꽤 오래된 다큐멘터리인 〈Man vs Wild〉 아시나요? 오래된 프로그램이다 보니 한 번쯤은 보셨을 것 같은데요. 베어 그릴스라는 생존 전문가가 나와서 다양한 환경에서 살아남는 것을 보여주는 내용입니다. 사막, 극지방, 밀림 등 극한 환경에서 나이프 하나로 버티는 모습이 꽤 재미있습니다.
매일 콘크리트 속에서 지내고 하루종일 모니터를 보며 키보드 두드리는 아재 입장에서는 대체 이게 같은 별에서 일어나는 일인가 싶습니다. 그래서 몰입해서 보고 있습니다. 카메라로 찍고 있는 걸 보면 스테프가 뒤에 있는 거니까 완전히 홀로 야생이라고 할 순 없겠습니다만, 그렇다 해도 시키는 대로만 만들 수 있는 콘텐츠도 아닌 것 같습니다.
베어 그릴스는 다양한 환경에서 생존하는 방법을 보여줍니다. 사막에서는 먹을 것을 어떻게 구하는지(뱀이 지나가면 도시락이라고 합니다), 아마존 밀림에서는 어떻게 먹을 것을 구하는지(피라냐가 지나가도 도시락이라고 합니다), 어떤 방향으로 가야 마을이 있고 물을 구할 수 있는지 등을 직접 수행하면서 알려줍니다.
그중 한 편은 무인도에서 살아남는 법에 대한 내용이 있었습니다. 일부러 무인도까지 가서, 헬리콥터에서 바다로 떨어져서 헤엄쳐 갑니다. 열심히 수영해서 해안에 닿은 베어 그릴스 아저씨가 설명합니다. 무인도에 도착했으면 가장 먼저 할 일이 높은 곳을 찾아서 올라가는 것이라고요.
힘들어 죽을 것 같은 표정으로 낭떠러지를 막 올라갑니다. 끙끙대며 올라가서는 주변을 둘러봅니다. 어디에 뭐가 있는지 살펴본 후 다음 행동을 정합니다. 이렇게 해야 여기가 진짜 무인도인지, 모래사장은 어디고 주변에 섬은 어디 있는지 등등의 사항을 확인할 수 있으니 가장 먼저 하라고 일러주었습니다.
제가 무인도에서 조난당할 일은 왠만하면 없겠으니 그냥 기억해 둬야겠다… 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어디서 많이 본 장면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뭐지 했는데 생각났습니다. 묘하게 비슷하더라구요. 제가 요즘 삶에 대해 생각하는 것과 말입니다.
우리는 매일 열심히 하루를 살고 있습니다. 다들 비슷할 거라 생각합니다. 저도 월요일 출근이 죽을 것 같다가도 순식간에 금요일이 오는 마법 같은 매일을 보내고 있는데요. 그러다 보니 아침에 일어나서 세수하며 그날그날을 조망합니다. 오늘 점심때 무슨 미팅을 하고 저녁때는 무슨 일을 하고 따위를 생각하는 거죠. 매일매일의 일정을 생각 안하는 분은 별로 없으실 겁니다.
1주일이나 한 달도 그럭저럭합니다. 이번 주 금요일까지는 보고서를 끝내야지, 이달 말까지는 장부 정리 해놔야지 등입니다. 해야 할 일, 안 한 일이 비교적 명확히 보이니까요.
그럼 1년은요? 1년은 아마도… 재야의 종소리를 들으며 다들 각오를 다지시겠죠. 아, 또 한 살 더 먹네 젠장. 그래도 올해는 이런 거 했으니까, 내년에는 이런 거 해야지 다짐하면서 연말에 열심히 모은 프리퀀시로 교환한 스벅 다이어리를 꺼냅니다. 새 다이어리를 개봉할 때의 느낌은 사뭇 성스러운 의식과 같습니다. 내년도 달력을 보며 휴일이 왜 이렇게 없는지 한숨을 쉬고, 목표 같은 걸 첫 페이지에 또박또박 적어내리는 느낌은 참 남다르죠.
네, 저만 그런 건 아닐 겁니다. 다들 그렇게 매일, 매년을 보내고 있죠. 그런데 인생 전체를 조망하는 건 하시나요?
왜인진 모르겠지만 저는 베어 그릴스 아저씨의 무인도 탐험을 보다가 강하게 그 생각이 들었습니다. 삶이나 무인도나 뭐 그리 다를까요. 전체를 조망하고 계획을 짜야 하는 것은 인생에서도 해야 할 일일 겁니다. 삶에 대해서도 무인도에 떨어진 것처럼 가장 먼저 할 일이 높은데 올라가서 조망하는 것일 텐데, 저는 그걸 잘 못 했습니다.
산에 올라가는 게 힘든 것과 같은 이유였습니다. 힘들더라구요. 인생 전체를 조망한다는 게요. 당장 내일을 생각하는 것도 피곤해 죽겠는데, 무슨 인생 전체를 조망하겠습니까. 일단 여유가 없습니다.
그리고 여유를 만들어도 두 가지 때문에 더 힘들었습니다. 내가 어딜 가야 하는지도 모르겠고, 어떤 장비나 능력이 있는지도 잘 모르는데 뭘 조망을 하나 싶은 거죠. 생각 외로 참 어려운 게 있는 그대로의, 날것의 나를 보고 인정하는 겁니다.
와… 나이를 이렇게 먹었는데 해 놓은 게 없네? 이러고도 잠이 오나.
이런 느낌. 아마 여러분도 대학 입시, 취업 준비 때 겪으셨지 싶은 그 느낌이라면 아실까요.
저는 군 제대 후 잠깐 프로게이머를 꿈꿨는데요. 진짜 게이머들을 실제로 접하고 게임 실력과 피지컬에 엄청난 차이가 있다는 걸 확인하고 좌절했던 적이 있습니다. 돌이켜 보면 현실을 직시하는 그 순간이 가장 괴로웠던 것 같습니다. 주변의 친구들과 게임하면서 ‘오 나도 좀 하는데?’ 라고 기세등등하다가 진짜 프로를 만나니 그야말로 명함도 못 내미는 상황, 괴로웠습니다.제 한계를 인정하는 게 힘들더군요.
자신을 냉정하게 돌아보고, 내가 갈 곳이 어딘지 보는 것과 조난당한 무인도에서 전체를 보기 위해 높은 곳에 오르는 것이 꽤 비슷하단 생각이 그래서 들었습니다.
베어 그릴스 형아는 끙끙대며 섬 꼭대기로 올라갔습니다. 옆 섬에 먹을 것이 많다고 판단하고 이동하더군요. 수심이 얕은 곳에 상어가 많이 돌아다녔는데, 겁먹은 카메라맨과 음향 기사와 함께 건너갑니다. 생존은 위험과 이득을 계산하는 과정의 연속이라고 말하면서요.
방송 분량 다 찍은 그릴스는 집에 갔겠지만 저는 고민이 시작되었습니다. 어쩌면 인생을 조망한다며 이 봉우리 저 봉우리 막 올라가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베어 형은 시리즈 초기에는 나이프 하나만 들고 다니며 살아남았는데, 나무를 비벼서 불 피우는 게 너무 힘들다며 요즘은 부싯돌도 같이 가지고 다닌다고 합니다. 제가 든 나이프랑 부싯돌은 뭔지 누가 좀 알려주면 좋겠는데, 아직도 아리송하기만 합니다.
어디로 가면 좋을지, 어떤 장비를 챙길지 늘 고민하시길 바랍니다. 저도 늘 헤매고 있으면서 독자들에게는 이래라저래라 해서 죄송합니다. 같이 고민하면 뭐라도 나오지 않을까요? (20년째 고민중)
다들 좋은 장비 챙겨서 잘 살아남으시길 바라봅니다. 감사합니다!
이 필자의 다른 글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