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대학에 유학을 와서 박사과정에 있을 때는, 얼마나 좋은 논문을 많이 쓰는가가 항상 관심사이고 걱정거리였다. 그 때 비슷한 시기에 다른 대학으로 유학을 간 친구가, 어느 유명 학회지에 몇 편의 논문을 썼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 소식이 충격적이어서 같은 박사과정에 있던 재미교포 친구에게 그 얘기를 해 주었더니, 재미교포 친구는 이렇게 답했다.
“Come on! Life is not a race.”
아무래도 한국 사정을 잘 알고, 한국인의 특성을 잘 아는 재미교포 친구이기에 이 답변과 함께 한국 사람들은 왜 그렇게 쉼없이 일하고, 휴식없이 커리어를 바꾸어 나가는지 나에게 진지하게 물어보았다.
그 질문을 받고서, 나는 나 자신에게 왜 논문 숫자에 집착하는지 물어보았다. 그리고 논문 숫자에 집착하는 만큼 연구 그 자체에도 열정을 쏟고 있는지 역시 자문해 보았다. 그러다 보니 답은 쉽게 나왔다. 한국에서 교수가 되고 싶었던 박사과정 시절, 교수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논문실적이 가장 중요했기 때문이었다.
얼마 전 한국경제신문에서 한국 공과대학이 논문실적으로만 교수를 채용하는 문제점을 꼬집는 기사를 보았다. 이 문제를 지적하는 기사에서는 탄소나노튜브 분야의 권위자인 김상국 교수가, 10년전 한국의 대학에서 모두 퇴짜를 맞고 매사추세츠 공과대학(MIT) 에서 채용의 기회를 얻은 특이한 사례를 보여준다. 물론 논문의 실적은 연구자의 연구성과와 실력을 보여주는 중요한 지표가 된다.
하지만, 그 지표가 유일한 충분 조건은 아닐 것이며, 그 외에도 현장에서의 경험과 성과, 그리고 논문 수가 부족하더라도 소수의 논문이 학계에 준 영향과 학문적 중요성도 고려 대상이 되어야 할 것이다. 특히 미국은 좋은 대학 교수일수록 논문의 양보다는 현재의 학문, 혹은 기술의 한계를 넘어서려는 질 높은 연구를 수행하는 경우가 많으므로, 절대로 논문의 양이 그 연구자의 실력을 담보하지 못한다.
대학교수를 채용하는 데에서도 양적인 지수가 절대적으로 사용 되듯이, 한국의 사회 구석구석에서도 양적인 지수가 중요하게 사용된다. 교육현장에서도 학급 혹은 전교에서의 석차를 통해서 숫자로 학생을 평가하고, 대학의 서열화로 매겨진 출신대학을 통한 개인의 평가로 이어진다. 그리고, 대학에서의 학점과 영어 토플, 토익 시험의 점수로 회사 입사시에도 개인의 가치는 양적인 지수로 평가된다.
물론 결혼 시에도 수량화하기 쉬운 경제적 형편이 중요한 조건이 된다. 이렇게 양적인 지수와 스펙으로 개인을 평가하는 것은 평가하는 사람의 편의를 도모할 수 있지만, 양적인 기준에 미흡하더라도 특출한 재능과 소질을 보이는 사람을 놓칠 수 있고, 또 주어진 기준에 못 미친 사람에게 두번째 기회를 차단하는 폐쇄성으로도 이어질 수 있다.
한국사회가 양적 지수에 집착해 온 이유는, 전쟁 후 경제후진국에서 보다 빠른 성장의 동력을 얻기 위해 수치적 목표를 정하고,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고 달려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숫자에 집중할 수밖에 없는 환경에서 몸에 배이는 습관은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의 중요성과 가치에 대한 관심보다는, 그 일에서 자신이 보여줄 수 있는 양적인 성과에 대한 집착이 되고 만다. 왜 이렇게 달리고 있는지를 망각하게 하고, 달리는 그 자체에 모든 의미를 두게 한다.
지난 러시아 소치 동계올림픽에서 김연아 선수는 이전 밴쿠버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땄기에 더 이상 메달에 집착하지 않아 보였다. 그리고, 부상과의 투혼을 이겨내고, 자신과의 싸움에 매진하고, 보다 아름다운 퍼포먼스를 보이는 데 집중하는 모습을 보여준 듯하다. 그와 반면에, 선수생활 내내 김연아와의 경쟁에 지쳐있고 집착을 보인 아사다 마오는 피겨 여자 싱글 쇼트프로그램에서 큰 실수와 함께 충격적인 16위를 기록했다.
하지만, 두 번째 연기인 싱글 프리스케이팅에서 메달의 집착을 벗어버린 아사다 마오는 피겨스케이팅 자체에 집중해 보였고, 아름다운 미를 관중에게 선사해 주었다. 그리고, 아사다 마오의 아름다운 연기에 관중들도, 관중들 중의 한 명인 필자도 환호와 박수를 아끼지 않았다.
가끔은 숫자로 주어진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열심히 달리고 있는 나를 멀리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 나는 그 숫자를 성취하기 위해 달리는지 아님 자신이 매달려 있는 일이 가지는 궁극적 목표와 가치를 위해 달리는지 질문할 필요가 있다. 마찬가지로 교육기관도, 기업도, 사회도, 국가도 각각 가지고 있는 양적 목표들을 달성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함이 과연 교육기관, 기업, 사회, 국가의 존재 이유와 목적에 부합한지 한 번쯤 물러서서 곰곰이 물어볼 필요가 있어 보인다.
원문: 공학자의 사유공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