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이름 뒤에는 항상 회계사라는 수식어가 붙습니다. 수식어를 안 붙이면 오해를 살 만한(?) 이름이기도 하고, 10년 가까이 회계사의 업을 하며 살아왔으니 그럴 수 있겠지요. 그러다 보니 회계의 눈으로 세상을 보게 되었고, ‘회계는 생각보다 어렵지 않고 상식적이다’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제가 회계사이기 때문에 해당하는 이야기라는 점도 이해합니다.
부끄러운 이야기이지만… 저는 회계 수험계의 돌연변이 중에 하나입니다. 약 1년의 공부로 회계사 시험에 합격했기 때문입니다(일반적으로는 3~5년 정도 필요합니다). 회계사 시험에서는 다양한 과목을 넓고 깊게 학습해야 합니다. 다른 것들은 다 제 적성에 맞았는데, 유독 ‘회계’ 과목만은 제게 계속 낯설었습니다. 보통 1차 시험이 2월 말인데, 1월 초 모의고사에서 40점이 나왔을 정도입니다(60점이 합격선).
근데 어떻게 시험에 합격했냐구요? 모의고사를 보고 1차 시험까지 남은 시간의 대부분을 재무회계를 공부하는 데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근데 그것만으로는 설명이 조금 부족하죠. 그렇게 한다고 단숨에 회계점수가 올라간다는 보장도 없고, 그사이에 다른 과목을 망쳐버릴 위험이 있으니까요. 아래에서 그 이야기를 조금 더 자세히 하겠습니다.
나무 vs 숲을 보는 눈
일반적으로 사람은 두 가지의 눈 중에 하나를 타고난다고 생각합니다. 풍경을 볼 때 나무를 잘 보는 사람이 있고, 숲을 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나무를 잘 보는 사람은 섬세하게 일을 처리하는데 능하고, 숲을 잘 보는 사람은 큰 흐름을 파악하고 일의 줄기를 잡아나가는 일에 능합니다.
이는 주로 타고 나거나, 환경적 영향으로 어린 시절에 결정되기 때문에 커서 바꾸기는 쉽지 않습니다. 어떤 것이 더 우월하다고도 할 수 없기 때문에 자신에게 맞게 사는 것이 최고입니다. 다만 제가 경험한 회계사 시험에서는 ‘숲을 보는 눈’이 상대적으로 유리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중에서도 극단적으로 ‘숲형 인간’이었습니다.
제가 회계를 어려워했던 이유는 아마도 너무 방대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수험서가 그렇게 생겼어요. 1. 재고자산. 2. 유형자산. 3. 금융자산 등등 각 계정과목에 대한 이야기가 엄청 방대하게 구성되어 있습니다. 하루에 두 챕터 이상 보기가 힘들어요.
어찌저찌 1~2회독 정도를 진행했지만, 누군가 “회계가 뭐냐?”라고 물어보면 선뜻 대답할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즉, 머릿속에 체계가 안 잡히다 보니 지식의 휘발성이 너무 강했습니다. 저는 ‘숲형 인간’이라 자세히 보지 않았고, 덕분에 돌아서면 까먹는 일이 다반사였습니다. 그래서 40점을 벗어나기 힘들었습니다.
빠르게, 더 빠르게, 더더 빠르게
그래서 선택한 공부방법은 바로 빠른 회전이었습니다. ‘숲형 인간’의 장점을 활용한 것이죠. 숲형 인간은 속도가 장점입니다. 길을 가다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지 않습니다. 눈앞에 돌부리가 보이면 ‘피해가면 그만이다, 일단 끝까지 갔다가 나중에 돌아와서 치우지 뭐’ 하고 지나칩니다. 반면 제가 봤던 나무형 인간은 ‘저 돌부리에서 문제가 나올 텐데… 저거 틀리면 안 되는데…’ 라며 몇 시간이고 부여잡고 씨름하더군요.
저는 매일 도전적이지만 현실적인 목표를 설정하고, 빠르게 페이지를 넘기기 시작했습니다. ‘밑줄 친 부분만 조금 자세히 읽고, 나머지 부분은 속독으로 끝내겠어’ 하고 팍팍 넘어갔습니다. 연습문제는 틀렸다고 체크한 문제만 풀고, 나머지는 눈으로만 쓱쓱 보고 넘어갑니다. 그렇게 한 바퀴를 돌고 나면 2배 빠른 속도로 다음 한 바퀴를 진행합니다. 속도가 점점 빨라져 시험 직전에는 하루면 모든 내용을 머릿속에 넣을 수 있게 됩니다.
그러다 보니 뭐라 설명할 수는 없지만… 회계의 이론을 관통하는 한 줄기의 개념이 머릿속에 박힙니다. ‘회계라는 것이 이렇게 구성되어 있고, 이것을 만든 사람들은 이런 생각을 하면서 만들었겠구나’ 하는 생각이 머릿속에 자리하기 시작합니다. 그 이후로는 많은 내용이 휘발되지 않고, 남기 시작했습니다.
자기 객관화
시험을 잘 보는 사람들의 공통점이 있다면, 그것은 ‘자기 객관화’일 것입니다. 즉 자기 자신을 주관적으로 보지 않고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것이죠. 이게 정말 어렵습니다. 여러모로 착각하기도 쉽습니다. 자신은 객관적으로 보고있다고 생각하는데 안 그런 경우도 매우 많죠.
자기 객관화의 장점은 자기의 강점과 약점을 명확하게 바라볼 수 있다는 점입니다. 이것을 잘하는 친구들은 공부할 때 공통점이 있습니다. 이들은 앉아서 무작정 책을 펴지 않습니다. 공부 시작 전 계획을 오래 세웁니다. 자신이 잘하는 것과 못하는 부분을 알기 때문에, 학습계획을 매우 전략적으로 세웁니다.
내가 재무회계 과목에서 복합금융상품은 확실히 아니까 이 부분은 아예 안 보고, 대신 연결회계에 시간을 2배로 쓰겠어.
이런 식으로 계획을 세웁니다. 이게 생각보다 쉽지 않아요. 다시 보다 보면 내가 잘 아는 챕터에서도 모르는 게 발견되기 마련이거든요. 그러면 대부분은 순서대로 착착 공부하기 위해서 그 부분을 다시 읽기 시작하지요. 하지만 자기객관화 + 숲형인간의 경우 냉정합니다.
어차피 이 시험은 60점만 넘으면 되는 시험이야. 시간도 부족하니, 작은 구멍들은 일단 버리고 큰 구멍부터 빨리 메꾸자. 다 메꿔지면 작은 구멍 메꾸러 다시 오면 돼.
이렇게 진행하기 때문에 속도도 빨라지고 효율성도 높아집니다. 이럴 때 작은 구멍과 큰 구멍을 구별하는 능력이, 바로 ‘자기 객관화’입니다.
회계를 잘하기 위해서는?
다른 학문도 그렇지만, 회계는 정말로 낯설고 방대한 학문 중에 하나입니다. 제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회계는 어려운 것이 아니고 낯선 것이 문제입니다. 알고 보면 어려운 부분은 그렇게 많지 않아요. 기업을 표현하는 언어에 가까운 학문이다 보니, 기본 문법과 주요 어휘의 개념만 파악하고 나면 의사소통에 큰 어려움이 없습니다.
제가 학창 시절 회계를 잘 못 했던 이유는 그저 단어 외우듯이 공부를 해서 그런 것 같습니다. 회계의 전체 흐름을 알지 못하고, 기본 문법을 이해하지 못해서 그런 것 같습니다. 이제 회계는 제게 제2의 언어가 되어 매우 상식적인 학문이 되었습니다.
요즘 회계에 대한 수요가 많습니다. 꼭 회계재무팀에 속하는 사람이 아닐지라도, 교양으로서의 회계를 익히고 세상을 더 밝게 보고 싶어 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저는 그런 분들께 말씀드립니다.
- 일단 잠을 많이 자고 맑은 정신으로 책을 보세요. 회계는 매우 낯설고 불친절한 단어로 가득합니다.
- 하나의 개념에 오랫동안 매몰되지 마세요. 이해 안 되는 것은 접어두고 과감하게 끝을 향해 달려가세요.
- 괜찮은 책을 골라 두 번, 세 번씩 읽으세요. 회계는 언어입니다. 한 번 봐서는 절대 기억에 남지 않습니다.
- 관심 있는 회사의 재무제표를 자주 찾아보세요. (DART는 정말 좋은 사이트입니다)
- 그러다 보면 여러분 주변의 이야기가 회계로 보이고 들리기 시작할 것입니다.
원문: 이재용의 브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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