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좀 바쁘게 지냈는지 몸의 컨디션이 좋지 않다. 처는 한국에서 하던 수영을 일본에서 중단한 것이 컨디션 조절에 영향이 있는 것 같다고 한다. 며칠 전 내가 출근한 후 후쿠오카(福岡)에 사는 큰 딸과 상의하여 우리 동네 가까운 스포츠센터를 검색하여, 몇 곳 다녔으면 하는 수영장 후보를 자료로 정리해 놓았다. 나 역시 당장은 아니어도 머지않은 시일 내에 일본에서도 수영을 다시 시작해 볼까 하는 마음에서 전화로 몇 군데 문의를 해 보았다.
스포츠센터 상담담당자들의 대부분의 반응은 ‘풀’이 장애인 시설을 별도로 만들었기 보다는 일반인 수영애호자들과 함께 어울려 수영하는 것을 더욱 배려하다보니, 실질적으로 관련시설이 간혹 불편할 수 있다는 것에 먼저 양해를 구했다. 그래서 꼭 직접 방문하여, 모든 시설항목을 확인하고, 본인이 판단하여 최종 선택했으면 좋겠다는 의견이었다. 물론 공히 공공 스포츠센터의 경우, 장애인 본인과 보호자 한 사람은 완전 무료로 매일이라도 이용할 수 있는 것은 물론이었다.
장애에 대한 배려 없는 한국에서의 무한경쟁
나는 아주 어려서부터의 장애를 입고 살지만, 사실 한국에서 성장시설부터 의식적으로 장애인자각이나 열패감 없이 살아가려고 무진 애를 쓴 경우이다. 대개는 그것을 나름 숨이 턱에 닿도록 최선을 다해 초인적으로 극복하고 살고자 했지, 그것을 내걸고 무얼 좀 봐 달라는 입장은 결코 나에게서 도무지 용납이 안 되는 삶이었다. 그래서 그로 인해 나름 이겨내고, 때로는 쟁취해 낸 것도 꽤있다. 대학의 장애불합격을 싸워서 합격으로, 자동차운전, 취직, 스포츠, 여행, 인생 대부분 미리 포기한 것은 없다.
그러나 일본 유학시절 이후, 나는 좀 변했다. 거의 대부분 이른바 ‘장애인 핸디’를 무진장 요구하며 산다. 내가 이를 악물고 같은 조건으로 버티고, 뛰어보아야 결코 나에게도, 내 주변의 사람들도, 어차피 나와 같이 살아갈 때, 그렇게 하는 것이 서로에게 편안하거나 유쾌한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어차피 장애가 없는 친구와 내가 100미터를 같은 스타트라인에 서서 뛰어 경주를 해보아야 내가 질 것은 명확한 일이다. 그렇게 해서, 그 친구가 날 이겨보아야 그 또한 기분이 좋겠는가. 이런 시합을 지켜본 구경꾼들도 에이 하고 야유나 퍼부을 것이다. 그렇다고 친구와 내가 100미터 달리기 시합 한 번 못한다면 그 또한 재미없는 인생 아니겠는가.
그래서 나는 언제부터인가 당당히 주장한다. 내가 90미터를 먼저 가 있겠다고. 그리고 친구는 100미터 원래의 출발선에서 뛰고 나는 90미터 먼저 간 지점에서 동시에 출발하면, 누가 이기든 아슬아슬 골인해서, 그래야 이긴 사람은 환호하고, 진 사람은 아쉬워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래야 구경꾼들도 진심으로 박수를 칠 수 있지 않겠는가 하는 것이다. 내가 100미터 경주에서 90미터 먼저 가서 출발하는 것이 과연 ‘평등’에 어긋난 일인가.
장애를 가지고도 당당하게 요구할 수 있는 일본
일본에서(한국에서도 이제 일부는 적용되지만) 장애인 수당지급, 자동차세 면세, 고속도로통행료, 신칸센, 국내선항공료 반값, 지하철 무료, 전철과 택시비 할인, 공영주차장 무료, 가솔린값 보조, 줄서기 면제… 대학에서도 강의 시 내 연구실에서 최단거리의 특별교실 배정, 행정직원의 사무배달 서비스, 도서관 대출대행, 우천 시 우산 씌워주기, 모든 건물 앞의 내 자동차 주차허용 등등 이루 다 헤아리기 어려운 혜택을, 나는 다 그 내가 먼저 가는 90미터의 하나라고 생각하며, 대단히 뻔뻔하게 산다.
가끔 너무 이렇게 미안한 마음도 없이 당당하게 요구하며 살고, 큰 소리를 뻥뻥 쳐도 될까 생각할 때도 있다. 혹 역무원 등이 더 잘 못해드려서 미안하다며 허리를 굽혀 조아릴 때(물론 그것이 속마음 그대로인지, 훈련된 복무규정에 따른 것인지 모르지만, 물론 이러나저러나 그것까지 내가 상관할 바는 아니고), 거만하게(?)괜찮다고, 앞으로는 시스템이나 시설에 더 개선하는 모습을 보여 달라고 훈시(?)를 할 때, 가끔은 솔직히 좀 쫄리는 마음이 없지는 않다. 차비도 아예 안내거나 반값만 낸 주제에 말이다.
그러나 나는 내가 그 90미터를 확실히 찾아 먹어야 이 세상이 더 좋은 세상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되도록 계속 뻔뻔하고자 노력한다.
안내견을 타고 버스에 오르지조차 모르는 한국
오늘 한국 뉴스 하나에 다시 내 피가 거꾸로 솟았다. 1급 시각장애인이 안내견(案內犬)을 데리고 버스를 타려는데, 내려라, 그것이 규정에 어긋나면 벌금을 내겠다. 앞으로 개새끼(?)랑 같이 타려면, 상자에 가두어 들고 타라… 운전사의 말이었단다. 돌아오는 길은 아예 태우지도 않고 출발…
이것 정말 언제까지 이래야하나. 다른 것 잘 고치고, 바꾸고, 민주주의가 어떻고 주장하면 무엇 하나, 장애인들을 다른 이들과 똑같은 선상에 같이 세워놓고, 같이 뜀박질하고는 그들이 뒤쳐졌다고 조롱할 판의 사회에서, ‘인권’이 무엇이고, ‘평등’이 무엇이며, 과연 ‘정의’란 무엇인가. 과연 잘 산다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
일본도 아직 시스템 상으로나 시설의 차원에서 완벽한 이상적 상태에 다다랐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 부족분을 사람들이 채워간다. 이 사람들의 이른바 ‘다떼마에’(建前)인지는 몰라도 대개가 장애인 앞에서 그렇게 친절하고 부드러울 수가 없다. 물론 일본 싫어하고, 비난해야 할 일 많지만, 이런 건, 우선 좀 배워가야 할 것 같다. 이게 기본이다.
원문: 서정민 교수의 동경 에세이 – 종교사학자의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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