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에는 그런 것들이 있다. 그대로 둬서는 안 되는 것들. 언젠가 해결해야 한다는 부채 의식을 느끼게끔 하지만 당장은 귀찮아서 그저 처박아 두게 되는 것들. 이를 테면 치과 진료 예약, 마이너스만 되는 인간관계, 그리고 무엇보다 옷장을 가득 채운 유통기한 지난 옷가지들.
난 물욕이 좀 많은 편이었다. 어릴 적에는 바비인형을 30개나 모아서 창가에 주르륵 진열해 놓고는 그 누구도 손대지 못하게 했다. 마음에 드는 옷은 색깔별로 구입해야 성이 찼고 코랄 립스틱과 코랄 핑크 립스틱은 엄연히 다르다고 믿었었다.
물건을 꾸역꾸역 소유하는 것은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일련의 예방책으로써 내 불안감을 덜어주었다. 몸뚱이는 겨우 하나인 주제에 외국 생활을 할 때 그렇게나 많은 옷을 가져간 것도 그런 연유에서였다. 처음 밴쿠버에 도착했을 때 내 이민 가방의 3분의 2는 옷가지로 가득 차 있었다. 이런 파티에 초대받게 될지도 모르니까. 갑작스레 정장을 입어야 할 수도 있으니까. 무거운 이민 가방을 반쯤 울면서 공항에서 호스텔로 옮기고 택시 기사에게 큰 팁을 준 뒤 3층까지 옮겨달라고 부탁을 했을 때에야 내가 실수했음을 깨달았다.
어디 그뿐인가. 내 핸드백은 만일의 상황에 대비하기 위한 아이템들로 가득 찬 도라에몽의 주머니가 따로 없었다. 애드빌, 물티슈, 보조배터리, 킨들, 핸드크림, 구강청정제.
하지만 일련의 경험을 통해 깨달은 것은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해 이런저런 물건들을 잔뜩 지니고 다니는 것은 그저 내 어깨만 아프게 할 뿐이라는 것이었다. 애드빌은 두 달에나 한 알 먹을까 말까였고, 그토록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갈 파티는 그리 자주 생기지 않았다. 그리고 부산을 떨며 미리 준비를 해두지 않아도 어떻게든 나는 방법을 찾았을 것이라는 걸.
귀국하던 날, 그 많은 짐들을 차마 다 비행기에 싣지 못하고 배편에 붙였다. 보통 짐을 받기까지 한 달 정도가 걸리는데, 내 짐은 한 달 반이 지나도 감감무소식이었다. 태평양 바다 어딘가에서 분실된 걸까. 반쯤 포기했을 때쯤 배송된 내 짐을 확인하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하도 거칠게 다뤄진 탓에 마이클 코어스와 토리 버치 가방은 모서리가 다 찌그러져 있었다.
결국 내가 어디든지 가지고 갈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나 자신 뿐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나를 좀 더 우아하게 보이게 해주는 비싼 가방은 도난당할 수도 찌그러질 수도 있지만, 데드리프트를 할 줄 아는 것과 알리오 올리오 스파게티를 만들어 먹을 수 있는 능력은 1Kg을 붙이는데 사만 원이 드는 비행기 삯을 내지 않아도 어디든지 지니고 갈 수 있다는 걸. 게다가 무언가를 배우고 경험을 통해 나에 대해 믿는 구석이 하나씩 생겨날수록 굳이 모든 해결책을 주렁주렁 지니고 다닐 필요가 없다는 것도.
내 방 한편에 있는 행거에는 숨 막힐 정도로 많은 옷이 걸려 있는 탓에 그 무게를 감당하지 못한 철봉이 살짝 구부러져 있을 정도였다. 언젠가는 손을 봐야 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불편했지만 역시 행동에 옮기기보다 무시하는 편이 쉬웠다. 어느 날 야근을 마치고 집에 오니 행거가 넘어져 수십여 벌의 옷이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짜증이 솟구쳤지만 누굴 탓하겠는가. 결국 내가 자초한 결과인 것을.
이번엔 확실히, 조금 독하게 물건들을 정리하자고 마음먹었다. 지난 1년간 입지 않았던 옷들, 더 이상 나를 설레게 하지 않는 물건들을 솎아냈다. 그저 ‘아깝다’, ‘멀쩡하다’는 이유는 효력을 잃은 물건들을 꾸역꾸역 쌓아두는데 충분하지 않다고 스스로를 설득했다. 총 5박스의 물건들이 나왔다.
그렇게 정리를 하다 문득, 지난 연애의 유적들과도 마주했다. 젊기에 가난했던 우리였는데, 그 애는 유독 나에게 선물을 자주 주곤 했다. 특별한 날도 아닌데 별 시시한 이유로. 나에게 왜 이렇게 잘해주는 거냐고 내가 물었고, 그는 이렇게 답했다.
나중에 우리가 더 이상 함께 하지 못할 때 네가 나를 기억해줬으면 하니까. 대부분의 경우 아름다운 이별이라는 건 없어서 마지막엔 서로에 대한 증오 때문에 행복했던 기억 마저 퇴색되곤 하잖아. 내가 했던 말과 행동을 너는 더 이상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지만 적어도 이 물건들은 남지 않겠어? 그때 가서 생각하겠지. 그래도 내가 괜찮은 남자 친구였다는 걸.
물건들을 보며 그를 한 번 더 떠올리게 되었으니 어쩌면 그의 전략은 통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분명한 건 우리가 함께 보낸 시간과 밤새 나누었던 이야기들은 나라는 인간에게 흡수되어 내 정체성의 한 조각을 이루었고 이는 내가 어디를 가든 따라다닌다는 사실이다. 굳이 몇 벌의 옷가지가 아니어도 지난 사랑의 증거는 이미 충분했다.
그 물건들이 의미하는 바는 매우 남달랐지만, 더 이상 이것들을 사용하게 될 것 같지는 않았다. 박스에 담아 내치는데 일련의 죄책감마저 들었다. 선물을 건네던 그 애의 천진난만한 표정, 공단 리본으로 포장된 박스를 열며 두근거렸던 나. 그 상냥했던 기억들을 헌 옷 수거함에 처박아 어두운 세상의 끝에 차갑게 내칠 작정인가.
그러다 문득 예전에 책에서 읽었던 한 구절이 떠올랐다. ‘선물은 건네지는 순간 상대에게 기쁨을 주었다면 그것으로 제 소명을 다한 것이다.’
과거의 기억이 스며든 물건들을 버린다고 그 추억마저 외면하는 것은 아니지 않나. 그래서 보내주기로 했다. 대신 예의를 차려 정중히 인사를 건넨 다음에. 수고했어. 고마워. 넌 나에게 많은 기쁨을 주었어. 그 기억들은 평생 나와 함께 할 거야. 하지만 이제 진짜로 안녕. 정말로.
옷걸이에는 다섯 벌의 셔츠와 바지 그리고 두 벌의 코트만이 덩그러니 남았다. 모처럼 텅 빈 내 방이 쓸쓸하기보단 상쾌했다. 어쩌면 그날 내가 정리한 것은 단순히 몇 벌의 옷가지뿐만이 아니라 혼란스럽고 숨고 싶고 마주 하고 싶지 않았던 감정과 기억들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내 불안감을 달래줄 재고를 쌓아두지 않아도 표표하게 살아가는 내 모습이 좋다. ‘넌 아마 이게 필요할걸?’이라고 말하는 광고를 무심하게 지나칠 수 있어 좋다. 배낭에 딱 세 장의 나시만 넣고 저벅저벅 여행을 하는 단순함이 좋다. 미니멀리즘의 미학은 단순히 적게 소유하는 데 있지 않다. 그보다는 몇 겹의 물건들로 둘러싸지 않아도, 치장하지 않아도 두렵지 않게 되는 데에 있다. 결국 나라는 사람을 이루는 것은 몇 개의 물건이 아닌 시간과 경험일 테니.
그래서 나는 오늘도 소유하기보단 존재하려고 한다. 소비하기보단 경험하려고 한다. 누군가는 내가 욕심이 적은 사람이라고 말하겠지만 천만의 말씀. 나는 그 경험들을 나라는 사람 안에 퇴적물처럼 층층이 쌓아 올려 어디든 가져가겠다는 더한 야망을 가진 인간인걸.
미니멀리즘을 위한 체크 리스트
- 지난 일 년간 그 물건을 사용한 적이 없다면 아마 앞으로도 당분간 그 물건을 사용할 일이 없을 것이니 과감히 버리자.
- 그 물건을 사용할 때 스파크가 튀는가? 이 물건의 존재가 당신에게 기쁨을 선사하는지를 고려하자.
- 추억이 깃든 물건들을 버려야 할 때 죄책감을 느끼지 말자. 선물은 받았을 때 당신을 행복하게 했다면 그로써 제 일을 다 한 셈이다.
- 미니멀리즘은 단순히 물건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인간관계와 핸드폰에 찍힌 수천 장의 사진에도 적용되는 룰이다.
- 저렴하다고 구입한 그 옷은 절대 저렴하지 않다는 걸 인식하자. 그 옷을 관리하게 들이는 비용과 에너지 그리고 공간을 고려한다면.
- 경험으로 미루어보면 패스트 패션 브랜드에서 나온 한 철 짜리 셔츠 5장보다 튼튼한 폴로셔츠 하나를 소유하는 게 훨씬 경제적이고 기분도 좋다.
- 미니멀리스트가 되면 어디론가 떠나는 결정을 내려야 할 때 훨씬 가벼워진다. 마음 내킬 때 떠날 수 있는 사람은 자유롭다. 그리고 자유로운 사람은 매력적이다.
원문: 최지미의 브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