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정의 신화와 노예화
열정의 신화에 대해 종종 글을 쓰고 강의한 바 있다. 사실 대부분은 열정이라보다 열심일 터이다. 특정한 상태를 가리키는 열정과 달리 열심은 인위적으로 자아낸 태도이다. 조직의 지도자와 자기계발 강사가 성공의 조건으로 요구하는 열정은 단언컨데 열심이다. 목표가 과다해도 기꺼이 충심으로 해주기를, 즉 마음까지 노예가 되어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물론 이걸 구별하는 것 자체가 외려 문제가 될 수도 있다. 이러한 구별을 접하게 되면, 자신은 인위적으로 열심 내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할 테니까. 하지만 열정이건 열심이건 심각한 착시 현상을 유발하는 덫이 된다. 그 수렁, 그 개미 지옥, 그 일차원적 현실 너머를 생각하지 못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한 열정 혹은 열심은 사람을 비참하게 만든다.
어떤 만화
링크해놓은 것은 여대생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만화이다. 그녀는 항상 쪼달리며, 생활비를 자기가 번다. 그래도 형편껏 후배에게 베푸는 좋은 선배이다. 또한 열심히 수업을 듣고 발제 준비도 일찍 시작하는 성실한 학생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발제에 대한 평가가 좋지 않다. (외려 뒤늦게 준비한 친구의 발제에 대한 반응이 더 좋은데 이것도 따져볼 필요가 있다)
만화는 지독하게 현실적이다. 무엇보다 청년 세대의 암울한 현실을 날카롭게 묘사해내고 있다. 동시에 알레고리적(allegorical)이기도 하다. 여러 면에 걸쳐 우리에게 시사하고 있는 바가 적지 않다. 따라서 이 만화를 가지고 차분하게 청년과 사회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보고 싶은 마음도 밀려 든다. 하지만 여기에서는 그저 한 가지만 지적하려 한다.
비실용적인 목적의 공부가 필요하다
현실 안에서 살아가되 그 수렁 속에 매몰되어서는 안 된다. (비록 현실의 장벽으로 인해 발생한 것이지만) 많은 이들의 삶에 과부하가 걸려 있다. 학생과 직장인들 모두 마찬 가지이다. 그러한 실존에서 일정 정도 벗어나서 자신의 내면으로 들어가는 시간을 확보해야 한다. 이것은 독서일 수도 있고, 운동일 수도 있고, 예술일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통상 외면(행위)에 머무르며 가시적 행위의 수량적 평가에 집착한다. 심지어 종교인, 특히 기독교인이라고 다를까. 소득의 10%를 교회에 오버차지로 떼어가게 용인하고 일요일에 정기 집회에 참석하는 것으로 기본적인 멤버십을 확인한다. 성경 전체를 몇 회독 했는지, 새벽마다 기도 집회에 가는 지 등의 여부를 통해 영성의 깊이를 가늠한다.
그뿐인가. 동성애자들의 집회에 가서 훼방 놓고 다른 종교 집단의 성전에 가서 자기 식의 제의를 수행한다. 그런 식으로 외적 기준을 충족할 때 온전하게 그 공동체에 의해 인정된다. 한국의 교회는 그 구성원들이 자신의 내면으로 내려가 참된 자기를 직면하게 도와주지 않는다. 그렇기에 한국교회 멤버들은 존재(인격)이 변하지 않는다.
자신의 내면으로 들어가 자신의 (행위가 아니라) 존재를 새롭게 만들기 위한 모든 수행을 통칭하여 나는 공부(工夫)라고 부른다. 이것은 (이택광 교수가 말한 ‘먹고사니즘’으로 정리될 수 있는) 실용적인 목적을 쫓아 배우는 학습을 넘어서는 것이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생존을 위한 처절한 노력인 자기계발(self-help)의 또 다른 이름에 불과하다.
내가 말하는 공부는 순전히 인격의 도야와 존재의 고양이라고 하는 비실용적인 목적을 추구하는 것이다. 가령 나는 개인적으로 고전을 공부하는 것을 추천한다. 하지만 (<리딩으로 리드하라>에서처럼) 성공을 위해 고전을 읽도록 권유하지는 않는다. 더욱이 역량도 안 되고 준비도 부족한데 고전을 읽기만 하면 성공한다는 말은 엄청난 허구이다.
주체적 생각을 위한 1보 정지
만화 속 여주인공에게서 우리는 주체적인 생각을 발견하지 못 한다. 그녀는 주체적인 태도를 세워가기 위한 별도의 노력(비실용적 독서, 지속적인 묵상, 참된 자아를 직면하고 세상의 이면을 통찰하기 위한 도반과의 대화 등)도 드러낸 바가 없다. 오랜 시간 준비한 그녀의 프리젠테이션이 인정 받지 못한 것은 실로 시사적이라고 할 만 하다.
물론 여주인공의 처지를 이해할 수 있다. 그녀는 형편이 어렵다. 공부하며 알바해야 한다. 그래서 그녀는 무척 바쁘고, 항시 피곤하다. 대체 언제 어떻게 공부하라는 거냐 질문(이라기보다 항의)할 것 같다. 상황이 이러하니 다른 학우들에 비해 그녀의 출발선은 한참 뒤쳐져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같이 경쟁하고 있다. 이건 공정해도 너무 공정하다!
나라면 그녀에게 같이 달리지 말고 자기만의 코스를 찾으라고 권하고 싶다. 모호하다고? 간단히 말해서 나라면 일단 (최소 한 학기는) 휴학하겠다. 도서관에 틀어박혀 고전을 (목록을 짜놓고, 해제와 함께) 공부하겠다. 인문사회과학의 저작들을 관심사에 따라 주제별로 탐독하겠다. 또한 같이 읽고 토론하는 세미나 모임을 찾아보겠다.
그러는 가운데 자기 만의 북소리를 듣고 자기 만의 길을 찾아갈 것이다. 자기 자신 만을 위한 코스를 올바르게 걸어갈 때 참으로 행복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우리의 주인공은 너무 바쁘다. 지금 바로 잠시 멈추어야 한다. 잠시 멈출 수 없다면 외려 오랫동안 멈추어야 한다. 그래야 몸과 마음에 공부의 씨앗을 뿌릴 수 있다.
코멘트: “현실 안에서 살아가되 그 수렁 속에 매몰되어서는 안 된다. (비록 현실의 장벽으로 인해 발생한 것이지만) 많은 이들의 삶에 과부하가 걸려 있다. 학생과 직장인들 모두 마찬 가지이다. 그러한 실존에서 일정 정도 벗어나서 자신의 내면으로 들어가는 시간을 확보해야 한다. 이것은 독서일 수도 있고, 운동일 수도 있고, 예술일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