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직원이 들어왔다. 우리 회사의 비즈니스 영역과 100% 일치하는 경력은 아니었으나 확장하려는 영역에 장점이 있는 친구다. 솔직히 반신반의했다. 검증이 필요했다. 다행히 내가 이끄는 프로젝트에 투입이 되었고 대화를 나누면서 ‘아, 이 친구는 자세가 되어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일을 대하는 자세가 달랐다. 딱 한 달 만에 나는 그 직원을 신뢰하게 되었다. 100 정도의 완성도를 예상하고 업무를 요청하면 항상 120 정도의 완성도를 갖춘 결과물을 납기를 정확하게 지켜서 가지고 왔다.
우리는 회사에서 누군가와 함께 일한다. 누군가와 함께 일할 때 중요한 요소가 많이 있지만 직장 생활을 오래 할수록 가장 중요한 것은 ‘신뢰’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신입사원 시절 내 업무는 ‘언론담당’이었다. 주요 업무는 회사의 ‘보도자료’를 작성해서 언론사에 배포하는 일이었다. 글을 쓰는 언론담당이 되었지만, 바로 보도자료를 쓸 기회가 주어진 건 아니었다.
사수였던 부장님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나에게 테스트로 써보도록 했다. 예를 들어 신제품 출시가 예정되어 있으면 이전에 다른 신제품 출시 보도자료를 참고해서 쓰도록 했다. 내 보도자료는 늘 부장님의 빨간펜으로 도배가 되었다. 글 전체 구성, 어투, 참신성, 재미 등 모든 측면에서 지적을 받았다. 가끔은 숫자도 틀려서 호되게 야단을 맞기도 했다. 내가 부장님의 승인 없이 보도자료를 내보낼 수 있기까지는 거의 1년의 시간이 걸렸다.
부장님이 나에게 원했던 것이 무엇이었을까? 글쓰기 실력? 아니다. ‘신뢰’였다. 보도자료는 회사의 공식적인 입장을 대변한다. 회사가 보도자료를 통해 작년 매출이 3조 2,000억 원이라고 밝히면 시장에서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그래서 숫자 하나에도 신중을 기해야 했다. 언론담당의 자리는 실력을 쌓기 전에 우선 실수를 줄여서 신뢰를 줄 수 있어야 하는 포지션이었다.
신뢰를 얻은 대가 ‘그린 라이트’
야구 용어 가운데 ‘그린 라이트’가 있다. 일반적으로 도루를 할 때 주루 코치 등 코칭스태프의 사인을 받고 작전을 수행하지만, 발이 빠르고 주루 센스가 있어 도루 성공률이 높은 선수의 경우에는 스스로 판단해서 도루를 할 수 있는 권한을 주는데 이것을 ‘그린 라이트’라고 한다.
직장에서도 ‘그린 라이트’가 있다. 야구에서의 그것과 마찬가지로 작전 성공률이 높은 직원에게 주어진다. 이전 직장에서 내 직속 상사였던 상무님이 했던 말 중에 기억나는 말이 있다.
마크, 나랑 직접 미팅하는 경우는 업무에 큰 문제가 있을 때뿐이야. 따라서 나하고 자주 만나는 건 좋은 일이 아니라는 거지.
상무님이 했던 말의 의미는 나에게 ‘그린 라이트’를 줬다는 뜻이었다. 내 역량으로 충분히 해낼 수 있는 업무를 맡겼으니 프로젝트의 시작부터 끝까지 스스로 진행하고 중간에 중요한 의사 결정도 스스로 하도록 했다. 당시 상당히 기분이 좋았던 기억이 난다. 인사권자에게 인정받는다는 의미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린 라이트’를 얻기까지 나는 어떤 노력을 했을까? 크게 세 가지로 말할 수 있다.
하나, 납기는 칼같이 지켜야 한다. 직속 임원이나 팀장이 직원에게 많은 것을 기대하겠지만 그중에서 가장 기본은 ‘납기’이다. 특정 업무를 언제까지 진행하기로 했으면 마땅히 그때까지 완료해야 한다. 결과가 100% 만족스러운 수준이 아니더라도 일단 종료해야 한다.
당연한 얘기지만 납기가 왜 중요할까? 그 이유는 불확실성을 줄여주기 때문이다. 리더 입장에서는 ‘예측 가능한 상황’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누군가에게 일을 맡겼을 때 그리고 그 직원이 언제까지 일을 종료할 것이라고 했을 때, 그렇게 진행되리라는 것을 염두에 두고 다른 업무를 진행한다. 다음과 같은 경우를 살펴보자.
임원: 마크, 이번에 발표된 정부 정책에 따른 시장 크기 변화에 대해서 다음 주 수요일까지 완료해줘요.
마크: 예, 알겠습니다.
임원: 그럼 이만 나가보고, A 차장 들어오라고 해요.
(마크는 나가고, A 차장이 들어간다.)
A 차장: 찾으셨나요?
임원: 지난번에 지시했던 고객별 매출과 전체 시장 크기를 연동하는 작업 아직 진행 중이죠? 이번에 정부 정책 변화가 있어서 마크에게 다음 주 수요일까지 보고하도록 얘기해뒀으니, 우선 전체 시장과 연동 작업은 미뤄두고 고객별 매출 데이터 분석부터 진행해줘요.
A 차장: 예, 그렇게 하고 마크에게 시장 자료 받는 대로 연동할 수 있도록 준비하겠습니다.
업무 지시는 따로 내렸지만 임원 입장에서는 당연히 수요일까지 시장 변화에 대한 조사가 완료된다고 가정하고 A 차장에게 업무 지시를 했다. 이렇게 팀 단위로 진행되는 프로젝트에서는 한 사람이 납기를 삐끗하면 여러 사람의 일정에 영향을 주게 되고, 이는 팀장 또는 담당 임원 입장에서 예측 불가능한 상황을 맞닥뜨리게 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둘, 80% 완성되었을 때 한번 커뮤니케이션을 해야 한다. 본인에게 아직 그린 라이트가 없다면 최종 결과물을 바로 보고하는 것은 위험하다. 운이 좋게도 팀장이 원했던 결과물이라면 문제가 없지만, 기대했던 것과 전혀 다른 결과물이라면 그 여파가 상당하기 때문이다. 물론 중요도가 높은 경우라면 최종보고 이전에 중간보고가 잡힌다. 하지만 중요도가 상대적으로 덜한 보고인 경우도, 그린 라이트를 얻기 전까지는 80% 수준의 결과물이 완성되었을 때 한번 커뮤니케이션을 해야 한다.
여기서 얻을 수 있는 것은 두 가지다. 우선 본인이 준비한 방향이 맞다면 팀장님의 코멘트를 통해 나머지 20%를 제대로 채울 수가 있다. 그리고 만에 하나 방향을 잘못 잡은 경우에도 아직 시간이 남았고 기본적인 데이터나 자료는 충분히 준비가 되었기 때문에 납기에 맞춰 결과물을 만들 수 있다. 다음과 같은 경우를 생각해보자.
마크: 팀장님, 오늘까지 보고 드리기로 한 전사 전략 대시보드입니다.
팀장: 아, 이게 아닌데. 굳이 새로 만들 필요 없이 글로벌에서 사용하는 대시보드의 포맷과 맞추는 게 좋아요. 괜한 고생을 했네. 아쉽겠지만 다시 작업해줘요.
마크: 예, 알겠습니다.
사실 대시보드를 만드는 것이 급한 건은 아니다. 다시 만들면 된다. 문제는 이런 경우가 반복되면 팀장은 어느 순간부터 불안해진다는 것이다. ‘마크한테 맡긴 일은 결국 손을 한번 더 거쳐야 하는구나’라는 생각이 각인되면 결국 팀장은 보고 전에 매번 마크를 찾아 점검할 것이다.
셋, 중요한 의사 결정에 대한 자신만의 의견이 있어야 한다. 그린 라이트를 갖기 위한 마지막 요소이다. 리더 입장에서 누군가를 믿고 업무의 전권을 주기 위해서는 당사자가 그 일에 대한 ‘생각’이 있어야 한다. 내 사례를 예로 들어보자.
마크: 상무님, 이번에 제가 준비하는 디지털 신사업 인큐베이팅 관련해서 이슈가 하나 생겼습니다. 본사 쪽에서 한국에 트레이너를 보내 교육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비용 문제로 무산될 가능성이 커졌습니다.
임원: 그래? 마크 네 의견은 어떻지?
마크: 현재로서는 당장 트레이닝보다 한국에서 시장성 검토를 진행하는 것이 먼저입니다. 트레이닝은 제가 다음 달에 다른 건으로 본사 출장이 예정되어 있는데, 마침 본사에서 근처 국가들 대상으로 하는 트레이닝 일정과 일부 겹쳐서 제가 참석한 후에 한국에 돌아와서 해당 직원 대상으로 전파 교육을 하는 방안을 생각합니다.
임원: 좋은 생각이네. 바로 진행하고, 내가 도와줄 부분이 있나?
마크: 본사 쪽에 트레이닝 참가 승인 요청 메일 부탁드립니다.
임원: (컴퓨터 화면을 보면서) 그건 어렵지 않지. 지금 바로 보낼게.
우리는 이슈가 있을 때 직속 상사에게 달려간다. 빠른 보고는 필수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어느 정도 전문성 있다는 소리를 듣는 연차라면 달라야 한다. 이슈를 들고 갈 때 본인 생각도 챙겨 가야 한다. 그냥 이슈를 들고 가서 ‘이런 문제가 생겼습니다. 어떻게 할까요?’라고 묻는다면, 팀장 입장에선 어떨까? 팀원이 한둘도 아닌데 모든 직원이 이렇게 이슈만 들고 온다면 의사 결정하느라 진을 다 쏟게 된다.
의사 결정을 하려면 현황을 파악해야 하고, 또 여러 이해당사자들의 소리로 들어야 한다. 그런데 사실 이 모든 것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담당자이다. 따라서 담당자는 이슈만 들고 갈 것이 아니라 그에 대해서 본인이 생각하는 대안을 얘기할 수 있어야 한다. 고맙게도 당시 내 직속 상사는 내가 들고 가는 모든 대안에 대해 ‘좋은 의견인데? 마크 네 의견대로 해봐’라는 피드백과 함께 받아줬다.
신뢰하는 직원들과 일하는 리더의 즐거움
되돌아보면 나는 팀원 복이 있었다. 물론 이 사실이 거꾸로 팀원들이 리더 복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진 않겠지만 말이다. 정규 팀원이든 프로젝트팀원이든 대부분 내가 그린 라이트를 주고 일을 시켜도 되는 직원들이었다. 앞에서 직원들 입장에서 그린 라이트를 얻기 위한 세 가지 노력을 언급했다면, 리더 입장에서는 어떨까?
하나, 신뢰하는 직원은 리더가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다른 직원에게 좋은 영향을 미친다. 리더는 자신의 직원들에게 좋은 롤모델이 되어야 한다. 하지만 직원들 입장에선 당장 실무를 하면서 배울 점이 많은 직원이 필요하다. 리더가 백번 말하는 것보다, 그 말하는 바를 실천하는 직원을 보고 배우는 것이 훨씬 파급력이 있다. 내가 경험했던 일이다.
마크: A 매니저, 이번에 우리가 진행하는 프로젝트의 범위가 예상보다 커져서 글로벌 인원들도 투입되어야 하는 상황이에요. 글로벌에 요청해야 하니 오늘 중으로 프로젝트 요약, 전체 업무 범위와 협조 업무 범위, 투입 요청 시간 등 정리해주세요.
A 매니저: 예, 알겠습니다. 혹시 관련 양식이 별도로 있을까요?
마크: 별도로 없고, 다만 글로벌에서 고객과 커뮤니케이션할 때 쓰는 양식을 활용하면 좋을 거 같아요.
A 매니저: 예, 준비해보겠습니다.
프로젝트를 하다 보면 별도 양식이 없는 자료를 만들어야 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글로벌에 인력을 요청하기 위한 자료를 준비해야 하는 A 매니저 역시 순간 막막했을 수 있다. 하지만 내가 A 매니저에 이 일을 시킨 이유가 있었다. 바로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신뢰했기 때문이다.
우선 해당 프로젝트를 전체적으로 꿰뚫어 보는 시각이 있었고, 본인이 맡은 부분뿐 아니라 다른 직원이 맡은 부분까지 호기심을 갖고 들여다보았다. 무엇보다 ‘No’를 할 줄 몰랐다. 그렇다고 무조건 ‘Yes’를 외치는 것이 아니라, 본인이 진행하기 위해서 필요한 사항들을 명확하게 요청할 줄 알았다.
A 매니저는 반나절이 지나지 않아 내가 요구한 모든 것이 구비된 자료를 완성했다. 내가 한 글자도 수정할 필요가 없는 그런 완벽한 자료였다. 이를 리더인 나만 느꼈을까? 아니다. 같이 공유받은 모든 직원이 느꼈을 것이다. 누군가는 신선한 충격을 받았을 것이라 생각한다. ‘나라면 이 정도 자료를 준비할 수 있었을까?’ 자문한 직원도 있었을 것이다.
둘, 리더 본연의 역할에 충실할 수 있게 된다. 직원들도 본인 업무에 집중하기를 원하는 것처럼 리더도 리더 본연의 일에 집중하기를 원한다. 예를 들어 프로젝트에서 리더의 역할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방향키 역할이고 다른 하나는 우산 역할이다.
우선은 프로젝트가 지엽적인 문제에 파묻혀서 엉뚱한 길로 새지 않고, 프로젝트의 큰 목표를 향해서 나아갈 수 있도록 하는 방향키 역할을 해야 한다. 다음으로는 프로젝트팀원이 본인들 업무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여러 이해관계자와 커뮤니케이션하면서 불합리한 업무를 하지 않도록 지켜주는 우산 역할도 해야 한다.
신뢰할 수 있는 직원이 많을수록 리더가 이러한 본연의 역할에 충실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리더가 본연의 업무에 집중하게 되면 이는 결국 모든 팀원에게도 방향키와 우산이 되어줄 수 있어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게 된다. 모든 것이 선순환인 것이다.
셋, 리더는 다음 리더를 생각한다. 글로벌 회사에는 후계자 계획(successor plan)이라는 것이 있다. 예를 들어 사장의 자리가 갑자기 공석이 되었을 때는 그 자리를 대체할 후보자들이 미리 있어야 한다. 따라서 많은 리더들은 자신을 대체할 사람을 계속해서 물색한다. ‘아 저 친구라면 내 자리를 대신할 수 있겠구나’라고 생각할 수 있는 직원을 찾는다.
팀장 포지션도 크게 다르지 않다. 자신의 자리를 대체할 수 있는 후보들이 하나둘 생겨날 때 비로소 안도할 수 있다. 본인 팀의 미래가 어둡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후계자로서 가장 큰 자질 중 하나가 바로 ‘그린 라이트’를 갖고 스스로 중요한 결정을 내리면서 업무를 리딩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직원들에게는 내 모든 역량을 전수해주고 싶은 욕심까지도 든다.
선 신뢰 후 조율
내가 리더로서 직원을 대하는 자세는 ‘선 신뢰 후 조율’이다. 우선 먼저 신뢰를 하고 업무를 맡겨본다. 때로는 내가 기대했던 결과의 50% 수준으로 들고 오는 직원도 있다. 무턱대고 나무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나 역시 완벽한 리더가 아니기 때문에 원인을 분석해야 한다. ‘이 정도 말하면 알아들었겠지?’ 싶어도 직원 입장에서는 리더인 내가 업무 지시를 너무 대충했을 수도 있다. 때론 내가 직원의 역량을 과대평가한 경우도 있다.
이렇게 먼저 신뢰를 주고, 결과물을 가지고 조율하는 일을 계속한다. 이것이 직원과의 신뢰 관계성을 유지하면서 동시에 팀의 역량을 끌어올리는 데 도움이 된다.
가끔은 이런 생각을 한다. 내가 100%, 아니 120% 신뢰하는 직원들만으로 팀을 구성할 수 있다면 이거야말로 직장판 어벤저스일 것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내 생각이 틀렸다. 내가 노력한다면 지금의 팀원들, 직원들 모두를 신뢰할 수 있다. 신뢰는 상호 간에 생기는 것이지만 직장에서는 리더가 직원을 먼저 신뢰하는 것이 순서다. 그래서 오늘도 스스로에게 묻는다.
나는 우리 직원을 신뢰하는가?
원문: Mark의 브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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