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독립 왕국의 이야기
어디에나 중심과 변방이란 건 있을 거야. 세상의 중심이 자기네라고 여겼던 중국 사람들이 보기에 우리는 변방의 소국이었겠지. 하지만 우리 안에서도 변방은 존재하고 그 변방은 왕화(王化)가 이뤄지지 않은 동떨어진 동네로 치부되는 경우가 많았지. 이를테면 제주도처럼. 우리나라의 제주도와 유사한 처지로 일본의 오키나와가 있을 거야. 제주도만큼이나 슬프고 사연 많은 일본의 변방.
제주도는 독립왕국의 기억이 그리 선명하지 않지만 오키나와는 달라. 오키나와는 17세기 초 이전에는 분명한 독립국 류큐였다. (노량해전에서 이순신에게는 참패한) 일본 최고의 용장이라 불리운 시마쓰 요시히로에게 정복당해 속국이 되긴 했지만, 오키나와의 왕은 메이지 유신 때까지 명맥을 유지하거든. 이 메이지 유신 때부터 류큐의 이름은 사라지고 오키나와라는 이름이 섬을 일컫는데 쓰인다.
메이지 유신 이래 오키나와에서는 이른바 ‘황민화 교육’이 철저하게 시행됐어. 오키나와 말을 쓰면 처벌받았고 오키나와 고유의 문화는 말살돼 갔지. 류큐인들 가운에에도 ‘친일파’가 생겨나서 이들은 오키나와인들이 일본인화하는 것이 살 길이라고 주장했는데 그 가운데는 이렇게 얘기하는 사람도 있었어. “재채기조차도 일본어로 해라.”
일본의 인간방패로 사용된 2차 대전
오키나와인들은 세월이 흐르면서 류큐인이라기보다는 일본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받아들이게 됐고 전쟁이 다가오자 그들은 일본군에 협조하여 미군에 맞선다. 문제는 일본은 오키나와 사람들을 진정한 일본인으로 별로 인정하지 않았다는 사실일 거야. 일본 본토, 자기들말로 내지(內地) 사람들은 기실 오키나와를 일본의 일부로서보다는 식민지로 대했고 관동 대지진 때는 오키나와인들도 학살의 대상이 되기도 했지. 어쨌든지옥이 다가온다. 1945년 봄과 여름.
드넓은 태평양 곳곳에서 일본군과 격전을 치르며 일본의 숨통을 죄어들어오던 미군은 사이판, 괌, 이오지마 등을 연달아 함락하고 드디어 오키나와에 상륙했어. 오키나와를 요새화한 일본군은 격렬하게 그에 맞섰지. 어느 정도였는지를 설명해 주자면 일본군이 미군으로 하여금 “본토 상륙”이 어느 정도로 험난할까를 체험시켜 본토 진공을 포기하게 만들려 했다는 말까지 나올 정도지. 문제는 일본군들은 오키나와 사람들을 지킨다는 생각은 안중에 없었다는 점.
그들은 군관민일체를 내세우면서 젊은 사람들은 군인으로 끌고 가고 노약자와 부녀자들의 경우 미군이 자행한다는 가공할 만행을 적극 홍보하면서 “포로가 되느니 차라리 죽을 것”을 선동한다. 사람이 공포에 질리면 얼마나 어처구니가 없어지는지 우리는 알지. 언젠가 해 줄 얘기긴 하겠지만 한니발과 로마 군단이 맞붙은 칸나에 전투에서 한니발 군대에 포위된 로마 병사들 중 일부는 죄어들어오는 포위망의 공포에 못이겨 흙을 삼켜 자살했다고 해.
오키나와 사람들의 공포 역시 극에 달했고 일본군은 그 공포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도록 유도했다. 성급한 사람들은 자살을 했지만 자살할 용기도 없는 사람들에게는 더욱 큰 비극이 기다리고 있었어. 서로를 때려죽이고 찔러 죽이는 거였지. 잘 들지도 않는 칼로 아버지가 자식들을 난도질했고 어머니가 딸의 목을 졸랐다.
미군이 찍었던 자료 화면을 보면 한 소년이 스스로 바다에 들어가 자기 목을 물 속에 집어넣으며 자살을 시도해. 하지만 잠시 뒤 그는 또 생존을 위해 허우적거리게 된다. 인간의 본능이 살아난 거지. 물은 이미 깊었고 소년은 애초의 바람대로 수중고혼이 돼 버리는 걸로 영상은 끝난다.
자신들을 제대로 사람 취급해 주지도 않는 일본의 방위를 위하여 오키나와 사람들은 10만 명이 넘는 목숨을 바쳐야 했어. 그 가운데 유명한 이야기 하나로 히메유리 학도대라는 게 있지. 졸업을 앞둔 여학생들이 간호요원으로 차출돼 근무하던 중 갑자기 ‘해체’ 명령이 내려지고 그들은 갈피를 못잡고 우왕좌왕하다가 집단자살하거나 동굴 밖으로 나섰다가 미군의 포격에 가루가 돼 버렸지. 일본의 한 가수가 오키나와를 여행하다가 이 히메유리 학도대의 이야기를 듣고 그들을 기리는 노래를 만들지. ‘섬노래’라는 건데.
데이고꽃이 피어 바람을 불러 폭풍이 왔네…… 잇따른 슬픔은 섬을 가르는 파도와 같아. 사탕수수밭에서 당신과 만나 사탕수수 아래에서 영원한 이별. 섬노래여 바람을 타고 새와 함께 바다를 넘어라. 섬노래여. 바람을 타고 전해줘 나의 눈물을. (하략)
끊임 없는 차별
일본 방위의 전초기지로서 온갖 형극을 무릅써야 했던 오키나와는 일본 패망 이후에는 미군 기지의 총집결지가 돼 버렸어. 동양 최대라는 가네다 공군기지와 후텐마 기지 등은 물론 한국에서 전쟁이 터지면 바로 투입될 해병대 기지도 오키나와에 있어. 일본 본토에 있어야 할 기지들까지도 오키나와에 몰려왔기 때문이야.
이 득실대는 미군으로부터 유래된 비극 중 하나는 전염병 풍진이었어. 이 풍진이 대유행하여 오키나와의 한 세대에는 청각 장애인들이 대량 발생했지. 그 아이들을 위해 학교가 세워질만큼. 이 청각장애인 학교의 일본 고교야구 선수권 대회, 즉 갑자원 출전기를 그린 게 만화 <머나먼 갑자원>이다.
오키나와에 대한 차별에 장애인 편견까지 겹쳐서 출전이 어려웠지만 교장 선생님과 기타 여러 사람의 노력으로 출전이 성사되는데 이 기쁜 소식을 전하려고 교장 선생님은 헐레벌떡 야구팀에게로 달려간다. 하지만 교장 선생님은 발을 헛디뎌 넘어지고 말지. 멀리서 지켜보던 아이들은 뻔한 얘기일 텐데 뭘 저렇게 바삐 오시나 수화(手話)로 푸념하고 있었지. 그때 교장 선생님이 가까스로 몸을 일으켜 수화로 외친다. 외쳤다는 표현이 이상하지만 그건 외침이었어
“너희들의 출전이 허락됐다.” 그리고 미친 듯이 터져나오는 환호의 물결.
전쟁의 비극 속에서 겨우 살아남은 부모의 아이로 태어났지만 정복자의 몸에서 흘러나온 병균 때문에 청각장애인으로 살아야 했던 수백 명의 아이들은 그 자체로 오키나와라는 땅에 아로새겨진 비극일 게다. 전국 체전에서 일장기를 끌어내려 불태우기도 했고 얼마 전까지 기미가요를 거의 부르지 않았으며 천황의 죽음에 냉담했던고 천황을 애도하는 승려에게 침을 뱉은 땅. 그게 오키나와였지.
그 오키나와의 치열한 전투, 아니 끔찍한 전투는 1945년 6월23일 끝났다. 요즘 오키나와 사람들은 일본의 ‘정상국가’ 선언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지 궁금하네. 아직도 집단 자결의 동굴의 냉기는 가시지 않았을 텐데. 제 목을 눌러 바다 속에 집어넣어 자살하려던 소년을 삼킨 바다는 아직도 그날을 잊지 않았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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