이야기를 나누었다. 방비엥의 한 찜질방에선 남녀노소 다 같이 약초 찜질방에 들어가 머리에 흰 수건을 두르고 화장기 없이 땀을 줄줄 흘리며 앉아 땀을 빼고 있었다. 이 상태에서 ‘힐링 문화’에 대한 철학적인 이야기를 나눌 순 없었지만 어떻게 휴식을 취하는지는 간접적으로 대화를 나눠볼 기회였다.
사적인 장소에 옷도 제대로 갖춰 입지 않고 대화를 이어 나가기가 어렵다고 생각하면 한도 끝도 없이 어렵지만, 가볍게 생각을 들어본다고 생각하면 여행 중에도 얼마든지 인터뷰를 할 수 있다. 사실 대화를 이어가는데 장소와 격식은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닌 셈이다. 다른 사람의 솔직한 생각을 듣기 위해선 그보다 ‘나를 얼마만큼 오픈할 수 있을까.’가 더 중요한 문제가 아닐까 생각한다.
꼭 사교적인 사람만이 인터뷰를 잘하는 것은 아니다
가끔 기획 거리를 찾기 위해 인터뷰나 사람들의 생각을 들어보는 영역을 사교적인 영역으로 바라볼 때가 있다. 하지만 사교성이 좋고 외향적인 것과 ‘기획을 할 만한 대화를 끌어내는 것’은 서로 연관될 수도 있지만 꼭 사교적이어야 대화를 끌어내는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는 내성적이고 혼자 생각하는 시간이 무척 많은 편이다. 수많은 사람들의 인스타그램에 좋아요를 누르기보단 소수의 사람과 얼굴을 보며 이따금 이야기를 나누는 유형의 사람이다. 사교성과는 거리가 멀지만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를 할 땐 진심을 다하려고 노력한다. 상대방에 빙의해 어떤 생각을 할지 곰곰히 곱씹어보는 시간이 꽤 긴 편이다. 누구를 만나든 ‘사람은 누구에게나 놀랄만한 무언가가 있다.’는 관점으로 접근해 말 한마디를 생각하고 기억하며 되새김을 하며 키워드를 붙잡는 편이다.
내가 조금만 더 사교적인 사람이었다면 그 사람이 듣고 싶어 하는 말만 골라서 할 텐데 ‘기획하는 사람’으로서 대화하다 보니 여행을 하면서도 내가 생각하는 기획 거리에 대한 타인의 생각을 물어보는 형태이다. 사람과 친해지려는 과정이 아니라 깊은 생각을 마주하려는 과정인 셈이다. 그러니 인터뷰, 기획을 위한 대화의 영역은 사교의 영역이라 생각하고 선을 그을 필요가 없다. 여행 중 언제 어디서나 사람의 생각을 수집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많은 생각을 들어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자주 사용하는 제품이나 서비스에는 차별화된 부가가치가 존재한다. 이런 부가가치는 가격이 될 수도 있고 심미적인 부분이 될 수도 있다. 그게 무엇이 되었든 단 한 가지라도 사람들이 가장 필요로 하는 영역을 찾아 사용하는 사람들을 기쁘게 만들 수 있다면 기획하는 제품과 서비스는 가치 있다고 생각한다. 가장 필요로 하는 영역을 찾기 위해 기꺼이 기획자는 마음을 무장해제하고 무슨 이야기든 나눌 수 있다는 생각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
상대방이 나를 싫어하고 불쾌하게 생각해도 상관없다. 나는 어디까지나 기획자이고 관찰자일 뿐이니 그 사람과의 거리는 딱 그 정도일 뿐이다. 여행까지 가서 굳이 불필요한 아첨을 할 필요도 없지만 부정적인 이야기를 나누느냐 시간을 소비할 필요도 없다. 그저 내 기획에 대한 목적과 방향성만 갖고 타인의 의견을 들어보는 것이다. 내가 기획하려는 제품과 서비스의 차별화에 중심을 두고 오늘도 차분히 사람들의 생각을 대화로써 수집해 나간다.
원문: 여행하는 기획자의 브런치
함께 보면 좋은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